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615)

189화 반격 (4)

퍽!

화살이 제국군의 미간을 관통했다.

플로라 로렌스는 빠르게 화살을 시위에 걸면서, 눈으로는 분주하게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우리가 밀리고 있어.’

예상대로였다.

반덴버그 백작의 병력에 합류한 그녀는, 기습적인 공격으로도 백병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예상했다.

머리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애초에 질적으로부터 차이가 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실에서 거론이 되었다.

결론은.

승부수를 걸었다.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카이로의 병사들은 작전에 가담했다.

“지휘관님!”

플로라가 소리쳤다.

그녀는 밤새 전장에서 벌어질 변수들을 계산했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계획을 제시했다.

그 의견에 다른 수뇌부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들은 작전의 목적과는 어긋나는 방법이라고 말했지만, 플로라는 자신의 계획이야말로 로만 드미트리라는 무기를 완벽하게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플로라의 외침에.

반덴버그 백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실드 월(shield wall)을 구성하라!”

“실드 월을 구성하라!”

명령이 빠르게 번졌다.

그러자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카이로의 병사들이 한군데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 방패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고, 사각 방패를 서로 맞물리며 방패의 벽을 형성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준비할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들은 전장에서 행할 작전을 미리 연습해 두었다.

척척.

빠르게 올라가는 방패의 벽.

크로노스 제국군이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보였다.

실드 월은 전장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략이나, 기습적인 공격에 그리 적합한 대형은 아니었다.

플로라의 작전에.

노엘 남작은 이렇게 말했었다.

“플로라. 이번 작전은 속전속결이 중요하다. 실드 월은 전력의 차이를 메우는 방법이지만, 수비적인 대형으로 시간을 끌다가 중간을 공격하는 병력이 위험해질 수 있다. 우리 또한 희생을 감수하고 공격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기습 공격의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겠지.”

타당한 의견이었다.

플로라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둘의 의견은 하나의 사실이 갈라놓았다.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믿음.

플로라 로렌스는 양쪽의 공격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차이를 만들어 내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렇다면 카이로 왕국군으로서는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차피 왕국군만으로는 후방의 제국군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

플로라의 강력한 주장은 채택되었고, 기습적인 공격으로 승부를 보다가 밀릴 때는 실드 월을 형성하자는 쪽으로 갈피를 잡았다.

“방패를 몸에 붙여!”

“틈을 허락하지 마라!”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공격하는 제국군과 수비하는 왕국군.

크로노스 제국군은 기세를 잡았다는 생각에 득달같이 밀어붙였고, 카이로의 병사들은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다고 수비에만 전념하는 것은 아니었다.

방패와 방패 사이에 벌어진 틈으로 무기를 찔러 넣으며 공격을 시도했고, 뒤에서는 플로라를 비롯한 궁수들이 하늘을 향해 화살을 발사했다.

푸슈슈슉.

파파박!

“크악.”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제국군은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고, 플로라는 핏물과 뒤섞인 땀방울을 털어 내며 다시 한번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으로 귀는 먹먹했다.

예전에는 피로 얼룩진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지만, 전장에서 지내 온 시간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부여했다.

치열한 전투였다.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적들을 죽이고 또 죽여도 밀려드는 적들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계속되는 공격에 방패의 벽은 점점 틈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다른 병사들이 나서서 틈을 메웠다.

동료의 시체를 밟고 올라서서, 크로노스 제국군이 더는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이를 악물고 자리를 버텼다.

현기증이 일었다.

뜨거운 햇볕에 자꾸만 포기하고 싶었지만,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 집중력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전투의 열기가 극한에 달아올랐을 때.

멀리서 무언가를 확인한 플로라가, 밝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군이 도착했다! 실드 월을 해제하고, 적들을 공격하라!”

저 멀리.

아군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카이로가 기다리던, 반격의 시작이었다.

* * *

아군의 선두.

크리스가 있었다.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그는, 오라를 일으키며 그대로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를 따르라!”

콰르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일제히 크리스를 공격했지만, 두 세력이 맞닥트리는 순간 크리스의 검술이 그들의 육신을 찢어발겼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결한 검술이었다.

