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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177/615)

177화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3)

그 시각.

귀족파의 말처럼, 윈스턴 남작은 동북쪽 일대에 도착했다.

그는 일반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령한 뒤에, 수뇌부를 불러들여 회의를 진행했다.

촤르르륵.

지도를 펼쳤다.

부관(副官)은, 한 군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지역에서 조금만 더 진군하면 아델리안 백작의 영지가 나옵니다. 아델리안은 상업적으로 발달한 도시라서 수성에는 그리 특화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방금 본대에서 연락한 바로는 앞으로 길어야 열흘입니다.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하는데, 드미트리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적들을 일일이 상대하다 보면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열흘이면, 사실상 드미트리로 곧바로 진군해도 촉박한 시간입니다.”

수뇌부들이 우려를 표했다.

다들 뚜렷한 해답은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윈스턴 남작을 향했다.

윈스턴.

서부 전선에서 활약한 지휘관이다.

변방 출신 귀족에 불과했던 그는,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친 공을 인정받아 귀족파에 합류했다.

그 이후에 전투와 관련한 일을 전담으로 맡으면서 베네딕트 후작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한참이나 지도를 확인했다.

출병 전에 확인한 사항이었지만, 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계획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너희들의 말이 옳다. 앞으로 열흘. 이동 시간을 고려했을 때, 의미 없는 싸움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투를 최소화해서 이동해야 하는데……. 가장 빠르게 움직일 방법은 지도에 있는 이 세 영지를 지나치는 것밖에 없다.”

탁탁탁.

지도에 핀을 꽂았다.

아델리안, 롤로, 콘라드.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세 영지의 이름을 되뇌던 윈스턴 남작이, 수뇌부들을 보며 말했다.

“동북쪽 일대에는 친(親)드미트리파가 존재한다. 북부와의 전투를 계기로 동북쪽 연합회를 흡수하고 드미트리 동맹을 창설했지만, 그렇다고 애초에 친드미트리였던 존재들보다 충성심이 대단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델리안, 롤로, 콘라드, 이 세 영지는 친드미트리였던 세력들이 아니다.”

아델리안은 중립.

롤로와 콘라드는 동북쪽 연합회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회를 개최했을 때, 롤로와 콘라드는 가문의 검사를 내보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방법이 있었다.

“아델리안 영지는 동북쪽 상업의 도시다. 그들로서는 중앙 정부와의 연결고리가 차단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극단적인 선택은 되도록 피하고 싶겠지. 롤로 남작과 콘라드 자작의 경우에는 아직 드미트리 가문에 앙금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고로, 지금부터 이 세 영주에게 연락을 보내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귀족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문제가 생길지라도 피할 구멍이 있도록, 잠깐 시선을 돌려 주는 것으로 족하다.”

윈스턴은 영리했다.

상대로서는 큰 결심이 필요하지 않은 결정이다.

상대가 시선을 돌린 사이, 귀족파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길목으로 돌아서 이동하면 그만이다.

만약 일반적인 전쟁이었다면.

적들의 척후병(斥候兵)에 무조건 발각되어서 사방에서 공격을 당할 수도 있지만, 드미트리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세 귀족의 동의만 끌어낸다면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명령이 떨어졌다.

부관은 곧바로 마법 통신을 연결했다.

조건은 이랬다.

[우리 귀족파는 동북쪽 일대 귀족들에게는 원한이 없다. 오로지 드미트리만을 원하기에, 당신들이 잠깐 고개를 돌려 준다면 전쟁이 끝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도록 하겠다. 선택하라. 만약에 결사의 항전을 택한다면, 이 제안을 거절한 영지는 반드시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적절한 당근과 채찍.

고민할 시간은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1시간 뒤.

세 영지는 귀족파의 제안을 승낙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 * *

그로부터 3일이 흘렀다.

윈스턴 남작의 병력은 밤을 이용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아델리안 백작의 영지를 지나쳤고, 롤로 남작의 영지에 돌입하면서부터 속도를 더욱 높였다.

이동하던 도중.

부관이 물었다.

“……지휘관님.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을 믿으십니까? 만약 그들이 일부러 함정을 파 놓은 것이라면, 우리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알고 있다.”

혹시 모를 변수.

예상 범위에 있었다.

서부 전선에서 닳고 닳은 지휘관이,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윈스턴 남작이 말했다.

