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천마재림 (天魔再臨) (4)
그날.
잠자리에 들지 못한 사람은 케빈만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왕국 연합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로만 드미트리와 그간 합을 맞추었던 네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곳은 내게 맡겨라. 한니발을 쓰러트리고, 금방 따라가겠다.”
니콜라스 백작의 말.
크리스는 그때의 순간을 되새겼다.
자신이 망설이는 순간 니콜라스 백작의 희생이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크리스는 이를 악물며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그때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한니발의 오라는 파괴적이었고, 단 몇 번의 공방만으로도 절대 쓰러트릴 수 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무너지는 서부 전선을 뒤로하고, 전략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전.
사람들로부터, 니콜라스 백작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니콜라스 백작님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한 자들에 의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한니발에 의해 죽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진정한 검사셨습니다. 만약 니콜라스 백작님이 크로노스 제국을 막아 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서부 전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몰살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참담했다.
말을 전해 준 사람은 니콜라스 백작이 모두의 은인이라면서 죄책감을 덜어 주려고 했지만, 크리스는 몸을 장악하는 무력감에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면서 생사를 오가는 삶을 살았다.
그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역설적으로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넓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곁에 남기 위해서는, 세상이 넓다는 이유만으로 매번 패배를 합리화할 수 없었다.
바르보사.
한니발.
그와 같은 강자들.
그런 괴물들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니콜라스 백작과 같은 일은 또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때도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남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 그렇게 살아남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를 악물었다.
자괴감에 무너지기에는, 크리스가 바라는 목표는 높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넘어서고자 했다.
이대로 자괴감에 빠져 버린다면, 다시는 로만 드미트리를 넘어서겠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척.
검을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크리스는 홀로 검술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검술을 사용할 수 있을까.
만약 니콜라스 백작을 보좌할 수 있을 만큼의 검술만 보유했어도, 그와의 협공으로 한니발을 쓰러트렸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로만 드미트리의 섬전(閃電)과 조나단 기사단장의 비기.
그것들을 현란하게 펼치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자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항상.
크리스는 먼발치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루, 이틀, 쌓여 가는 시간에 직접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컸지만, 스스로 발전하라는 로만 드미트리의 말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검을 휘둘렀으며, 그렇게 휘두른 이유가 무엇인지.
로만 드미트리가 마나를 받아들이는 방식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버릇까지도, 켜켜이 쌓인 세월이 그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간절함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진실을 파고들었다.
‘주군의 방식은 오라의 폭발력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마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본질(本質)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오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발현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세상이 가르치는 방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법이다.
누군가는 그 방식을 이단이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나는 주군의 곁에서 세상이 규정한 정답이 사실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 없음을 알았다.’
정답은.
처음 정답을 규정한 존재가 있을 뿐이다.
대륙의 방식으로 그릇을 만들고, 로만 드미트리의 방식으로 싹을 틔웠으며, 두 개를 혼합한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 갔다.
무조건 로만 드미트리의 방식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은 이미 대륙의 방식을 받아들인 존재기에, 두 가지의 강점을 완벽하게 발현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했다.
해가 저물고.
해가 떠올랐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크리스는 홀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후둑.
후두두두둑.
환골탈태(換骨奪胎).
육체가,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 *
이른 아침이었다.
푸키와 볼칸은, 부스스한 얼굴로 연무장에 나갔다.
“무슨 일로…… 응?”
“크, 크리스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리스의 부름에 불려 나온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외모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평소에도 드미트리의 미남자라고 불리던 사람이 크리스였다.
그런데 백옥 같은 피부에 찰랑거리는 금발의 머리칼은, 크리스의 외모가 몇 단계 업그레이드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크리스는, 외모 칭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를 상대로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만약 공격을 막는다면, 내 1년 치의 봉급을 너희에게 주도록 하지.”
“진심입니까?”
“나중에 딴말하기 없습니다.”
눈빛이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며 상당한 보상을 받았지만, 태생이 전쟁 용병인 푸키와 볼칸은 돈이 걸린 문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진심으로 따랐다.
단순히 충성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고생한 만큼 확실한 보상을 챙겨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크리스의 말.
실수였다.
그의 검술이 번개처럼 빠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둘 또한 만만한 존재라고는 할 수 없었다.
둘 다 검을 들었다.
팽팽한 분위기에, 크리스가 말했다.
“정확히 10초 뒤. 정면에서 볼칸의 상의를 베고, 이후에 푸키의 머리카락을 베겠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황당한 상황이었다.
공격을 막아 보라는 건 분명히 훈련의 일종이었는데, 크리스는 자신이 어떻게 공격할지와 그 타이밍도 말해 주었다.
무시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백 번 싸워도 백 번 모두 크리스를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내는 일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패배할 확률은 없었다. 살짝 달아오른 얼굴은, 자존심이 상했다는 사실을 표정에서부터 드러냈다.
1초.
2초.
마른침을 삼켰다.
속으로 시간을 세며, 9초에 이르렀을 때 둘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 순간.
번뜩.
팟.
바람이 불었다.
크리스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볼칸의 상의 옷조각과 푸키의 머리카락들이 하늘에 흩날렸다.
