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615)

183화 현생의 인연들 (1)

베네딕트 성 함락 하루 전.

서부 전선의 지휘관 반덴버그 백작은, 카이로의 평화를 무너트리는 보고를 받았다.

“크로노스 제국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1차 저지선은 이미 무너진 상태고, 그들이 병력을 이끌고 곧바로 2차 저지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휘관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2차 저지선마저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수하의 보고였다.

지난 며칠.

카이로는 내란에 휩싸였다.

다니엘 카이로는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왕국군을 일으켰지만, 서부 전선의 병력은 단 한 명도 건드리지 않았다.

서부 너머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

크로노스 제국이 언제 국경을 침범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최소한의 안전망은 형성해 두었다.

1차 저지선.

임시로 형성한 방어 진지에 불과하다.

사실상 적의 침범을 알리는 척후(斥候)의 역할이었고, 2차부터는 전투를 위한 물자를 갖추어 놓았다.

반덴버그 백작이 말했다.

“지금 당장 병력을 소집하라! 카이로는 내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상태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크로노스 제국이 카이로의 영토를 밟는다면,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최선의 판단이었다.

3차는 최후의 보루기에, 일단 2차에서 한번 승부를 볼 필요가 있었다.

그때였다.

“아니요. 2차 저지선을 포기하고 병력을 후퇴시켜야 합니다.”

회의실 탁자 끝.

서부 전선의 참모(參謀)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반덴버그 백작은,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플로라. 그게 무슨 의미지?”

플로라 로렌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 * *

서부 전선의 홍일점(紅一點).

플로라는 서부의 유명인사였다.

로렌스를 떠나서 왕실 아카데미에 입학, 그리고 전술을 공부한 그녀는 돌연 서부 전선에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때 수도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워낙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고, 일반인도 아니고 귀족 가문의 여식이다 보니 이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플로라의 아버지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딸의 결정을 전해 들은 로렌스 자작은, 무려 일주일의 고민 끝에 딸을 믿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카이로 최초였다.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귀족 가문의 여식이 장교도 아니고 참모로 일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고, 처음에만 해도 그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본인에게 선택지가 있기에, 남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을 경험 삼아 놀러 오는 부류들.

편견이 팽배했다.

서부의 사람들은 플로라를 배척했으나, 그러한 인식이 바뀌기까지는 한 달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보여 준 모습들.

반덴버그 백작은, 기꺼이 플로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플로라. 그게 무슨 의미지?”

“크로노스 제국은 주기적으로 카이로의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그것은 경고성의 의미일 뿐, 진심으로 카이로를 함락시키겠다는 의도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다릅니다. 카이로 내부에서 내란이 벌어졌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베네딕트 후작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상황이 매우 공교롭습니다. 크로노스의 공격은, 카이로의 내란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크로노스가 베네딕트 후작과 내통했다는 의미인가?”

“누구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감옥에 수감 되어 있는 그레고리 백작 때문일 수도 있고, 베네딕트 후작이 크로노스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크로노스 제국이 왕국 연합과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침범했다는 것입니다. 고로, 그들의 목적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회의실이 혼란에 빠졌다.

플로라의 발언.

크로노스 제국이 내란에 가담했다는 의미였다.

단순하지 않은 상황에, 참모 중 하나가 물었다.

“플로라. 그렇다면 더더욱 2차 저지선에서 크로노스 제국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곳에는 수성을 위한 전쟁 물자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지금 병력을 후퇴시키는 판단을 내린다면, 전쟁 물자 일부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 맞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2차 저지선을 활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이 내란에 가담했다는 전제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저들의 목표는 3차 저지선을 넘어 카이로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에 있습니다. 게다가 왕국군은 현재 반역도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왕국의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면, 서부의 병력만으로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하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지휘관님. 저희는 항상 최고의 선택지를 택할 수 없습니다. 선택 한 번에 카이로의 명운이 걸려 있기에, 최악을 걸러 내고 최선을 택해야만 합니다.”

플로라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서부에 발령되고.

