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2)
드르르륵.
카이로 왕국군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발사 장치를 위한 메인 뼈대는 바퀴를 달아 옮겼고, 세부 부품들은 수레에 실어서 하나씩 조합하기 시작했다.
성벽 위의 병력은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왕국군이 무엇을 하려는지 의도를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크게 걱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역시 플레어를 사용하겠다는 건가.”
베네딕트의 수문장(守門將).
경비대장 카메론이었다.
공성전에서 플레어의 사용 여부는 필수다.
수성의 이점을 상실시키게 만들어 주는 강력한 공성 병기.
일반 귀족들 간의 싸움이라면 재력에 따라 사용 여부가 결정되겠지만, 국가 단위의 내란에서 플레어를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한눈에 보아도 왕국군은 무려 다섯 개의 발사 장치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약 2시간 내외의 설치가 끝나고 나면, 저 발사 장치로부터 분출되는 화력은 성벽을 붕괴시킬 것이다.
하지만.
베네딕트는 달랐다.
‘베네딕트 성에서 수성하는 것은 그간 준비했던 선택지 중 하나다. 천공에 의뢰해서, 베네딕트 성벽에 아주 강력한 마법 방어를 형성해 두었지. 플레어 수십 발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방어력에다, 내구력이 닳는다고 할지라도 마나석만 보충해 준다면 다시 회복하는 능력까지. 카이로가 보유한 화력으로는 절대 베네딕트를 함락시킬 수 없다.’
왕권 찬탈.
귀족파의 궁극적인 목표다.
아슬아슬한 권력 체계에 굳이 무리하지 않았을 뿐,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착실하게 반란을 준비했다.
마법 방어는 시작일 뿐이다.
병사들의 군사 훈련도 꾸준하게 진행했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플랜 A와 B 같은 여러 선택지를 미리 계산했다.
당연히 국왕파가 먼저 공격하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다.
드미트리와의 연합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계획이 크게 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는 성벽.
그리고 과할 정도의 전쟁 물자를 확보한 상태.
카메론은 베네딕트를 믿었다.
혹시라도 불안에 떠는 병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왕국군의 지휘관이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을 너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남부 전선의 악마였고,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린 카이로 제일의 검사다. 하지만 이건 국가 단위의 싸움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고 한들, 천공에서 설치한 마법 방어가 형성되어 있는 베네딕트의 성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높디높은 성벽 앞에서는 일개 인간일 뿐이라는 의미다.”
불안 요소.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다.
긴장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들을 다독이며, 카메론은 확고한 믿음을 부여했다.
“나를 믿어라. 적들은 성벽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고, 최후의 승자는 우리 귀족파일 것이다.”
믿음의 근거가 있기에.
카메론의 호언장담은, 성벽 위를 긍정적인 분위기로 물들였다.
* * *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시점은 로브인들이 나타나면서부터였다.
“……저 녀석들은 뭐지?”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은데.”
성벽 위.
귀족파의 병력이 불안한 눈빛을 보였다.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불길함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제지하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가장 안전한 지역은 성벽 뒤다. 마법 방어를 형성한 성벽의 보호를 받는 이상,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한참을 준비하던 로브인들은, 작업이 끝났는지 한 인물에게 다가갔다.
“1조, 준비 끝났습니다.”
“2조, 준비 끝났습니다.”
그들의 정체.
바로 피닉스의 마법사들이었다.
로브로 얼굴을 숨긴 펠릭스는, 한 달 전에 로만으로부터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공개 랭킹전이 시작되면, 드미트리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때, 나는 의도적으로 적들을 밀어 넣고 공성전을 유도할 것이다. 펠릭스. 그들을 무너트리는 것이 바로 너희 피닉스의 역할이다.”
한 달 전.
사람들은 아직 평화를 만끽하고 있을 때, 피닉스는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로만의 명령.
목숨을 걸었다.
피닉스는 로만 드미트리 덕분에 마탑의 비기를 되살렸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야말로 평생의 은인이었다.
피닉스로서는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었고, 공성전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는 펠릭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기쁨의 웃음을 보였다.
마법사는 공성전의 꽃이다.
본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받았으니, 지금부터는 밥값을 해내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펠릭스가 말했다.
