171화 숙청 (2)
“이, 이익!”
“죽어!”
공포가 한계점에 도달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로만을 위협하던 병사들은, 협박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결국 선제공격을 택했다.
오라 검사들은 오라를 일으켜 달려들었다.
십수 명의 인원이 다 같이 공격하는 상황에, 그들은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렇게.
푸확!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로만의 검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가장 선두에서 달려들던 오라 검사들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늦게 물러나려고 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따라붙으며 적들의 육체를 베어 버렸다.
새빨간 피와 찢어질 듯한 비명이 뒤얽혔다.
그들은 귀족파를 따른다는 이유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판단력으로 인해 코앞에 다가온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카이로의 악마!”
“으아아아악!”
남부 전선.
헥토르 왕국은 로만 드미트리를 카이로의 악마라고 불렀다.
카이로의 사람들은 그 업적을 영웅이라 표현했지만, 반대편에 서니 어째서 악마라 불리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새로운 카이로 랭킹 1위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오라 검사들조차도 일반 병사들처럼 공격 한 번 막아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피, 피, 피.
길이 열렸다.
빨갛게 점철되어 버린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사실.
귀족파의 전력은 이 정도로 약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전력을 갉아먹는 실수를 저질렀다.
‘베네딕트 후작. 끝까지 나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한 판단이, 너를 나락으로 빠트릴 것이다.’
공개 랭킹전.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상대들을 전투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랭킹전의 대가로 생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애초에 귀족파와의 격돌을 예상했다.
99위의 제이든을 죽여 버렸다면. 귀족파는 공개 랭킹전에 자신의 검사를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투 불능 정도의 리스크라면 감당할 만했고, 핵심 전력들이 로만의 상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실수였다.
오스카를 비롯한 핵심 전력.
그들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마지막에 상대한 오스카의 경우에는, 일부러 내부에 마나를 흘려보내 오라의 길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베네딕트 후작은 로만의 앞을 막으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보유한 제일 강력한 검이, 일시적인 전투 불능이 아니라 검사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귀족파와의 격돌을 대비했다.
베네딕트 후작은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판단했건만, 진실은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었다.
퍽.
기사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 주변으로.
귀족파의 병사들은 차마 달려들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의미 없는 죽음에 더는 달려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저벅저벅.
로만은 그들을 지나쳤다.
앞으로 걸었다.
바로 옆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무기를 겨누는 병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검을 쥔 채로 베네딕트 후작의 흔적을 따라갔다.
병사들은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이 암담한 현실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천천히.
로만은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상대가 충분히 도망칠 수 있도록.
로만 드미트리는, 베네딕트 후작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살아 있는 권력.
카이로의 실세.
국왕 앞에서도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던 베네딕트 후작이, 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로 열심히 달렸다.
‘왕궁으로 도망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국왕과 모종의 음모를 계획했다면,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처형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일단 내 영지로 돌아가자. 그곳에서 세력을 집결시킨다면, 상황을 충분히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의 판단이었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숨을 헐떡일 정도로 뛰었다.
몸을 치장하던 고가의 장신구들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것을 돌아볼 여유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를 따라.
귀족파의 귀족들도 뛰었다.
카이로의 권력자들이 일제히 도망치는 모습은,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베네딕트 후작은 워프 게이트에 도착했다.
“하악, 하악. 지금 당장 좌표를 베네딕트 영지로 연결하라!”
“무슨 일…….”
짜악!
설명을 길게 할 시간이 없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병사의 뺨을 날려 버렸다.
“이런 개새끼가! 내가 누군지 몰라?! 그따위 반문을 할 시간이면, 얼른 베네딕트 영지로 좌표를 연결하라고! 만약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내 장담컨대 네 녀석의 삼대를 멸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황급히 좌표를 연결했다.
해당 관계자들이 모두 나와서, 워프 게이트의 기능을 작동시켰다.
우웅-
인원은 최소한으로.
스피드는 빠르게.
워프 게이트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지만, 베네딕트 후작의 요구에 따라 정말 빠르게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가 요구한 대로는 귀족파의 귀족들을 모두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베네딕트 후작이 먼저 워프 게이트에 오르자, 권력의 순서대로 그를 따라 탑승했다.
“너희는 다음 차례로 따라오거라!”
“후작님!”
낙오된 귀족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워프 게이트는 딜레이가 있다.
다음 차례를 위해서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워프 게이트로 도망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화악-
베네딕트 후작은 간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밝은 빛무리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썅!”
“빌어먹을 새끼.”
귀족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귀족파의 수장이고 뭐고, 지금은 그따위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도보로라도 도망치려던 귀족들.
그들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추어 섰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나타난 것이다.
