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서 (6)
푸슈슈슉!
하늘 높이 화살들이 날아올랐다.
일제히 떨어지는 화살 세례에, 파비우스 백작은 고삐를 바짝 움켜쥐며 방패를 머리 위로 들었다.
파바박!
“크악.”
“컥.”
화살을 맞은 병사들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들은 방패와 갑옷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지는 수백 발의 화살에서 완벽하게 안전할 수는 없었다.
연약한 살을 정확히 파고드는 화살.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뒤이어 들이닥치는 병사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성벽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 선봉에.
파비우스가 있었다.
군마(軍馬)를 탄 인물들과 앞만 보고 달렸고, 성벽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쾅쿵쾅.
적지 않은 나이.
다른 귀족들처럼 뒤에서 소리만 질러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겠지만, 그는 이번 선택에 목숨을 걸었다.
사람들은 박쥐 같은 습성을 지닌 파비우스를 카이로스의 너구리라고 부른다.
이리저리 옮겨붙는 선택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가 살아남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모든 선택에 최선을 다하라.
파비우스의 좌우명이었다.
베네딕트 후작을 배신하고 드미트리를 따랐다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드미트리를 위해 헌신했다.
남부 전선에서도 똑같았다.
남들이 모두 기피하는 선택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위험을 감수했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하늘에서 불꽃이 떨어져 내렸다.
파비우스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바로 옆에서 기사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져도,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져도. 그는 오로지 성벽이 무너진 틈만을 바라보았다.
그도 왕년에는 전장을 전전하며 수많은 고비를 넘겼다.
전장에서는 한번 결단을 내렸다면, 애매하게 망설이는 태도가 오히려 명을 재촉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콰직.
“죽어!”
그대로 성벽 안으로 뛰어들었다.
군마의 앞발이 병사의 머리를 부숴 버리자마자, 파비우스 백작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번개같이 검을 휘둘렀다.
피가 튀었다.
오라 검사처럼 대단한 무력을 보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개 병사들 따위는 충분히 쓰러트릴 힘은 갖추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병력도 같이 들이닥쳤다.
파비우스 백작과 기사들이 조금 일찍 도착했을 뿐, 순식간에 성벽 안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반역도들을 모조리 죽여라!”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파비우스 백작은 달려드는 적들을 미친 듯이 베어 버렸다.
적으로 득실거리는 공간은 아무리 베어도 적들이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몇 번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수도에서 평안한 시간을 살았기에.
그리고 나이가 적지 않기에, 파비우스 백작은 처음 기세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헤이스트(haste).’
화악-
아티팩트를 활용했다.
몸에 파란빛이 감돌자, 나이를 넘어서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위기를 넘겼다.
파비우스.
그냥 목숨을 버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화살에 맞았다면 갑옷에 새겨져 있는 실드가 발동되었을 것이고, 이 혼란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버프류의 아티팩트를 거액을 주고 구매했다.
선봉으로서 목숨을 걸었던 것은 맞다.
다만 최대한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인 뒤에, 일부러 극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퍼포먼스.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파비우스 백작은, 자신이 활약한 만큼 인정받기를 바라는 인물이었다.
서걱!
적의 목을 베었다.
벌써 10명째.
힘이 빠졌는지, 목뼈를 단번에 베어 내지 못해서 애를 먹었다.
“하악, 하악.”
숨을 헐떡였다.
그의 역할은 끝났다.
더는 앞으로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으로 변해 버린 이 땅에서, 파비우스 백작은 무리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자신 하나로 인해 대세가 바뀌지 않는다.
선봉으로서의 역할은 제대로 완수했으니, 적당히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진정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의 시간이다.’
파비우스는 보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새카맣게 밀려드는 적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 * *
선봉.
파비우스에게 온전히 맡길 문제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언제나 전장에서 선봉의 역할을 맡았고, 이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파비우스 뒤로.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안으로 들이닥치자마자 학살을 시작하는 모습에, 귀족파의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막아!”
“로만 드미트리다!”
“카이로의 악마가 나타났다!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
아비규환의 지옥 속.
악마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살의(殺意)를 드러냈다.
근처에 있는 모든 병사가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그렇지 않아도 적진이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밀려드는 파도에 그대로 휩쓸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로만 드미트리와 맞닥트리는 사람들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며 피와 죽음이 난무했다.
푸확!
“크아아아악.”
사람들과 뒤얽혔다.
멀리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귀족파의 병사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피가 하늘에 흩뿌려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피에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속도를 멈추지 않았고, 적들의 숫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앞으로 밀고 나갔다.
주변 모두.
적으로 득실거렸다.
앞에 있는 적을 베면 양옆에서, 양옆을 베어 버리면 뒤에서 적들이 달려들었다.
악마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어떻게든 죽이겠다는 열망을 드러냈지만, 그들의 목적은 끔찍한 고통으로 뒤덮였다.
몸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신체 하나가 사라져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압살(壓殺).
일방적이었다.
양 떼에 풀어놓은 늑대처럼, 로만 드미트리와 마주치는 적들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길이 열렸다.
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버티고 서 있던 사람들이 죽어 버리자, 그곳이 길이 되었다.
얼마나 나아갔을까.
적진에는 로만 드미트리만이 존재했다.
뒤따라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처럼 빠르게 적진을 헤쳐 나오지는 못했다.
그때였다.
“지금이다! 모두 공격하라!”
