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615)

174화 숙청 (5)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겠다는 귀족파의 결단에, 파비우스 백작은 혼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으흐음.”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의 신성은 랭킹 99위부터 차례로 쓰러트리면서, 마침내 부동의 1위인 니콜라스 백작과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베네딕트 후작은 로만 드미트리가 귀족파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 자리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그렇게 현실성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

‘나는 남부 전선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인물인지를 경험했다. 귀족파가 군대 규모의 병력을 불러들인다 한들, 로만 드미트리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베네딕트 후작은 공개 랭킹전 직후가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렸다는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1년 전의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틀러를 쓰러트리고 성문을 열었던 그 괴물이, 지금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겠지.’

1년 전.

파비우스 백작은 남부 전선에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 입만 나불거릴 때, 그는 직접 움직여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험했다.

로만의 무력.

그야말로 전율이 일었다.

홀로 걸어가서 버틀러를 쓰러트린 것도 대단한데, 성문을 열고서 적을 도륙하는 모습은 현세에 악마가 강림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았다.

파비우스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를 영입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회유 대상이다.

절대, 그를 적대하는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

‘문제는 로만 드미트리가 반란을 들먹였을 때 순순히 굴복하느냐인데. 그 녀석은 절대 순순히 무릎을 꿇을 놈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가 카이로스에서 검을 뽑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확신하지만, 상식 안에 존재하는 녀석이었다면 남부 전선에서도 도망치는 것을 택했겠지.’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택일(擇一)의 문제였다.

결전의 날.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면 귀족파에 찍힐 가능성이 있다.

로만 드미트리가 순순히 투항하거나 당해 버린다면, 파비우스 백작은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돌아올 불이익을 감당해야만 했다.

단순히 공든 탑이 무너지는 정도가 아니다.

베네딕트 후작은 선이 확실한 사람이라서, 파비우스 백작의 세력을 카이로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려 할 것이다.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이 옳을까.

단발적인 싸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후에 드미트리와 귀족파의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도 고려했다.

결국.

‘논리적으로는 어떤 판단이 옳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베네딕트 후작을 모시면서 나는 귀족파의 전력을 어느 정도 예상하는 반면, 로만 드미트리의 한계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적으로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남부 전선에서 목격했다. 파비우스야, 파비우스야. 내 결정에 가문의 미래가 달렸구나.’

결단을 내렸다.

파비우스 백작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귀족파가 모두 수도로 병력을 보낼 때, 그는 아프다는 핑계로 침묵을 지켰다.

결전의 날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파비우스 백작의 모습에, 당연히 같은 귀족파들이 연락을 보냈다.

[파비우스 백작, 정말 그런 선택을 내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 당신이 아프다는 핑계를 믿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늘 날이 저물고 나면. 베네딕트 후작님은 축배를 들면서, 파비우스 백작이라는 사람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할 겁니다. 아직 늦지 않습니다. 지금에라도 병력을 보내십시오.]

[멍청한 사람아. 평소에는 눈치껏 잘만 행동하다가, 이런 중요한 시기에 멍청한 판단을 내리다니!]

걱정이 빗발쳤다.

귀를 막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로만 드미트리와 귀족파가 맞닥트렸을 때.

파비우스 백작은, 안락한 저택에서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겼다.

* * *

베네딕트 후작.

그는 곧바로 파비우스 백작에게 연락했다.

귀족파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팟.

통신이 연결되었다.

화면에 떠오른 파비우스 백작의 얼굴에, 베네딕트 후작은 분노를 토해 냈다.

“파비우스. 네가 정말 미쳤구나. 귀족파의 명령을 어기고 카이로스에 병력을 보내지 않은 것으로도 모자라, 뭐? 소집에 불응하겠다고?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말해라. 정녕 그것이 파비우스 너의 선택인가?”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카이로스의 너구리.

그가 얼마나 영악한 인물인지를 알면서도, 눈치가 빠른 것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런데.

그가 배반하다니.

일반적인 귀족이 아니라 너구리의 판단이라는 사실이, 베네딕트 후작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자신을 외면했다는 것. 그것은 귀족파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가.

파비우스 백작이 말했다.

[베네딕트 후작님. 이렇게 된 거 서로 솔직해집시다. 카이로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만 드미트리에게 이렇다 할 반항도 못 하고 학살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제 판단의 근거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공개 랭킹전을 진행하면서 귀족파의 실력자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고, 베네딕트 후작님이 그런 판단을 내리리라는 사실을 알고 서슴없이 검을 뽑았습니다. 그런 괴물과 대체 어떻게 싸우라는 겁니까?]

“이 새끼가 감히!”

[에이, 씨발.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파비우스 백작이 정색했다.

콘라드 자작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는 돌아섰을 때, 확실하게 자신의 태도를 보였다.

[나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내 모든 것을 걸었어. 그러니까, 구질구질하게 아직도 내가 네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던 개새끼로 보지 말라고. 사람이 말이야. 눈치가 있어야지. 카이로스에 병력을 보내지 않고 소집까지 불응했다면, 알아서 내가 배신했다는 사실 정도는 받아들이는 게 맞잖아? 그런데 대체 무슨 험한 꼴을 보려고 내게 직접 연락까지 해서 지랄이야.]

“……그 선택.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후회는 개뿔. 내 선택이 틀렸다면, 죽기밖에 더하겠어?]

