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1)
창밖에서 햇살이 비추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중년의 사내는, 힘겹게 눈을 뜨더니 멍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았다.
“……죽지 않았구나.”
메마른 목소리.
사내의 정체는 니콜라스 백작이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통증에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린 그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증명하듯, 상반신 전체가 붕대로 뒤덮였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만 심각할 뿐, 로만 드미트리는 날 죽일 의도가 없었다.’
몸을 살피고 내린 결론이었다.
가슴 위쪽부터 치골까지 내려오는 상처는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지만, 살갗을 베였을 뿐 내상은 조금도 입히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비를 베푼 것이 확실했다.
세대교체를 위해서 겉으로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으나, 아직 살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로만의 진심을 증명했다.
뿌연 기억 속에.
로만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뒷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카이로를 배반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직후.
니콜라스 백작은 벼락같은 일격을 맞았다.
사람들은 니콜라스 백작이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부릅떴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은 머릿속으로 파고든 음성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의중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간의 행보는 카이로 왕실과 조금의 접점도 없었고, 오히려 베네딕트 후작과 같은 세력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균형의 추다. 그가 귀족파에 붙는다는 것은, 니콜라스 백작을 보유한 카이로 왕실이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공개 랭킹전에 나섰다.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림으로써, 아직 자신이 얼마나 높은 벽인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결과는 압도적인 패배였다.
사람들이야 치열한 승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직접 검을 섞은 니콜라스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보다 최소 두 수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속되는 정면 대결에서 그렇게 압도적인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니콜라스 백작의 의도를 따라 주면서도 단 한 번도 밀리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손속에 자비를 베푸는 여유도 보였다.
패배.
불행한 결과였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과 마지막에 들었던 말은, 니콜라스 백작을 고민에 빠트렸다.
‘일단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크윽.”
몸을 일으켰다.
아직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지만.
니콜라스 백작은, 자신의 안위보다 카이로 왕실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 * *
사이먼을 불렀다.
병상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니콜라스 백작의 모습에, 사이먼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보였다.
“……저는 단장님이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니콜라스 백작.
사이먼의 하늘이었다.
자신을 향한 애틋한 감정에, 니콜라스 백작은 따뜻한 웃음을 보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네가 로열 나이트를 이끌고 중심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카이로에 닥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정말 자랑스럽구나. 네가 있기에, 나는 마음 편히 공개 랭킹전에 나설 수 있었다.”
반년 전.
공석이었던 부 기사단장직을 사이먼에게 맡겼다.
사람들은 4성 검사도 되지 못하는 사이먼의 실력에 의구심을 표했지만, 니콜라스 백작은 사이먼이야말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로열 나이트는 왕가의 수호자다.
갖은 유혹에도 흔들림 없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검술 실력보다는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게 바로 사이먼이었다.
40대 중반의 나이.
검사로서의 가능성은 대단하지 않더라도, 로열 나이트라는 이름에 정말 적합한 사내였다.
니콜라스 백작이 말했다.
“사이먼.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다오.”
“알겠습니다. 단장님이 쓰러지신 직후…….”
얘기가 시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귀족파의 격돌.
이후에 로만 드미트리는 국왕을 찾아가 거래를 제안했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내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 로만에 대한 진심 어린 존경심을 보였다.
확실한 대가를 받고 이번 일을 진행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과정은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제국파들에 대한 처분.
그리고 발렌티노라는 거물을 움직여서 판을 까는 계획.
국왕파가 우세를 점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단 한 명의 우군을 들였을 뿐인데, 국왕파는 다른 세력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상황입니다. 이제 곧 출병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휘관은 로만 드미트리가 맡았고,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를 곧바로 공격할 생각입니다.”
설명이 끝났다.
니콜라스 백작은 생각에 잠겼다.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 역대 최고의 검사가 탄생했다.
그가 내리는 선택에 따라 카이로의 판도는 어떻게든 바뀔 수 있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국왕을 택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자신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괴물이 카이로 왕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다고 말할 일이었다.
이번 전쟁.
패배하면 끝이다.
부상으로 인해 직접 전장으로 나갈 수는 없더라도, 그로서는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이먼. 나를 출병식(出兵式) 장소로 데려가 다오. 그곳에서 할 일이 있다.”
감정이 들끓었다.
왕국을 바로잡을 기회.
역사적인 순간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 * *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왔다.
곧 진행되는 출병식에, 로만 드미트리는 무장을 갖추고 걸음을 옮겼다.
철그럭, 철그럭.
평소와는 다른 복장이었다.
움직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무장만을 했던 로만이지만, 지금은 왕실을 대표하는 자리기에 완벽하게 무장을 갖추었다.
왕가의 상징이 새겨진 은빛의 갑옷.
그리고 새하얀 피부와 까만 머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저 멀리.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국왕 다니엘 카이로를 비롯한 국왕파의 사람들, 그리고 한편에는 의외의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니콜라스 백작.
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타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다.
‘니콜라스 백작은 군부(軍部)를 상징하는 존재다. 내게 공개 랭킹전에서 패배하고도 출병식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군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나한테 맡긴다는 의미겠지. 카이로 국왕도 그렇고, 니콜라스 백작도 그렇고. 혼란한 권력 체계에서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았구나.’
어쩌면.
로만은 그 순수함에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베네딕트 후작을 따른다면 정말 손쉽게 카이로를 먹었겠지만,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 덩어리들은 분명히 문제를 일으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무림을 지배하던 시절.
