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615)

185화 현생의 인연들 (3)

어린 시절.

로드웰 드미트리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히 귀족으로 태어났건만, 하나뿐인 형은 자꾸만 드미트리 가문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저 녀석이랑 로드웰이 어떻게 같은 형제지?”

“혹시 배다른 형제가 아닐까?”

“확실한 건 로드웰도 참 불쌍하다. 천박한 로만 드미트리를 평생 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잖아. 만약 내가 로드웰의 입장이었다면, 아버지에게 요구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가문에서 내쫓아 버렸을 거야.”

그날.

로만 드미트리는 빈민가를 찾았다.

평민이던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밤늦게 놀던 그는 더러운 몰골에 냄새를 풀풀 풍기며 성으로 돌아왔다.

로드웰과 어울리던 귀족 가문 자제들로서는 흉을 볼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게 속삭였지만, 그들이 내뱉는 말이 로드웰의 가슴에 푹푹 박혔다.

그때는.

로드웰 드미트리도 성숙하지 못했다.

자신은 분명히 평생 귀족으로서 살았건만, 가문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로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저렇게 사는 거지? 한때는 평민이었다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지만, 지금 우리는 귀족이잖아. 그에 어울리는 삶과 품격을 갖추려고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로만은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행동들만 골라서 하고 있어. 그런 사람을, 나는 형으로서 인정하지 못해.’

화가 났다.

자신이 어떠한 성과를 이루어도.

평민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모두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는 소문이었고, 로드웰 드미트리는 그 괴리감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후계자 자리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가문을 물려받으면 드미트리는 망할 것이라는 소문에, 그에게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악착같이 노력했다.

밤이 새도록 검을 휘둘렀고, 드미트리의 후계자로서 마음에도 없는 대장간을 매일같이 방문했다.

강철을 두드릴 때면.

속에서 분노가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

이해는 했다.

한때는 평민이었으니, 평민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 동생들의 입장은 어떨까?

태생부터 귀족이었던 동생들은, 로만 드미트리 한 명 때문에 강제로 평민 시절의 기억으로 끌려 들어갔다.

경험해 보지도 못한 세계.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

로드웰은 그게 무슨 기분인지를 알기에, 적어도 동생만큼은 그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고로.

자랑스러운 형이 되어야만 했다.

악착같이 노력해서 오라 검사가 되었고, 왕실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삶.

모든 것이 완벽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호메로스를 쓰러트렸다는 소문이 들리기 전까지는.

끼이이익.

쿠웅.

성문이 열었다.

로드웰 드미트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검상이 깊게 남긴 눈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렀고, 전신은 어디 하나 안 다친 부위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살아서 걸어 다니는 것이 신기할 정도.

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조차도 먹먹하게 들리는 상황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자꾸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억눌렀다.

아직도.

형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직접 보지 않는 한, 어릴 때부터 켜켜이 쌓인 감정을 떨쳐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다.

반덴버그 백작과 수뇌부들.

그리고 플로라.

로드웰 드미트리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플로라 앞까지 걸어갔다.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성공하는 겁니까?”

담담한 물음.

눈 하나를 잃은 것은 개의치 않았다.

어제와 똑같은 눈빛을 보이는 그 모습에, 플로라는 로드웰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조건요.”

확신에 찬 음성.

지금부터는.

적들을 함정으로 끌어들일 차례였다.

* * *

대전사 전투의 패배.

크로노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스퍼드를 내보낸 순간부터, 그들에게 대전사 전투는 한순간의 유흥거리에 불과했다.

승리는 당연한 결과고.

만약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이 전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의구심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가 일었다.

크로노스의 지휘관인 파비오 백작의 명령에, 일련의 병력이 앞으로 나섰다.

“플레어를 준비하라.”

“지금부터 플레어와 마법사들의 공격으로 적들의 성벽을 무너트릴 것이다.”

예상대로였다.

워 메이지.

그들이 나섰다.