고통은 없었다.
실제로 ‘살의’가 담기지 않은 공격이기에 살갗이 베이지는 않았지만, 둘은 허공에 흩날리는 것들을 바라보며 넋을 잃은 표정을 보였다.
빨랐다.
공격을 당하고도, 어떻게 공격을 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크리스가 검을 거두었다.
지난 며칠.
그는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다.
몸이 부서지고 근육이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 크리스는 이전에는 범접하지 못했던 힘을 얻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무공도.
조나단 기사단장의 비기도 아니었다.
그만의 것.
크리스는, 선구자(先驅者)의 반열에 들어섰다.
* * *
평온한 나날이었다.
경비병을 세워 두고 시간을 보내던 크로노스 제국군은, 척후병(斥候兵)의 보고에 발칵 뒤집혔다.
“지금 로만 드미트리가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적의 진군.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들로서는, 척후병의 보고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미친 것이 분명합니다! 30만 대군을 상대로 전면전이라니요!”
“섣부른 판단은 금물입니다. 남부 전선에서의 전투만 보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전술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적들의 진군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전략적인 이유를 위한 것일 테고, 실제로는 전면전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 위치를 지켜야만 합니다. 섣불리 딸려 나갔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비상식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의견 대립이 생겼다.
수뇌부들의 목소리가 뒤얽혀 혼란스러운 상황에, 뱀포드 공작은 분노한 표정을 보였다.
콰앙!
“다들 목소리를 낮춰라.”
분노가 들끓었다.
뱀포드 공작의 살벌한 기세에, 수뇌부들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의도를 가졌든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감히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같잖은 일이지 않은가. 일개 왕국 따위가,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 지금부터는 자존심의 문제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의 기세를 꺾지 않는다면, 우리는 승리할지라도 대륙의 조롱을 받을 것이 뻔하다.”
30만 대군을 보유하고도 고성에서 수성에 전념한 겁쟁이 지휘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들이 자신의 분노를 유도한 것이라면, 그것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함정?
걱정하지 않았다.
적들의 무엇을 준비했든, 압도적인 힘으로 짓밟아 버릴 것이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에게 명하라. 우리는 지금부터, 로만 드미트리를 직접 처단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심지에 불이 붙었다.
이제는.
복잡한 전략 따위가 아닌, 창칼이 보여 주는 힘만이 전장의 승패를 결정할 것이다.
* * *
평야 위.
양군의 병력이 몰려들었다.
숫자에서부터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크로노스 제국은 마치 해일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끊임없이 밀려드는 반면, 로만 드미트리의 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보였다.
그들의 병력도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서부 전선에서 물러났었던 병력도 합류했지만, 크로노스 제국의 병력이 그를 압도해 버릴 만큼 많을 뿐이었다.
일정 간격을 두고.
서로 대열을 형성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차오르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적군을 향해 걸어 나왔다.
저벅저벅.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걸음을 멈추고 적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드미트리 공국의 로만 드미트리다. 크로노스 제국에, 대전사 전투를 신청한다.”
대전사 전투.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가 대전사 전투를 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상상했던 일이 벌어지니 다양한 감정이 들끓었다.
어떤 이는 당황했으며, 어떤 이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고, 어떤 이는 분노했다.
그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감정은 분노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전사 전투를 언급한 이 자리에는, 일반 검사도 아니고 크로노스 랭킹 2위에 빛나는 한니발이 존재했다.
그 사실을.
로만 드미트리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전사 전투를 바란다는 사실에, 한니발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제가 상대해 주고 오겠습니다.”
“아니, 불허(不許)한다.”
뱀포드 공작이었다.
상대의 의도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제국이 보유한 강력한 검을 처리함으로써, 실질적인 이득과 동시에 분위기를 가져오려는 의도일 것이다.
한니발의 실력은 크로노스 제국이 인정했다.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라고 할지라도 한니발을 쓰러트린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나, 만일의 가능성을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바르보사와 한니발.
둘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한니발이 무조건 승리하겠지만, 로만 드미트리처럼 단 일곱 번의 공격에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는 크로노스 제국조차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우물 안에서 탄생한 개구리가 아니라, 대륙에서 제일(第一)을 논해야 할 만큼의 강자였다.
그렇다면.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힘은, 이따위 대전사 전투가 아니라 결과로 증명하면 될 일이다.
‘로만 드미트리. 정말 힘으로 대결하길 바라는 것이냐.’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30만 대군.
한니발과 셰피르 등등.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제안하는 것이 겨우 대전사 전투라는 사실이, 뱀포드 공작으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정말 그게 전부라면. 변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를 낱낱이 분석했기에, 뱀포드 공작은 로만 드미트리와 한니발의 대결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와의 승부가 두렵거든 제안을 바꾸도록 하지. 나를 대신할 두 명의 전사를 내보낼 테니, 너희도 그에 따라 두 명의 전사를 내보내는 것이 어떤가. 이것마저도 거절하겠다면 그때는 대전사 전투는 없던 일로 하겠다.”
그 말은.
뱀포드 공작의 속을 뒤집는, 명백한 도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