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615)

186화 반격 (1)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전쟁이 마무리되는 상황에서, 성문을 열어 적을 공격하는 선택지는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

노엘 남작이 말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서 적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양쪽의 전력 차이는 명백합니다. 성문을 나서는 순간 카이로는 회생 불가의 타격을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크로노스 제국을 추살(追殺)한다고 한들, 카이로에게 대체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내란으로 인해 왕국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상황인데, 지금은 내실을 다질 때라고 생각합니다.”

서부의 수뇌부들.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능력을 인정했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긴 3일 만에 서부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왜 카이로의 영웅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현실적인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인물이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지만, 그런데도 이번 계획은 동의할 수 없었다.

플로라 로렌스.

말을 아끼려던 그녀조차도, 노엘 남작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지난 며칠간 서부 전선의 병사들은 고된 일정을 감당했습니다. 밤새 적을 경계하느라 피로도가 상당히 쌓였을 텐데, 지금 성문을 여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로만을 보았다.

자신의 인생에 큰 파란을 일으킨 사내.

그는 절대 허언을 내뱉을 존재가 아니기에, 이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확실히 강조했다.

“서부 전선은 전략적 요충지(要衝地)입니다. 이곳에서의 우선순위는 크로노스 제국군을 최대한 많이 사살하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의 안위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당신의 제안은 우선순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크로노스 제국과 내통한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가 모두 정리되었다면,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더는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습니다. 알아서 사라질 위험일 텐데, 우리가 괜히 벌집을 건드려서 싸움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타당한 주장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전쟁으로 인한 여파를 정리하는 것에 집중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최선입니까?”

로만 드미트리는.

일반적인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 *

서부의 수뇌부들.

그들의 말.

그들의 반응.

국왕과 똑같았다.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는 길에, 다니엘 카이로와의 마법 통신에서 국왕은 걱정하는 반응을 보였다.

[……서부 전선에 도착하는 대로 크로노스 제국을 공격하겠다고?]

“예.”

[무모한 판단이다. 크로노스 제국이 우리를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도 똑같이 그들을 공격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수성으로 적들을 물리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호시탐탐 카이로의 영토를 노리는 크로노스 제국을 먼저 공격했다간, 그들은 이번 사건을 빌미로 분명히 국가 간의 분쟁을 유도할 것이다. 그때는 진실이 통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건 간에,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 카이로 왕국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다.]

약자의 현실이었다.

같은 행동일지라도.

힘의 논리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크로노스 제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항상 카이로의 국경을 침범했고, 카이로는 단 한 번도 그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동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백성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카이로의 생존 전략이었다.

이해는 했다.

약소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건만, 지금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국왕 폐하. 카이로 왕국은 내란으로 인해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왕국군은 대의를 가지고 반역도를 처단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살육은 일반 백성들의 눈에는 잔인하게 비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권력의 통일을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숙제들이 많습니다. 귀족파의 잔재들을 완전히 정리하고 나면, 제국 끄나풀들의 처분을 결정해야겠지요. 그때, 국왕 폐하는 백성들에게 어떤 명분을 내세우실 것입니까? 국경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공격한 크로노스 제국은 방관하면서, 그들의 끄나풀들을 처리하는 일에는 검을 뽑으실 수 있겠습니까? 명분을 잃은 살육은,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없습니다.”

애매한 문제였다.

크로노스 제국.

그들은 대놓고 반란에 가담했다.

베네딕트 후작을 위해 국경을 침범했지만, 카이로 왕국은 그들을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국의 끄나풀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는 반란을 선언했기에 정리할 명분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한 제국은 건드리지 못하면서 끄나풀들을 정리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일까.

내란이 장기화가 된다면 백성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제국에게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왕실이, 왕국 내에서는 학살을 주도한다고 말이다.

“카이로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귀족파를 정리하면서 권력의 체계를 통일화시켰고, 앞으로는 남부 전선에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을 기회입니다. 크로노스 제국을 공격하십시오. 내란에 가담하고 국경을 침범한 그들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 주고, 카이로가 철퇴를 행할 수 있는 존재임을 세상에 밝히십시오. 우리의 선택이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된다고 한들, 이번만큼 강력한명분을 확보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반란을 정리한 직후.

변화를 시도할 기회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계적인 변화가 아니라, 한 번의 큰 변화로 왕국의 기질을 바꿔야 함을 알았다.

나약한 약소국에서.

강인한 하나의 국가로.

크로노스 제국의 만행에, 이전과는 다르게 참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카이로 왕국은 언제까지고 제국에 휘둘릴 수 없습니다. 딱 한 번입니다. 카이로가 달라졌다는 한 번의 선례를 보여 준다면, 그때부터 크로노스 제국은 국경을 넘는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선택이 전쟁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들이닥칠 전쟁이라면, 차라리 크로노스 제국이 왕국 연합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화면 너머.