피로 물든 검을 쥐고 있는 모습에, 귀족파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제발 침착하게.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린다면 대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 생각인가?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내 가문의 사람들은 자네에게 복수하려고 무슨 짓이든 할 걸세. 그러니 살려 주게. 살려만 준다면, 귀족파를 버리고 앞으로 드미트리 가문을 따르겠네.”
간절한 목소리였다.
무릎을 꿇고, 간과 쓸개를 모두 내줄 것처럼 굴었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호위 병력이 모두 죽어 버린 지금, 그들의 최선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밖에 없었다.
로만이 이죽거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이 자리.
자신을 마주하는 사람들은 살의를 가지고 나타난 이들이다.
방관자의 태도를 유지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확.
“아악!”
한 귀족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반항할 방법은 없었다.
애처롭게 버둥거릴 뿐, 로만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머리를 억눌렀다.
다른 귀족들을 바라보며.
“칼을 뽑았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을 베었다.
꽥꽥 돼지 같은 비명과 함께,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땅바닥에 주저앉은 귀족파의 귀족들은, 넋을 잃은 얼굴로 그만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 * *
그 시각.
카이로 왕궁은 난리가 났다.
“지금 수도 한복판에서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와 로만 드미트리가 시비가 붙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일방적으로 귀족파를 학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그게 무슨.”
다니엘 카이로가 경악했다.
학살극이라니.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수도에서 싸우는 것도 그렇고, 로만 드미트리가 카이로의 실세인 베네딕트 후작을 상대로 검을 뽑을 줄은 몰랐다.
순간 불길한 마음이 일었다.
수도에서의 전투는 하나의 가능성을 말했다.
‘설마 반란이란 말인가.’
어쩌면.
오늘이 디데이였는지도 모른다.
로만 드미트리는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렸다.
공개 랭킹전이라는 명분 때문에 니콜라스 백작은 혼자만 나설 수밖에 없었고, 국왕파가 보유한 제일 강력한 무기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말인즉. 다니엘 카이로는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악의를 가지고 왕궁에 들이닥친다면, 반란은 그대로 성공할 것이다.
로열 나이트의 부기사단장.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지금 당장 로열 나이트와 왕실 경비병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언제 반역도가 왕궁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국왕 폐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왕궁이 혼란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반란에, 다니엘 카이로는 호흡을 골랐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반란.
언제고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국왕파는 니콜라스 백작을 내세워 아슬아슬하게 권력을 유지할 뿐, 다른 세력들을 억누를 만큼의 힘은 갖추지 못했다.
그야말로 파리 같은 목숨이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느 한 세력이 마음먹고 반란을 일으켰다면 진즉에 왕좌의 자리를 박탈당했을 것이다.
예정된 미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다니엘 카이로는 최대한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때였다.
“국왕 폐하! 로만 드미트리가 왕궁에 도착했습니다!”
반란의 주도자.
그가 기어코, 성역(聖域)에 발을 들였다.
* * *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왕실의 사람들은 예상한 그림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들이닥치자마자 학살을 벌일 줄 알았는데, 그는 순순히 왕실의 법도를 따랐다.
“무장을 해제하라!”
턱.
상의에 걸친 갑옷을 벗었다.
무기를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적의를 표출하던 로열 나이트들은, 일단은 명령을 따르고 있는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를 국왕에게 안내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싸며 검을 겨누고 있는 모습은, 언제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득달같이 공격할 준비를 끝냈다.
우뚝.
로만이 멈추었다.
다니엘 카이로를 올려다보며, 신하로서의 예의를 갖추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번거로운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지. 수도에서 사건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 자초지종을 설명하거라.”
바로 본론을 물었다.
반란의 여부.
카이로 왕실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피로 얼룩진 얼굴로 말했다.
“사건은 베네딕트 후작의 강압적인 요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공개 랭킹전이 끝난 직후, 병력을 이끌고 찾아와 앞으로 귀족파를 따르라며 닦달했습니다. 그때 저를 막아선 병력은 수백이 넘었습니다. 그것은 엄연히 카이로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고, 저는 베네딕트 후작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대역 죄인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카이로는 베네딕트가 아니라 다니엘 카이로 국왕 폐하를 따르기에,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들끓었다.
강한 감정을 표출하며,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니엘 카이로를 보았다.
“그래서 피를 보았습니다. 문제가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순순히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습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로만은 카이로의 금기를 어겼다.
명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국왕파의 사람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말은 끝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이 왕궁을 찾은 목적을 밝혔다.
“지금부터 국왕 폐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만약 제가 원하는 바를 약속해 주신다면. 드미트리 가문은 카이로의 검으로서, 귀족파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카이로의 혼란한 권력 체계를 바로잡겠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드미트리와 귀족파의 격돌.
그것은, 국왕파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