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615)

179화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5)

화면 속.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다니엘 카이로는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가 크로노스 제국과 손을 맞잡았다. 서부 전선은 이미 2차 저지선까지 무너진 상태고, 이대로라면 3차 저지선마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너라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겠지. 카이로의 영토에 크로노스 제국이 들이닥치는 순간, 내란과 더해져 카이로의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베네딕트의 귀족파를 소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크로노스 제국군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카이로 서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위험했다.

내란을 정리한다고 시간을 끄는 사이, 크로노스 제국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몰랐다.

[내란은 한 번에 정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환을 남깁니다. 베네딕트 후작도 그 사실을 알기에 크로노스 제국을 끌어들인 것이고, 지금 병력을 후퇴시킨다면 그의 의도대로 따라 주는 것입니다.]

“나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베네딕트 후작은 카이로 왕국을 버렸다. 그는 왕국의 안위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겠지만, 카이로의 국왕인 나도 그와 똑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들은 크로노스를 끌어들임으로써 최대한 전쟁을 장기전으로 유도할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서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공포가 카이로 전체를 잠식해 버리겠지.”

딜레마였다.

국왕과 귀족파.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왕국의 백성들을 버리는 판단을 내린다면, 그때부터 왕실은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베네딕트 후작은 내게 항복을 종용했다. 이번 숙청에 가담한 세력들을 버린다면, 내 목숨과 왕좌는 유지해 주겠다고 말이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알량한 권력을 유지해 보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카이로가 제국의 속국이 된다면 백성들의 희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백성들을 위해서는 지금 무엇이 중요한가? 서부에 있는 백성들의 목숨도 똑같은 무게를 지녔는데, 내란이 정리될 때까지 그들에게 희생을 감수하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내란을 정리하고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치는 것이 중요하겠는가.”

귀족파는 이미 한번 꺾였다.

이 정도로 만족하고 병력을 돌린다면,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백성들의 안위를 확보할 수 있다.

물론.

베네딕트 후작은 후환을 남길 것이다.

예전처럼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호시탐탐 나라를 팔아먹을 계획을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베네딕트 후작의 제안을 거절한 그때부터, 다니엘 카이로는 내란을 확실하게 정리해서 왕실의 권위를 바로잡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왕국의 미래를 위해 드미트리는 버리지 않았지만, 드미트리와 백성이라는 선택지 중에서는 백성들의 편을 들었다.

그것이.

다니엘 카이로였다.

허수아비일지라도, 제한된 선택지에서 최대한 왕국을 위한 길을 택하길 바랐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로만의 반응은 덤덤했다.

수긍한 것이 아니다.

이해했을 뿐,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뽑았다면 끝을 봐야만 하는 사내였다.

[국왕 폐하. 숙청을 결정한 그 순간부터, 저희는 크로노스 제국이 국경을 넘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상했습니다. 그게 그레고리 백작 때문이든, 베네딕트 후작 때문이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크로노스는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다. 병력을 집결시킬 필요도 없이, 서부 전선에 있는 병력만으로 공격을 감행하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만약 내부에 그들과 내통하는 적들을 남겨 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은 겨우 한발을 물러선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 그 한발을 나아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태평성대에 태어났다면.

다니엘 카이로는 좋은 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세(亂世)를 헤쳐 나가기엔, 그는 아직도 현실의 잔인함을 직시하지 못했다.

[서부 전선의 3차 저지선은 앞선 두 개의 저지선과는 다르게 상당한 병력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크로노스는 이번 공격에 전력을 동원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카이로의 지휘관들을 믿으십시오. 그들이 충분한 시간을 벌어 준다면…….]

낭만을 잃지 않은 왕.

로만 드미트리는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자신은 현실에 너무나도 찌들었기에, 국왕이라도 백성을 생각하길 바랐다.

[3일 안에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를 모두 정리하고, 서부 전선으로 가서 크로노스 제국을 막겠습니다.]

로만의 발언.

다니엘 카이로가 말을 잃었다.

자신은 두 개를 모두 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둘 다 해내겠다고 단언했다.

확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알겠다. 3일, 그 안에 반역도들을 반드시 처단하라.”

카이로 왕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귀족파의 마지막 발악.

예상했던 바다.