국왕이 침묵에 빠졌다.

로만 드미트리는 어려운 신하였다.

끊임없이 자신을 선택의 기로에 서게 했고,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들을 떠안겼다.

온전한 하나의 나라.

다니엘 카이로의 이상향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취해 버린 걸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카이로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

[네 말이 옳다. 카이로가 앞으로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왕실의 결단이 타당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다. 크로노스 제국은 국경을 침범했다. 대놓고 내란에 가담했다는 정황을 보여 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백성들은 이번 내란이 단순히 카이로 왕실의 권력을 위한 의미 없는 학살이라고 생각하겠지. 로만 드미트리. 이번 일의 전권을 일임하겠다. 서부로 가서,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국경을 침범한 대가를 치러라.]

유약한 왕.

그가 의지를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바라보며, 군신의 예를 다했다.

“명을 받듭니다.”

* * *

그리고 현재.

서부의 수뇌부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최선이냐는 물음에, 그들은 복잡한 눈빛을 보였다.

로만이 말했다.

“서부 전선에서 지내 온 여러분들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을 추살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는 말, 성문을 열고 나간다면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말, 서부의 병사들이 피로도가 상당하다는 말.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왕국 연합과의 분쟁으로 크로노스 제국의 시선은 남부로 향해 있고, 적들은 이곳에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지난 며칠간의 공성전으로 상당한 병사를 잃었기에, 우리가 마주한 크로노스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합니다.”

애써 외면한 진실.

그것을 들추었다.

성문을 열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눈앞의 진실을 보여 주었다.

“이번 결정의 실익(實益)은 단 하나의 사실이면 충분합니다. 카이로 왕국이, 더는 크로노스 제국의 만행을 지켜보지 않는다는 것. 대놓고 베네딕트 후작과 내통해서 내란을 주도하던 그들에게 피의 복수를 행한다면, 카이로의 백성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카이로 왕실이 자신들을 지켜 준다는 믿음.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라도 적들을 공격해야만 합니다.”

로만의 말.

사람들이 동요했다.

그제야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들과 사고 회로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눈앞의 평화에 일단 안정을 찾길 바랐다면, 카이로의 영웅은 새로운 왕국의 미래를 생각했다.

성문을 여는 용기.

보통의 선택이 아니다.

카이로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은 일이기에, 그 누구도 섣불리 지지하는 발언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눈빛만큼은 열망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내뱉은 말들이,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라다운 나라.

그동안 얼마나 바랐던 모습인가.

지금까지는 여러 갈래로 찢겨 나간 권력 체계에 하나로 뭉칠 수 없었다면, 앞으로는 상황이 달랐다.

로만의 말처럼.

기회였다.

수뇌부들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반덴버그 백작의 명령을 기다렸다.

반덴버그 백작이 웃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폭풍을 몰고 다니는 사내였고, 그로 인해 카이로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 * *

회의가 끝났다.

로만의 뜻대로였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추격대를 보낸다는 말에, 플로라는 밖으로 나와서 어둠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로만 드미트리.’

참.

한결같은 사내였다.

바르코와의 전쟁에서도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택하더니, 이번에도 그때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전술 책이 닳을 정도로 공부했으면서도.

플로라는 로만 드미트리처럼 반격을 시도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이성적인 설렘은 아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전술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진심으로 인정했다.

‘나는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어. 이제는 철없던 그때와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구나.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로만 드미트리의 소문을 들을 때면, 나는 그가 내린 선택과 실행력에 매번 감탄하게 돼.’

그녀는.

로만 드미트리를 존경했다.

그와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겠지만, 지금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며 플로라 로렌스라는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는 로렌스의 꽃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플로라 로렌스 자체로 기억해 주는 상황에, 그녀는 현실에 더없이 만족했다.

과거의 실수.

아직도 그때의 철없음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현재의 자신이 있기에, 자신이 했던 일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조금은 서운함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변화를 알아주었으면 했다.

‘내일 우리는 처음으로 크로노스 제국을 평야에서 맞닥트리게 될 거야. 아무리 적들의 전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크로노스 제국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야. 우리의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을 수도 있고, 최악의 상황에는 역으로 격퇴를 당해 3차 저지선이 함락당할지도 몰라. 오늘은 일단 전장에서 벌어질 변수들을 계산해 보자. 로만 드미트리의 말을 따른다고 해서, 그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해서는 안 돼.’

오늘 밤.

할 일이 많았다.

플로라 로렌스는 전쟁에 직접 가담할 생각이었고, 그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한 번의 실수.

예전에는 기분에 따라 선택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플로라는 완벽주의자라고 불릴 만큼 철저했다.

그때였다.

“……어?”

저 멀리.

밤하늘 아래 대화를 나누는 두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로만 드미트리였고.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로드웰 드미트리였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