“주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말 없는 짐승도 주인을 알아보고 보답하는 법인데, 우리는 그동안 주군을 위해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때가 왔다. 주군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임무를 부여했고, 만약 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 의미는 없다.”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신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 발을 들인 이상, 인류애를 들먹이며 뒤로 내뺄 생각은 없었다.
“적들에게 보여 주어라. 피닉스가, 어떻게 대륙 13번째 마탑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를.”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마법사들이 움직였다.
발사 장치마다 세 명씩.
그들은 곧바로 마나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발사 장치에 새겨진 문양이 그와 연동되어 빛을 발했다.
화아아악.
‘일반적으로 알려진 플레어에는 화력의 한계가 있다. 마법 방어 체계를 제대로 준비했다면, 플레어로도 성벽을 무너트리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플레어의 위력을 증폭시킨다면? 예상 범위를 넘어서는 화력은, 플레어를 기준으로 한 마법 방어 체계를 무너트릴 수 있다.’
공명하는 마나.
마법사들이 플레어에 힘을 불어넣었다.
특히 화(火) 속성을 기반으로 하는 피닉스 마법사들의 마나는, 플레어와 완벽하게 융화되었다.
이윽고.
퍼엉!
퍼퍼퍼펑!
플레어가 발사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발사되는 화구는, 그대로 성벽에 작렬했다.
콰콰쾅!
콰르르르르르릉.
엄청난 위력이었다.
성벽을 뒤흔드는 충격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고, 그들은 당황한 얼굴로 경비대장을 보았다.
그는 플레어로도 절대 무너트릴 수 없는 방어 체계라고 말했다.
그런데 단번에 성벽을 무너트릴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은, 마법을 모르는 무지렁이라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밖에 없었다.
콰콰콰콰쾅!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공격은 계속되었다.
마법사들이 일으키는 마나에 따라, 불타오르는 화염은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폭발을 일으켰다.
공성전의 꽃.
마법사의 위력이었다.
그리고 13개의 마탑 중, 피닉스는 화력에 가장 특화되었다.
쿠르르르르르릉.
“경비대장님! 1번 마법 방어진의 내구도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해결책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방에서 들려오는 보고.
카메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왕국군이 설마, 다수의 마법사를 동원할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마탑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들은 중립을 표방한다. 국가 간의 싸움에서는 마탑을 지원해 준 국가를 위해 힘을 빌려주기도 하지만, 이렇듯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내란에서는 마법사들은 나서지 않는다. 그런데 저들은 대체 뭐지? 한둘이면 모르겠는데, 무려 십수 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왕국군에 가담했다. 국왕이 개인적으로 마법사들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저만한 인원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경악했다.
십수 명의 마법사.
상식의 범주를 넘어섰다.
대륙에 알려진 마탑들도, 남의 나라 싸움에 저만한 인원을 보내 주는 일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단.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계속되는 공격에, 카메론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비상 방어 체계를 가동하라! 마법 방어진에 마나석을 때려 붓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내구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라! 성벽이 무너지면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다! 우리도 지금 당장 발리스타(ballista)를 동원해, 발사 장치를 부서트려야만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장기전과는 반대되는 명령.
전쟁 물자가 빠르게 떨어지겠지만, 카메론으로서는 다른 선택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 * *
일련의 상황에 놀란 것은 카메론만이 아니었다.
불을 뿜어내는 발사 장치를 바라보며, 사이먼은 넋을 잃은 표정을 보였다.
“……이게 대체.”
마법사들.
카이로 왕실도 보유하지 못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에 따라, 귀족파를 공격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마법사들을 회유했단 말인가.
그 정답은, 크리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피닉스 마탑이 드미트리 영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는 마탑은 내란에 개입하지 않지만, 피닉스는 귀족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드미트리가 카이로의 검이 되기로 했다면, 피닉스 마탑 또한 당연히 그 일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덤덤하게 말하는 설명에.
사이먼은 충격을 받았다.
크리스의 말대로라면, 마탑이라고 불릴 정도의 마법사 집단이 드미트리 안에 속해 있다는 의미였다.