“파비우스. 너는 귀족파의 배반자다. 네가 어떤 선택을 내렸든, 로만 드미트리가 배반자에 불과한 너를 중요하게 사용할 것 같나? 배반자는 어디에서도 배반자일 뿐이다. 네가 차라리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면, 귀족파의 승리를 도왔다면. 나는 분명히 널 중하게 사용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고 한들, 네 녀석은 필요가 없어진다면 나를 서슴없이 버렸겠지.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아니더라고. 콘라드 자작을 받아들인 것만 보더라도, 그는 상황에 따라 나 같은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추었어.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거 아니야?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사람을 아끼는지. 비록 나는 배반자로서 시작하겠지만, 지금부터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생각이야.]

그간의 사건.

파비우스 백작은 처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명백한 적의(敵意)를 보이고 실행에까지 옮겼다면,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살아남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아직 선을 넘지 않았다면. 콘라드 자작처럼 그의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소집에 불응했고, 베네딕트 후작을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파비우스 백작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베네딕트 후작.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아마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거야. 그때도 이렇게 적대적으로 연락을 돌려 보라고. 귀족파가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까.]

그 말에.

베네딕트 후작은 눈을 부릅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툭.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파비우스의 말을 확인하기까지, 베네딕트 후작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귀족파의 소집 명령.

파비우스 백작이 예외일 뿐이지, 대부분은 소집 명령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나 발렌티노 후작은 드미트리 가문을 지지할 것을 선언한다.]

발렌티노.

중립의 세력이 움직였다.

카이로의 거물이 드미트리를 지지하는 바람에, 주변에 있는 가문들로서는 섣불리 병력을 움직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최근 발렌티노는 거액을 들여 카이로의 용병을 휩쓸었다.

그때는 대륙을 대상으로 상단을 운영하는 과정에 인력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는데, 그것이 설마 드미트리 가문과의 동맹으로 직결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파비우스 백작도 힘을 썼다.

그는 배신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변심으로 새로운 세력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이라는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심히 뛰어다녔다.

덕분에 평소에 파비우스 백작과 인연을 맺어 왔던 가문들이 마음을 돌렸다.

귀족파를 배신하고, 드미트리를 따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겨우 며칠.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되었다.

파비우스와의 연락을 끊은 직후, 베네딕트 후작은 빗발치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발렌티노 후작이 언제 영지를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많은 병력을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저희의 최선이라는 것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베네딕트 후작님. 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영지가 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국왕파와의 전쟁이 중요하다지만, 가문의 식솔들을 모두 위기에 빠트릴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파비우스 백작과 의견을 같이하기로 했습니다.]

현기증이 일었다.

아직 뭘 해 보기도 전에.

베네딕트 후작은 그렇게, 귀족파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왕궁 회의실.

출병(出兵) 전 마지막 회의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며칠 전. 귀족파 소속의 파비우스 백작이 저희를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를 비롯한 몇몇 가문이 변심을 결정했고, 발렌티노 후작이 저희를 지지하면서 귀족파는 이번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반역도를 단번에 쓸어 버릴 기회입니다.”

일련의 상황.

국왕파의 사람들은 감탄했다.

파비우스 백작도, 발렌티노 후작도.

그들의 능력이 아니었다.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만들어진 판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경외심이 담긴 눈빛을 보였다.

‘만약 국왕파가 로만 드미트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드미트리의 힘만으로 거사를 성공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카이로의 깃발이 드미트리에 의해 꺾여 버렸겠지.’

소름이 돋았다.

드미트리의 저력은 대단했다.

귀족파를 단번에 궁지에 몰아 버린 상황에, 다니엘 카이로가 물었다.

“귀족파와 정면 대결을 하겠다는 의미인가?”

“맞습니다. 정확히는 공성전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귀족파가 정상적으로 소집에 응했다면 그들은 곧바로 수도로 진군했겠지만,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일단은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서라도 수성을 택할 것입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여유를 줄 이유가 없습니다. 이대로 병력을 진군시켜 반역도를 소탕해야 합니다.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찍어 눌러야만, 앞으로 권력의 체계가 찢겨 나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전면전이었다.

결전의 순간에, 사람들은 결정권자인 다니엘 카이로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번 전쟁을 주도하는 세력은 국왕파가 아니라 드미트리다.’

다니엘 카이로.

그는 본질을 보았다.

만약 이번 전쟁에 승리한다면, 사람들은 국왕파의 저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드미트리를 킹메이커라고 부를 확률이 높았다.

그만큼 로만 드미트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판을 만들었다.

그동안 카이로를 사분하던 세력들을 정리하는 대신, 드미트리는 카이로 왕실을 단번에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세력을 형성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배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드미트리는 카이로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 설령 드미트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애초에 드미트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나리를 팔아먹는 극악무도한 반란 세력들보다는, 적어도 나를 국왕으로서 대해 주는 드미트리와의 공존이 카이로를 위한 일이다. 카이로의 판도는 뒤바뀌었다. 앞으로의 미래에서 카이로 왕실이 존재 의미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로만 드미트리가 부당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드미트리를 도울 것이다.’

결단을 내렸다.

다니엘 카이로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왕실의 병력은 전력을 다해 로만 드미트리를 도울 것이며, 그가 내리는 명령이 곧 나의 뜻임을 명심하라. 로만 드미트리. 너에게 이번 전쟁의 전권을 일임하겠다.”

집중되는 시선.

로만 드미트리가, 군신(君臣)의 예를 다했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전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지금부터는.

반역도를 모조리 처단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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