벼랑 끝에 몰린다면, 베네딕트 후작이 크로노스 제국을 끌어들이는 선택지는 계산에 있었다.

‘지난 일주일. 우리는 귀족파를 서서히 궁지에 몰아넣었다. 어중간하게 숨통을 끊었다간 내란이 길어질 수밖에 없기에. 적의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 내면서, 적들이 끝까지 발악하도록 판을 만들었다.’

공성전 첫날.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공격을 감행했다.

당장에라도 병력을 진군시킬 것 같았던 기세와는 다르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원거리 공격을 택했다.

왜일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밤에 병력을 움직였다.

베네딕트 성에서 도망칠 수 있는 퇴로를 최대한 차단하고, 성벽의 마법 방어가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를 기다렸다.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충분한 뜸을 들였다.

적들의 성벽이 제 기능을 상실하는 순간, 개미 새끼 한 마리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벽에 완벽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일주일.

완벽한 숙청을 위한 투자였다.

적들이 아직은 버틸 만하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하는 디데이였다.

내일.

예정대로 베네딕트 성을 향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의외의 인물이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지휘관님. 저를 선봉에 세워 주십시오.”

우렁찬 음성.

그는 바로,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 * *

귀족파를 배반하고.

파비우스 백작은 왕국군에 합류했다.

하지만 중요한 회의에는 자신이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상벌이 확실한 인물이다. 내가 그의 사람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면, 절대 그것을 외면할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지.’

일주일째.

로만 드미트리가 마침내 대대적인 공격을 예고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파비우스 백작은, 기회를 보다가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관님. 저를 선봉에 세워 주십시오.”

선봉.

위험한 역할이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일임을 알면서도, 파비우스 백작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았다.

배신자의 관계로 시작된 사이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관계를 단번에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화살받이의 역할이라도 자처하는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저는 귀족파의 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뜻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귀족파의 소집 명령을 거절했고, 이렇듯 로만 드미트리 님을 따르겠다는 선택을 내렸습니다. 제게 충성심을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봉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이름을 빛내겠습니다.”

절절한 목소리였다.

순간.

피식.

로만은 웃음을 보였다.

재밌는 녀석이었다.

박쥐처럼 이리저리 달라붙지만, 로만은 그가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사천왕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괴마(怪魔)가 이런 인물이었지.’

괴마.

독특한 노인이었다.

광마가 백중혁을 따르는 과도한 충성심을, 혈마가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을 대표했다면, 괴마는 백중혁이 정점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까지 주인을 무려 3번이나 바꾸었다.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목이 날아갔어야 정상인데,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최후의 승자인 백중혁의 곁에 남았다.

백중혁은 서로 득이 되는 관계를 바랐다.

괴마가 3번째 주인을 버리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는 기꺼이 변절자의 충성 맹세를 받아 주었다.

“내 앞에서 거짓 웃음을 보일 필요는 없다. 네 가치를 능력으로 증명하라. 네가 나의 사람으로서 쓸모가 있음을 증명해 낸다면,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든 나는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배신.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선택지다.

백중혁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능력으로 자신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괴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능력을 보고도 배반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겠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무조건 배신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결과.

괴마는 사천왕 중 한자리를 차지했다.

백중혁이 없는 전장을 진두지휘하며 수많은 승리를 이끌었고, 정파인들은 그의 이름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백중혁이 죽는 그 날까지.

괴마는 배신하지 않았다.

언제 한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천마를 배신하는 계산은 머릿속에서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파비우스 백작.’

귀족파의 변절자.

남들은 눈치를 보고 몸을 사릴 상황에, 대담하게 찾아와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콘라드 자작을 받아 주었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지난 과거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위험한 일이다. 그래도 할 수 있나?”

“할 수 있습니다! 이 파비우스, 목숨을 바쳐 헌신하겠습니다!”

표정이 환해졌다.

파비우스 백작이 머리를 박았다.

일개 귀족 가문의 후계자와 고위 귀족.

신분의 차이가 명확하건만, 그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알겠다. 이번 전쟁의 선봉에는 파비우스, 바로 네가 있을 것이다.”

파비우스.

그는, 기어코 기회의 끈을 움켜잡았다.

* * *

날이 밝았다.