“일단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빠르게 이동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적들이 함정을 팠다고 한들, 우리의 제안을 승낙한 순간부터 적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본대에서 연락한 바로는 드미트리의 정예가 모두 베네딕트 공성전에 합류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적들에게 남은 병력은 변방의 오합지졸들뿐인데, 그들이 귀족파의 정예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불가능합니다.”

“그래, 불가능하다. 귀족파의 병사들은 반란을 대비해 고된 훈련을 진행했다. 전쟁이라고는 책으로만 접한 변방의 떨거지들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의미고, 적들이 ‘상식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에 평야에서 우리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절호의 기회다. 원래라면 성벽을 두고 싸웠어야 할 상황이다. 병사의 수준이 아무리 차이가 난다고 한들, 성벽이라는 존재는 공격하는 편에 상당한 피해를 부과하지. 하지만 지금처럼 사방이 뚫려 있는 지형이라면? 순수하게 힘과 힘의 대결에서, 동북쪽 일대 전체가 달려들어도 우리가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

배신을 염두한 판단이었다.

그는 상대를 믿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이용할 뿐, 그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배반을 운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장이란 그렇다.

상대를 맹목적으로 믿는 낭만을 논하는 자들은, 채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잔인한 세계다.

“카이로 왕국에는 워프 게이트를 보유한 영지가 그리 많지 않다. 그중 베네딕트와 아델리안은 그 안에 포함되는 곳이고, 아델리안이 병력을 이끌고 나온다면 그들을 처리하고 워프 게이트를 차지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드미트리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겠지.”

“……역시.”

부관이 감탄했다.

확실히 서부 전선 출신은 달랐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지휘관은, 상대를 무너트릴 가장 적절한 방법을 택했다.

모든 선택은 계획적이었다.

귀족파는 자신감에 차올랐다.

이대로 진군해서, 단번에 드미트리를 함락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화륵.

화르르르륵.

어둠이 내려앉은 밤.

사방에서 불길이 일었다.

예상대로였다.

동북쪽 일대의 영주들은 배신을 택했다.

* * *

아델리안, 롤로, 콘라드.

세 영주는 애초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인물인가.

그간의 선례를 본다면, 그는 상벌(賞罰)이 정말 확실한 인물이다.

배신자는 어떤 핑계를 대든 멸문시킬 것이 분명했고, 끝까지 드미트리와의 인연을 지킨다면 먼저 배신할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선택은 뻔했다.

윈스턴 남작이 제안을 보내오자마자, 드미트리로 연락해서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물었다.

[길을 열어 주십시오. 적들을 유인해 단번에 소탕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지금.

드미트리 동맹이 나섰다.

사방을 둘러싼 수많은 병력에, 마치 낮이 된 것처럼 주변이 환해졌다.

화륵.

화르르륵.

“윈스턴 남작! 네가 드미트리를 공격할 생각으로 주변 귀족들을 회유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는 반역도다. 만약 네가 순순히 항복한다면 네 선택을 정상 참작해 줄 수 있겠지만, 끝까지 반항한다면 베네딕트 후작과 같은 반란의 죄를 물을 것이다.”

조나단 기사단장이었다.

그 뒤로 펄럭이는 드미트리의 깃발.

시야를 가득 메우는 적들의 모습에, 윈스턴 남작을 따르는 수뇌부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적들의 숫자.

너무 많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설마 동북쪽 전체가 나설 줄은 몰랐다.

“……지휘관님.”

시선이 집중되었다.

윈스턴 남작은 검을 뽑았다.

타협은 없었다.

적들이 수배 이상 많다고 할지라도, 귀족파의 정예가 충분히 압살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베네딕트 후작님은 반역도가 아니다. 그건 너희 드미트리가 퍼트린 모함에 불과하다. 오히려 내가 너희들에게 제안하마.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한다면, 베네딕트 후작님은 넓은 아량을 베풀어 너희들을 받아 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적의를 드러낸다면…….”

콰르르르릉.

오라를 일으켰다.

낙장불입(落張不入).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너희 모두를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것이다.”

위협적인 기세였다.

그런데.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윈스턴 남작이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경험한 지휘관이라고는 하나, 동북쪽 일대의 사람들은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를 경험했다.