성벽 위에서, 플로라는 초조한 얼굴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법사들이 마법 트랩으로부터 300m 이상 벗어난다면 일격에 그들을 죽일 수 없다. 폭발 범위에서 멀어질수록 위력이 약해질뿐더러, 폭발하고 나서 그 찰나의 시간에 본인들을 보호할 실드를 형성할 것이 분명해. 계획대로 오차 범위는 100m 안팎. 그 안에 마법사들이 캐스팅을 발현하는 무방비 상태를 보인다면, 마법 트랩으로 일격에 그들의 존재를 모두 쓸어 버릴 수 있다.’

저벅저벅.

마법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의 위치.

애매했다.

대전사 전투로 상대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가능했으나, 그렇다고 정확히 마법 트랩 위에 서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법 트랩으로부터 약 150m 정도 떨어진 위치.

완벽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플로라의 계획이 빗나가지는 않았다.

반덴버그 백작이 물었다.

“플로라. 언제 마법 트랩을 폭발시킬 생각이지?”

“섣부른 폭발은 적들이 대비할 시간을 내줄 수 있습니다. 마법 캐스팅은 마법이 발현하는 절정의 타이밍에 가장 취약합니다. 그때를 노려서 폭발을 일으킨다면, 마나의 역류(逆流)로 마법사들은 최소 전투 불능의 상태에 빠질 겁니다.”

“알겠다. 네가 신호를 주도록.”

“예.”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일단.

카이로의 병사들을 움직였다.

그들에게 원거리 공격을 지시함으로써, 카이로 왕국이 일반적으로 대응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푸슈슈슉.

하늘을 수놓는 화살.

그것들은 마법사에게 닿지 않았다.

대부분 근처도 못 가고 떨어졌고, 근처에 도달한 화살은 힘을 잃었다.

그때였다.

마법사들의 주변에서 마나의 기운이 일었다.

그들의 마법이 절정에 달할 때까지, 마법사들은 짙은 마나의 농도에 트랩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화악.

밝게 빛나는 마나.

그 순간.

플로라가 소리쳤다.

“지금이야!”

“폭발시켜.”

트랩의 발동.

마법이 발현되기 직전, 마법사들 근처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콰콰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그건 반응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플로라는 특정한 위치에 마법 트랩을 겹겹이 설치했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폭발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쓸어 버렸다.

엄청난 충격에 마법사들의 마법이 취소되었다.

그들은 마나의 역류에 피를 토해 냈고, 이윽고 자신들을 덮치는 폭발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의 계획.

성공이었다.

대전사 전투에서부터 시작한 계획이, 결국 크로노스의 강력한 무기를 제거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같잖은 녀석들. 아주 발악하는구나. 크로노스의 병사들은 들어라. 카이로 왕국은 지금 내란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감히 제국을 상대로 버틸 수 있다고 착각하는 존재들에게, 크로노스 제국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어라!”

“와아아아아아!”

“공격하라!”

명령이 떨어졌다.

마법사라는 무기만 제거했을 뿐.

새카맣게 몰려드는 적들의 모습에, 서부 전선에 암운(暗雲)이 밀려들었다.

* * *

정말 피가 말리는 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에 들이닥친 제국군은, 십수 개의 사다리를 걸치더니 빠르게 성벽 위로 올랐다.

“막아!”

“사다리를 밀어라!”

카이로의 병사들이 발악했다.

개미처럼 줄지어 올라오는 사다리를 밀어 버렸고, 어떤 병사들은 뜨거운 물과 화살을 활용해 적들을 공격했다.

수성(守城)의 이점은 확실했다.

제국군이 뭘 해 보기도 전에 상당수의 적을 줄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병사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꾸역꾸역 사다리를 올랐고,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둘씩 성벽에 발을 들이는 존재들이 생겨났다.

퍽!

화살 하나가 적을 관통했다.

플로라였다.

전장에 적합한 복장을 갖춘 그녀는, 화살을 조준하더니 성벽으로 올라서는 적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집중력을 잃지 마라! 적들은 마법사를 잃었다!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이다!”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피와 죽음.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것이 적군의 비명인지 아군의 비명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플로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수도에 올라온 직후.