‘13개의 마탑. 비기를 잃어버리고 머릿수가 가장 적어 최하위라고 평가받지만, 그래도 화력만큼은 대륙 제일이라고 불리던 곳. 대륙 어디를 가든 환대를 받을 집단이, 드미트리에 충성을 맹세하다니.’
소름이 돋았다.
만약.
다니엘 카이로가 드미트리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귀족파를 무너트렸을 것이다.
마법사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칼끝이 카이로 왕실을 향했을 때, 높디높은 성벽만으로는 드미트리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국왕의 선택.
신의 한 수였다.
드미트리를 품지 않았다면, 괴물 같은 로만 드미트리와 마법사들을 적으로 상대할 뻔했다.
‘하늘이 카이로를 버리지 않았구나. 우리는 옳은 결단을 내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미트리의 진면목을 확인할수록.
사이먼은, 이번 전쟁이 국왕파의 승리로 끝나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 * *
해가 저물었다.
첫 공방을 마무리한 상황에, 카메론은 참담한 얼굴로 결과를 보고했다.
“……왕국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미리 준비한 마나석을 30%나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적들이 마법사를 동원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주십시오. 제가 빠르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베네딕트 성벽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이번 회의.
귀족파의 일원들은 아무도 카메론을 탓하지 못했다.
그들도 목격하지 않았던가.
성벽에 작렬하는 화염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때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는 귀족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만큼 완전히 압도되었다.
왕국군이 설마 십수 명의 마법사들을 확보했으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에,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다행히도 공격은 막았다.
하지만 카메론의 참담한 표정처럼, 하루를 버텼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베네딕트 후작이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상대는 십수 명의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적절한 휴식으로 오늘과 같은 공격을 반복한다면, 다른 곳에서 마나석을 보충한다고 한들 열흘 이상은 버틸 수 없습니다.”
“열흘이라니. 겨우 그것밖에 버틸 수 없단 말인가.”
절망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의 전략은 노골적이었다.
베네딕트에 도착하자마자 공격을 시도한 그는, 마법사들의 마나가 바닥을 드러날 즈음에 곧바로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는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귀족파의 병력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공격에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었지만, 왕국군은 무리하게 공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열흘.
완전히 국왕파의 페이스였다.
마법 공격을 당하는 동안 귀족파는 피로가 쌓일 테고, 성문이 무너지자마자 들이닥치는 병력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계획한 제국파의 회유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들을 회유하고 병력을 집결시키는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국왕파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빠르고 강력했다.
결국.
귀족파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오웬 자작. 윈스턴 남작은 어떻게 되었지?”
“지금 귀족파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동북쪽 일대 초입 부근에 도착한 상태입니다. 아직 반전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윈스턴 남작이 텅텅 비어 있는 드미트리를 점령한다면,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지금처럼 공격을 강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때, 제국파를 끌어들일 시간을 벌면 됩니다.”
“드미트리 공략에 실패할 확률은?”
“무조건 성공할 것입니다. 윈스턴 남작은 귀족파가 자랑하는 지휘관이지 않습니까? 그의 능력이라면, 동북쪽 일대를 충분히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유일한 변수는 드미트리가 마법사를 보유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인데, 이미 베네딕트 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십수 명의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이상의 마법사를 보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만약 변수가 발생할지라도 전력의 차이로 인해 결과가 달라질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라.
상대는 변방의 오합지졸들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를 비운 그들로서는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귀족파.
그들 전체가 베네딕트에 모인 것이 아니다.
병력을 둘로 나누었고, 일부 병력은 윈스턴 남작을 따라 드미트리로 향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베네딕트는 멍청하지 않았다.
일부러 성을 걸어 잠그고 시선을 분산시킨 뒤에, 적의 본진을 털어 버리는 영악한 작전을 택했다.
베네딕트 후작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윈스턴 남작에게 전달하라. 이번 전쟁은 패배가 허락되지 않는다. 드미트리를 무너트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대한 전권을 일임할 테니, 내게 승리했다는 결과만 가져오라고 명하라. 카이로 왕실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불을 지핀 드미트리만 처리한다면, 왕국군으로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귀족파는 확신했다.
앞으로 3일 안으로.
동북쪽으로부터 승전보(勝戰報)가 도착한다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반란의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