이곳에는 그의 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미 극한의 공포를 경험해 보았던 사람들로서는, 윈스턴 남작의 위협으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조나단 기사단장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녹스 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탁.

한발 앞으로 나서는 사내.

그때만 해도, 윈스턴 남작은 조나단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채지 못했다.

* * *

귀족파의 걱정처럼.

변수는 현실이 되었다.

드미트리에는 마법사가 있었다.

그것도 5서클의 마법사가.

“파이어 캐논(Fire Cannon).”

화르르르르륵.

강력하게 일어나는 화염.

윈스턴 남작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살을 녹여 버릴 것 같은 열기가 그대로 귀족파를 덮쳤다.

콰콰쾅!

화륵, 화르르르륵!

“크악!”

“으아아아악!”

엄청난 열기였다.

수백의 병사가 단번에 휩쓸렸고,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은 병사들은 그대로 새카맣게 타 버렸다.

근처에 있는 병사들이라고 해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은 황급히 땅바닥을 굴렀고, 어떤 병사들은 피부가 타닥타닥 타오르는 것을 보며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한 번의 마법.

그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마법사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상황에, 윈스턴 남작은 다급하게 외쳤다.

“전군 공격하라!”

이미 선택은 내렸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승리밖에 없다.

마법사의 마법은 병사들을 공포에 빠트렸지만, 그래도 아직은 자신들이 더 강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퍽!

푸학!

눈앞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그대로 맞붙은 병력.

귀족파의 병사들이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단숨에 적들을 도륙했고, 일당백이라도 되듯이 두세 명의 적들을 거뜬히 상대했다.

윈스턴 남작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변방의 오합지졸들은 분명히 조잡한 실력을 보유해야 하는데,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서부 전선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강군(強軍)이었다.

그들은 몰랐다.

지난 1년.

로만 드미트리는 주변 사람들이 준비할 시간을 부여했다.

그건 크리스와 같은 직속 수하들뿐만 아니라, 드미트리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말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

그들은 외공(外功)을 배웠다.

로만의 사병들처럼 마나를 다루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육체를 단련해서 강해지는 방법은 터득할 수 있었다.

정말 치열한 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날아오를수록 병사들은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 결과.

1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드미트리 병사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귀족파의 병사 열 명 이상의 목숨은 내놓아야 했다.

카앙!

‘이런 미친.’

윈스턴 남작의 공격.

그걸 무명의 기사가 막았다.

그제야 현실이 보였다.

동북쪽 일대를 변방이라고 무시했건만, 그들은 귀족파보다도 더욱 날카로운 칼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귀족파의 작전.

로만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가 정예를 끌고 베네딕트를 공격한 이유는, 남은 병력만으로도 문제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윈스턴 남작은 발악했다

베네딕트 후작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끝까지 승리를 부르짖던 그는, 결국 조나단 기사단장의 검에 목이 날아갔다.

서걱.

그도 수라 심법을 익혔다.

이전보다 한 단계 발전한 조나단 기사단장은, 귀족파가 자랑하는 윈스턴 남작을 단번에 죽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드미트리가 베네딕트를 공격한 지 4일째 되던 날.

윈스턴 남작의 귀족파는 회생 불능의 패배를 당했다.

* * *

수성 일주일 째.

그날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날이었다.

아침에만 해도, 제국파의 회신에 귀족파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도 귀족파에 합류하겠습니다.]

계획대로였다.

제국파가 합류한다면, 그때부터는 상황을 충분히 뒤집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큰일 났습니다! 지금 성벽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빠르게 성벽 보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왕국군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어서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앞으로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베네딕트 후작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딱 일주일.

일주일이면 된다.

제국파를 불러들여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윈스턴 남작은? 윈스턴 남작은 어떻게 되었지?”

“그, 그게…….”

오웬 자작이 말끝을 흐렸다.

며칠 전.

윈스턴 남작과 연락이 끊겼다.

계획대로라면 진즉에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 돌아오지 않는 연락에 내부에서도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속이 타들어 갔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

그때, 더한 절망이 귀족파에 들이닥쳤다.

“윈스턴 남작의 부관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드미트리를 공격한 군대가 괴멸을 당했습니다! 윈스턴 남작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패잔병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

패전(敗戰).

그제야 알았다.

지옥보다 더한 밑바닥이 있다는 사실을.

암담한 현실에, 베네딕트 후작의 정신이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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