백중혁이 황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카이로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랐다.
탁.
자리에 섰다.
수많은 병력.
그들이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로만은 그들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로는 그동안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베네딕트 후작을 비롯한 귀족파는 나라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족속들이고, 그들로 인해 카이로는 단 한 번도 평화로운 삶이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반역도를 처단하러 갈 것이다. 같은 핏줄을 타고난 사람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내란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아픔이겠지만, 이 전쟁이 모두 끝나고 나면 카이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완전히 정리하겠다고 약속하겠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전쟁.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다.
“이번 전쟁의 선봉에는 항상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라. 내가 길을 연다면, 너희들은 나를 따라 승리를 쟁취하라.”
“우와아아아아아!”
“로만! 로만!”
“로만! 로만!”
사람들이 열광했다.
카이로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
그가 선봉에 서겠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부여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전쟁.
나라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귀족파.
그들의 대응은 예상대로였다.
베네딕트 영지에 병력을 집결시킨 그들은, 왕실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보고에 회의를 진행했다.
“인근에 있는 워프 게이트를 활용한다면, 왕국군은 빠르면 일주일 안에 베네딕트로 들이닥칠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전면전의 승산이 매우 희박합니다. 일단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의 이점을 살리면서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노려야만 합니다.”
한 귀족의 말처럼.
귀족파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처음에만 해도 병력을 집결시킨다면 단번에 카이로 왕실을 쓸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발렌티노 후작의 지지 선언과 파비우스 백작의 배반이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물론 카이로스의 너구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도 발렌티노 후작이 왜 변심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귀족파의 핵심 인물.
오웬 자작이 말했다.
“발렌티노 후작은 항상 중립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어느 한 세력의 편을 들었다가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서, 그동안 지나칠 정도로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 인물이 로만 드미트리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객관적으로 파악한 전력에서 귀족파가 밀린다는 의미고, 실제로 공개 랭킹전에서 실력자들을 대부분 잃어버리면서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인정했다.
로만의 계획은 완벽했다.
발렌티노 후작을 끌어들인 것도 그렇고, 공개 랭킹전의 숨은 의도를 알아냈을 때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문제는.
그런 존재가 적이라는 것이었다.
남부 전선에서의 활약을 들었기에, 전면전은 감히 택할 수 없었다.
“현재 귀족파는 절반에 달하는 전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로만 드미트리의 왕국군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네딕트 후작님. 크로노스와 발할라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수장이 붙잡힌 상황이라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적당한 회유책을 내민다면, 분명히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베네딕트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파를 제외한 나머지 세 세력.
언제든 손을 붙잡을 가능성은 열어 두었다.
그레고리와 덴버 백작이 건재했다면 관망을 택했겠지만, 우두머리를 잃은 존재들은 가능성이 있었다.
베네딕트 후작이 물었다.
“그들을 회유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최소한 보름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돌리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병력을 집결시키고 하나로 모으는 과정에서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단 수성을 통해 시간을 벌었으면 합니다. 시간을 버는 동안 다른 세력들의 지원을 끌어내고, 그들과 같이 양쪽에서 공격을 시도한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왕국군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알겠다. 그와 관련한 전권은 너에게 일임하겠다.”
“명을 받듭니다.”
새로운 대책에도.
분위기는 희망적이지 않았다.
악마 같은 로만 드미트리가 곧 들이닥친다는 생각에, 귀족들은 진심으로 긍정적일 수가 없었다.
카이로스에서의 학살.
일방적이었다.
몰래 불러들인 수백의 병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서는 자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듣기로는 워프 게이트에 탑승하지 못한 이들은 항복도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무릎을 꿇고 비는 사람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는 말에, 지금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전쟁은 갑작스럽게 벌어졌지만, 우리는 국왕파와의 전쟁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베네딕트에는 수성을 위한 물자와 완벽한 방어 체계가 갖추어져 있고, 이 정도의 준비라면 로만 드미트리의 왕국군이 아니라 크로노스 제국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라. 늘 그랬듯.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면, 카이로의 권력을 장악하는 세력은 바로 우리 귀족파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베네딕트 후작의 말이 옳다.
전쟁의 불길이 갑작스럽게 번졌다고는 하나, 그동안 귀족파가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감이 일었다.
시간은 귀족파의 편이다.
시간을 벌면서 상황을 주도한다면, 국왕파를 무너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믿었다.
늘 그랬듯.
귀족파는 승자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뒤.
로만 드미트리의 군대가 베네딕트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베네딕트에 도착한 직후.
사이먼이 다가와 물었다.
“지휘관님. 장기전을 대비해서 일단 진지부터 구축하겠습니다.”
베네딕트 성.
높디높은 성벽은 철옹성(鐵甕城)이라 불렸다.
하루 이틀로 끝날 싸움이 아니기에, 사이먼의 판단은 상식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아니, 이번 전쟁은 속전속결이 중요하다. 귀족파에게 시간을 허락할수록,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아진다. 그러니 진지를 구축하기 이전에 일차 공격을 준비할 것이다.”
과감한 판단이었다.
혹시라도 피해를 본다면.
병사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진지를 구축하는 데 다시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그런데.
“펠릭스, 지금부터 공성전을 준비하라.”
로만의 명령에.
한 로브인이 앞으로 나섰다.
사이먼으로서는, 아직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빛으로 로브인과 로만 드미트리를 번갈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