귀족파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을 등에 업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오히려 전날보다 의기양양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한 인물이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로브를 푹 눌러쓴 사내.

이전과는 다른 전개에, 성벽 위의 병사들은 의문스럽다는 눈빛을 보였다.

탁.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가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주군의 믿음에 보답할 차례다.’

그는 펠릭스였다.

지난 일주일.

펠릭스는 단 한 번도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플레어에 힘을 불어넣는 마법사들을 진두지휘할 뿐, 자신의 힘은 최대한 아꼈다.

애초에 그가 힘을 발현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었다.

앞에서 마법사들이 마법 방어진의 내구도를 충분히 깎았을 때, 일주일 동안 만반의 준비를 모두 끝냈을 때, 펠릭스는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맡았다.

휘잉.

바람이 불었다.

펠릭스가 마나를 일으키자, 그의 주변으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서먼 샐러맨더(summon salamander).”

화륵, 화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그것들이 서로 휘감더니, 불의 형상을 한 괴물로 변했다.

정령 마법.

피닉스의 비기였다.

그리고.

“버닝(burning).”

화락.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서클의 개방.

펠릭스가 샐러맨더를 집어삼켰다.

몸 전체가 불길에 활활 타올랐고, 머리카락조차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펠릭스의 스승은 항상 불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못한 사람이 버닝을 사용한다면, 샐러맨더의 화기(火氣)에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게 무슨.”

“저걸 보십시오!”

성벽 위가 난리가 났다.

그들로서는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신자살도 아니고, 불에 타오르는 사람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그 순간.

“파이어 레인(Fire Rain).”

쿠르르르르릉.

서클의 경계를 허물었다.

5서클에 불과한 펠릭스가, 샐러맨더의 힘을 빌려 6서클의 영역에 들어섰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하늘에서 불꽃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불꽃이 흩날리는 정도였다면, 먹구름이 일더니 주먹만 한 불꽃이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앙!

콰르르르릉!

“악!”

“방패를 들어!”

학살의 시작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꽃에, 넋을 놓고 바라보던 병사들이 뜨거운 불길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비명이 사방으로 퍼졌다.

병사들은 황급히 몸을 숨겨 보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광범위한 범위에 떨어지는 불꽃은 도망칠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벽에 형성되어 있는 마법 방어가 모두 막아 주는 것도 아니었다.

플레어가 동시에 공격을 시작하자, 마법 방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위력을 넘어서 버렸다.

퍼퍼펑!

콰르르르르르르릉!

플레어와 6서클 마법.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피닉스.

사람들은 그곳을 화력에서만큼은 제일이라 불렀다.

하지만 불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너무나도 제한적인 조건이기에, 그들은 항상 버닝을 사용하는 마법사를 두 명 이상 배출하지 못했다.

그래서 13개의 마탑 중에서 최하위라고 평가받았던 피닉스.

그곳의 새로운 마탑주인 펠릭스가, 염화신공을 통해 버닝 발현에 성공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불지옥이었다.

단 한 명의 마법사와.

5개의 발사 장치에서 발사되는 플레어에 의해.

철옹성이라고 불리는 베네딕트 성벽이 불길에 휩싸이며, 새카맣게 변한 병사들이 하나둘씩 추락했다.

일주일.

로만은 때를 기다렸다.

펠릭스의 화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플레어를 동원해 충분히 마법 방어력을 깎아 둔 후에, 오늘 종지부를 찍었다.

결국.

콰르르르르릉.

“성벽이 무너졌다!”

마법 방어진이 힘을 잃었다.

마나석을 때려 부었지만, 축적된 대미지와 6서클 마법에 의해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구멍이 뻥 뚫렸다.

지금부터는.

베네딕트 성벽은 철옹성이 아니었다.

적들을 반기듯 활짝 열린 구멍에, 왕국군에서 누군가가 힘차게 뛰쳐나왔다.

“병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카이로스의 너구리.

파비우스 백작이었다.

그는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직접 최전방으로 나섰다.

“목숨을 걸고 극악무도한 반역도를 처단하라!”

“와아아아아아!”

그의 외침이 기폭제가 되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드는 병사들.

전장에 불이 붙었다.

그것은 로만이 약속한 3일 중, 겨우 하루 만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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