그녀는 전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사람들이 성별과 지위를 떠나 온전히 그녀를 받아들인 순간, 플로라 로렌스는 참모진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에.

플로라의 조언은 간과할 수 없었다.

반덴버그 백작이 침묵에 빠졌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플로라의 말이 옳다. 2차 저지선에 있는 병력에 후퇴를 명하라.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이곳 3차 저지선에서 크로노스 제국과의 결전을 준비할 것이다.”

* * *

상황은 예상대로였다.

크로노스 제국은 2차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곳을 넘어서 진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로 왕실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베네딕트 후작이 크로노스 제국과 결탁했다. 그들은 3차 저지선을 무너트리고 카이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할 생각이고, 왕국군으로서는 반란을 정리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 딱 3일만 버텨다오. 그 시간을 버텨 낸다면, 빠르게 반란을 정리하고 서부 전선에 지원군을 보내겠다.]

왕실의 메시지.

회의가 소집되었다.

서부 전선의 수뇌부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황에서, 참모진의 수장인 노엘 남작이 말했다.

“국왕 폐하는 우리에게 3일의 시간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3일 안에 반란을 모두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베네딕트 후작은 오래전부터 반란을 준비하던 인물이고, 정보에 따르면 베네딕트 성은 수성을 위한 완벽한 준비를 끝냈습니다. 왕국군을 이끄는 지휘관이 헥토르 왕국을 물리친 로만 드미트리라고는 하나, 우리는 장기전을 대비해야만 합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반란을 정리한다고 한들 이동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워프 게이트를 사용해도 하루 이틀은 걸릴 텐데, 그렇다면 남은 하루 만에 베네딕트를 정리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다들 부정적이었다.

서부와 베네딕트.

워프 게이트를 보유하고 있기에 머나먼 거리를 도보로 이동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이점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3일이라는 시간은 그리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반덴버그 백작이 말했다.

“너희의 말이 옳다. 크로노스 제국이 진심으로 카이로의 영토를 침범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최대한 전쟁 물자를 확보하고 수비적으로 나가야만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왕국군이 반역도들을 정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만의 힘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름다운 미성.

이번에도 플로라였다.

노엘 남작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각이 다르다니? 너는 왕국군이 반역도를 3일 만에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 또한 3일은 촉박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왕 폐하는 3일이라는 기한을 로만 드미트리가 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길어도 5일은 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3일 안에 베네딕트 후작의 병력을 정리하고, 이동 시간을 고려해서 5일 안에는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어떻게 그것을 장담하지?”

“다들 로렌스와 드미트리의 관계를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인물입니다. 누가 봐도 패배가 확실한 로렌스를 데리고 바르코를 쓰러트렸을 때부터, 저는 그가 일반적인 상식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인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존재가 3일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모진.

그들은 무능력하지 않다.

그동안 이곳을 지켰던 만큼 각자의 강점을 갖추었지만, 플로라는 그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직접 경험해 보았다.

비상식적인 계산이라 할지라도, 플로라는 로만 드미트리를 믿었다.

하지만 노엘 남작은 달랐다.

“근거가 없는 판단이다. 한발 물러서서 네 말이 정말 현실이 된다면. 네 생각에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시간이 촉박한 것은 크로노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네딕트 후작이 무너지기 전에 카이로의 영토를 침범하려 할 테고, 그렇다면 시작부터 전력을 다할 것이 분명합니다. 3차 저지선으로는 수비적으로 나간다고 한들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낸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크로노스의 의도를 눈치채고 병력을 후퇴시켰던 그녀라면, 이번 선택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공격이야말로 최고의 수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들을 들이받아, 5일 동안 우리를 쓰러트리지 못하도록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격.

플로라의 발언에, 수뇌부들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 * *

역발상(逆發想)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었다.

그리고.

플로라로서는 수뇌부들이 왜 당황하는지를 알기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근거를 제시했다.

탁.

촤르르륵.

자료를 펼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침착한 목소리로 자료의 의미를 설명했다.