플로라는 2명의 스승을 받아들였다.

한 명은 왕실 아카데미에서 전술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인근에서 명사수(名射手)라고 불리는 평민이었다.

그녀는 로렌스에서 전쟁을 경험해 보았다.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던 계획은 플레어 하나에 처참히 무너졌고, 지금 와서 돌아본다면 참으로 안일한 판단이었다.

대체 왜.

플레어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상대가 아무리 재정적으로 무리했다고 할지라도, 플레어의 존재는 무조건 생각해야만 했다.

그래서 전술을 공부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함이었고, 궁술을 배운 이유는 전쟁은 결국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럴듯한 전술을 계획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움직여 적을 죽일 힘이 필요하다.

플로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지휘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과 같이 힘을 합쳐서 적을 쓰러트리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예뻤던 손이 엉망으로 변했다.

손가락이 찢어지고 굳은살이 생겨서 흉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노력의 결실이기에.

그녀의 손을 떠나간 화살은, 백발백중으로 적의 머리를 관통했다.

퍽!

“절대 밀리지 마라! 서부 전선이 무너지는 순간, 카이로에 있는 우리의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전투는 치열했다.

당장에라도 성을 함락시킬 것 같았던 크로노스 제국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도 전략적인 성공이었다.

반덴버그 백작은 2차 저지선을 포기하고 이곳에 병력을 집중시켰고, 서부의 병력을 집결시킨 덕분에 제국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었다.

결국.

크로노스 제국은 물러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첫 공격을 막아 냈을 뿐,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다음 날.

크로노스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성벽으로 병력을 밀어 넣은 그들은, 거의 함락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한번 퇴각을 명령했다.

벼랑 끝.

마지막 숨 고르기였다.

애초의 계획은 5일을 버텨야 했다.

그런데 마법사를 처리하고도, 서부 전선은 3일 만에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크로노스 제국의 세 번째 공격은 시도되지 않았다.

이유는 명백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왕국군이, 서부 전선에 도착했다.

* * *

단 3일.

기적은 현실이 되었다.

반란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촉박하다고 생각한 시간에, 로만 드미트리가 서부 전선에 나타났다.

수뇌부들이 모였다.

반덴버그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를 보며 감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겨우 하루 만에 베네딕트 후작의 반란군을 정리하다니. 덕분에 저희도 한숨을 돌렸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서부 전선의 명운은 장담하지 못했을 겁니다.”

모두가 동의했다.

서부 전선은 최선을 다했다.

분명히 완벽하게 이상적인 상황으로 이끌어갔으나, 문제는 크로노스의 전력이 너무도 강했다.

회의실.

로만에게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플로라 로렌스는 초췌한 몰골에 머리를 위로 묶었고, 로드웰 드미트리는 붕대로 눈 부근을 돌돌 감았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마주한 순간부터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시선을 외면했다.

반덴버그 백작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지금부터 병력을 집결해 주십시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크로노스 제국은 아마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부에서 내통하던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도 무너졌고, 공성에도 실패했으니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상대로라면 하루 이틀 안으로, 적들은 이곳을 정리하고 물러날 확률이 높습니다.”

전쟁은 끝났다.

카이로의 승리였다.

아니,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물러날 뿐이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의 생각은 달랐다.

“적들은 카이로의 영토를 침범했습니다. 이제까지는 크로노스가 원하는 대로 유린하고 떠나는 일이 익숙했다면, 지금부터 카이로 왕국은 적들의 행보에 강경한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국왕 폐하는 저에게 이번 일의 전권을 일임했습니다. 그러니 병력을 소집하고, 성문을 열 준비를 하십시오.”

반덴버그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로만의 말.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다.

“우리는 제국으로 돌아가는 적들을 쫓아가 그들을 격퇴(擊退)할 것입니다.”

예상과는 다른 발언.

회의실에 참석한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