베네딕트 성의 경비대장.
그가, 벼락같은 음성을 내뱉었다.
* * *
일련의 상황.
카메론은 로만 드미트리의 압도적인 무력을 목격했다.
현실에 자연재해(自然災害)라도 들이닥친 것처럼, 인간의 연약한 힘으로는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이게 바로 카이로의 악마구나.’
소름이 돋았다.
헥토르 왕국이 남부 전선을 완전히 함락시키고도, 어째서 로만 드미트리 하나 때문에 패배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저런 괴물이 내부에서 뒤흔드는데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카메론으로서는 감히 로만을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가 성벽을 넘을 가능성을 계산에 넣어 두었다. 카이로 제일 검.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로만 드미트리는 분명히 무리할 테고, 그때가 그를 처리할 절호의 기회다.’
때를 기다렸다.
완벽한 기회를 위해.
로만 드미트리가 아군과 멀리 떨어지자, 카메론은 벼랑 같은 음성을 내뱉었다.
“지금이다! 모두 공격하라!”
“공격해!”
콰릉.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오라가 일었다.
단 한 명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귀족파는 가문에 남아 있는 오라 검사들을 모두 차출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 하나였다.
파비우스 백작이 성벽을 넘어 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상황에서도 자리를 지키던 그들이, 카메론의 명령 한 번에 일제히 달려들었다.
백 명의 검사.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오라를 폭발시키며,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그런데.
푸확.
가장 첫 번째.
먼저 달려들던 검사가 그대로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오라로 일렁이던 검은 단번에 빛을 잃어버렸고, 검사는 검과 함께 베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오라가 폭발하며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지만, 그들은 부딪치는 족족 피를 토하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한 번의 공격에.
오라 검사가 세 명씩 쓸려 나갔다.
1성의 오라나 3성의 오라나 공격을 막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고, 방금까지만 해도 승리를 확신하던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 갔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백에 달하는 인원수는 압도적인 승리를 보장해야 하건만, 시간이 갈수록 오라 검사들의 존재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일반 병사들이나.
오라 검사들이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뭘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고, 오라를 두른 검은 병사의 무기처럼 손쉽게 잘려 나갔다.
콰직.
얼굴에 주먹이 작렬했다.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검사.
로만 드미트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 전쟁.
단순히 승리만을 바라지 않았다.
반역도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드미트리가 적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다시는 똑같은 선례를 반복할 수 없도록.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했다. 백 명의 검사를 완전히 압도해 버리더니, 그들을 마치 일반 병사들인 것처럼 학살했다.
“……마, 말도 안 돼.”
카메론이 경악했다.
백 명의 검사.
그들을 차출하면서 귀족파는 웃음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제아무리 괴물 같다고 할지라도, 이 많은 인원은 감당하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카이로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존재였다.
퍽.
또다시 생명 하나가 죽었다.
카이로의 악마는 모르겠지만.
그 검사는 나름대로 백 명의 검사 중에서 최고의 실력자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뜬 시체를 바라보자, 카메론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끝났다.
성벽은 의미를 상실했다.
그리고 백병전(白兵戰)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제압하겠다는 것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단이었다.
‘이 사실을 지휘관님에게 알려야 한다.’
몸을 돌렸다.
아직 전장에는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카메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 * *
귀족파의 수뇌부.
그들은 안전한 곳에 있었다.
초조한 얼굴로 결과를 기다리던 그들은, 마침내 성벽으로부터 걸려 온 음성 통신을 받았다.
[크, 큰일 났습니다!]
카메론이었다.
공포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카메론은 암담한 현실을 말해 주었다.
[성벽이 완전히 뚫렸습니다. 마법 방어진은 제 기능을 상실했고, 안으로 들이닥친 왕국군에 의해 성벽이 점령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특히 로만 드미트리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각 가문에서 차출한 오라 검사들을 내보냈지만, 그들조차도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통신기 너머.
베네딕트 후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현기증이 일었다.
분명히 하루 전날만 하더라도 크로노스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으면서 핑크빛의 미래를 기대했건만, 철옹성이라 불리던 베네딕트 성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이곳에서 결사의 항전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걸 알기에, 귀족파의 수뇌부들은 애초에 성벽 근처도 가지 않았다.
[얼른 도망을…… 컥!]
단말마의 비명.
베네딕트 후작이 멈칫했다.
소름이 쫙 돋았다.
사람의 생명이 끊어지는 소리는, 누군가가 카메론을 죽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베네딕트 후작.]
익숙한 목소리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기어코 따라와 피로 물든 손으로 통신기를 붙잡았다.
[지난 일주일간. 너희는 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귀족파를 동원해 드미트리를 공격하려고 했고, 다른 귀족들을 반란에 끌어들이려 했으며, 결국 크로노스 제국이 내란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실수에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너희들이 저지른 일들은, 주워 담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싸늘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단언하지. 너희에게 갱생의 여지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발악하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청이 터지도록 너희의 죄를 울부짖어도. 나는 너희를 비롯해 그 가족들마저도 반역죄로 모조리 처단할 것이다.]
말과 말 사이에.
호흡을 내쉬는 시간이 마치 억겁(億劫)처럼 느껴졌다.
숨을 참았다.
통화기 너머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로만 드미트리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다.]
툭.
통신이 끊겼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방적인 통화가 남긴 메시지.
베네딕트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통신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