“우리는 그간 크로노스가 공격하는 패턴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경고성의 의미로 침략할 때는 일반적인 백병전을 유도했지만, 이번과 같은 확실한 승리가 필요할 때는 워 메이지(War mage)를 동원했습니다. 이곳에 나온 자료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마법을 활용해 성벽을 무너트리고, 병력을 밀어 넣어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크로노스의 일반적인 패턴이죠.”

“그건 우리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마나석을 포함한 전쟁 물자를 더 확보하려는 것이지 않은가.”

“예. 마법 방어진을 활용한다면 장기전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이 마법사를 동원하려는 것도, 우리가 마법 방어진을 활용하려는 것도, 서로가 예상하는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법사의 위력을 증폭시킬 무언가를 시도할 확률이 높습니다. 제국 내에 7개의 마탑을 보유한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우리는 이 마법사들을 처리해서 변수를 없애야 합니다.”

촤륵.

페이지를 넘겼다.

“이것을 보십시오. 적의 공격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면서, 적의 화살 공격에는 안전한 거리에서 마법을 사용합니다. 마법 캐스팅(casting)을 진행할 때는 취약하기 때문인데, 보통 이 거리가 1km 내외입니다. 화살의 거리가 닿지 않을뿐더러, 원거리 공격을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정확도가 매우 떨어지는 거리. 그들이 마법사를 동원한다면 이 거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1km 내외라. 그걸 이용할 방법이 있다는 의미인가?”

“예. 마법사들이 캐스팅할 위치를 예상해서, 그 땅에 마법 트랩을 심으면 됩니다.”

노엘 남작이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플로라의 말은 일리가 있으나, 너무 허황되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1km의 거리를 특정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성벽과의 거리를 말할 뿐 어느 위치에서 마법을 사용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마법 트랩 또한 그만한 수량을 확보할 수 없는 데다가, 마법사는 마나로 트랩의 위치를 감지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면, 마법 트랩을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다른 안전한 위치에서 마법을 사용하려 하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는 전략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플로라의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그녀가 사람들을 훑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직후.

그녀의 머릿속은 항상 피 튀기는 전장에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대전사 전투를 제안해야 합니다.”

“대전사 전투?”

“예. 국가 간의 전쟁에서 대전사 전투는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용도로 활용됩니다.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국의 검사가, 분명히 승리한다고 확신할 테니까요.”

“그들이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인다고 한들…… 설마?!”

노엘 남작이 눈을 부릅떴다.

플로라의 전략.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플로라가 말했다.

“우리가 미리 자리를 잡고 대전사 전투를 제안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위치에 따라 병력을 이동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병력을 뒤로 두고 앞으로 나가서 마법을 사용할 테니, 오차 범위를 대폭 줄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마나를 느끼는 것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것은 대전사 전투에 나설 검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검사가 최대한 오라를 극한으로 발현해서 전투를 벌인다면, 주변 마나의 농도가 짙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예민한 마법사라고 할지라도 그 농도를 뚫고 마법 트랩을 감지할 수는 없습니다. 앞선 전투 때문에 안일한 마음으로 마법 트랩을 밟는 순간, 우리는 적들의 무기인 마법사를 없애 버릴 수 있습니다.”

일련의 계획.

감탄이 나왔다.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노엘 남작이, 계획을 끝맺을 때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논쟁은 최선의 결과를 위한 과정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목소리를 높였을 뿐, 노엘 남작은 수긍하고도 부정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번 계획.

매력적이었다.

마법사들을 처리한다면, 크로노스 제국이 전력을 다할지라도 버티는 것이 가능하다.

플로라가 덧붙여 말했다.

“문제는 누가 대전사로 나서느냐입니다. 아군의 대전사는 적과의 승부를 오래 끌 수 있도록 실력을 갖추면서도, 이번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살아남을 확률은 희박합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어떤 검사를 내보낼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존재는 아닐 테니까요.”

딜레마였다.

작전을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희생할 존재가 필요했다.

그때였다.

회의에 참석한 인물 중 한 명.

플로라의 계획을 조용히 듣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제가 대전사 전투에 나가겠습니다.”

순간.

사람들이 놀랐다.

사내의 정체.

그는 바로, 로드웰 드미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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