가장 처음으로 마주한 병사의 가슴팍을 베었고, 뒤이어 달려든 두 병사의 목을 날려 버렸으며, 뒤늦게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제국군들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먼저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악!”

“저 녀석을 막아!”

학살이었다.

크리스를 선두로 들이닥친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크로노스 제국군을 일방적으로 도륙했다.

바르코와의 전투.

남부 전선.

그리고 이번 내란까지.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굵직한 사건들을 이겨 낸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피가 끓는 전사가 되었고, 상대가 제국이라고 불리는 태산(泰山)일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경험한 전쟁은 매번 열약했었다.

그 열세를 이겨 냈던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갈망했다.

상황이 반전되었다.

앞뒤로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 처음에 크로노스 제국군을 주도했던 기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조금만 버티면 아군이 도착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버텨라!”

내뱉은 말과는 달리.

그는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미친 듯이 날뛰는 크리스를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콰르르르릉.

“너는 내가 상대해 주마!”

3성의 검사.

그가 오라를 폭발시켰다.

자신을 막아서는 병사들을 단칼에 베어 버리며, 크리스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혼란한 전장 속에서도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크리스가 짧은 시간에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그래도 3성 검사를 상대로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번뜩.

푸확!

“……!”

기사의 머리가 날아갔다.

코앞에 도달한 그가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머리가 하늘에 붕 떠올랐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단 일격.

3성의 검사를 처리했다.

오라로 압도한 결과가 아니었다.

크리스는 적이 다가오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고, 공격을 시도하면서 틈이 벌어지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크리스는 2년 전에도 3성 검사를 쓰러트린 경험이 있었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섬전(閃電)은, 제국의 기사가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그게 시작이었다.

크로노스의 오라 검사들.

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오라가 폭발하며 크리스의 목숨을 노렸지만, 그들은 방금과 마찬가지로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한 번의 공격에.

한 번의 죽음.

쾌검이 극에 달했다.

크리스의 무지막지한 무력에, 크로노스 제국군이 겁을 먹을 정도였다.

카이로의 섬광(閃光).

대륙에 명성을 떨칠 존재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 *

파비오 백작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펼쳐진 뒤였다.

“…………이, 이게 뭐야?”

로만 드미트리.

그였다.

그가 길목을 틀어막더니, 달려드는 제국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수적인 우위를 압도하는 무력도 무력이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포지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단번에 알아챘다.

크로노스 제국군은 긴 행렬을 이루었다.

중간을 공격당하면서 선두에서 이동하던 병사들이 모조리 중간으로 몰려들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그 길목을 정면에서 막았다.

그 말인즉.

현장에 도착하는 병사들은 가장 먼저 로만 드미트리를 맞닥트려야 했다.

상식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선택인데도, 그가 길을 막아서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발밑에 깔린 시체들.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의 선택을 증명했다.

파비오 백작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수많은 병력이 도륙을 당했고, 그를 지나친다고 할지라도 드미트리의 병사들에 의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눈이 팽팽 돌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대담함에 진심으로 놀랐고, 생각보다 강한 드미트리의 저력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세간의 소문은 진실이었다.

처음에는 우물 안의 개구리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제국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괴물이었다.

그때였다.

“지휘관님! 후방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후방의 병력이 앞뒤로 공격을 당해 전멸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부관이었다.

후방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금은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카이로는 대담하게도 성문을 여는 선택을 내렸고, 하늘이 내려 준 기회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카이로 따위에게 성 밖에서 당한다면 제국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 이미 카이로의 내란을 활용하는 것은 무용지물로 돌아갔지만, 적들의 오만함을 벌하지 않는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대륙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이번 전투로 인한 실익을 떠나. 무조건 적들을 벌해야만 한다.’

“크로노스 기사단.”

“예.”

파비오 백작의 호위.

크로노스가 보유한 10개의 기사단 중, 10번째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파비오 백작을 바라보자, 파비오 백작이 살의로 들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저 눈엣가시 같은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해라. 저 녀석만 쓰러트린다면, 카이로 왕국으로서도 더는 버틸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후방으로 가서………….”

순간.

파비오 백작은 말을 멈추었다.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한참 떨어진 거리에 있는 로만 드미트리가, 파비오 백작의 말을 들은 것처럼 이쪽을 보고 있었다.

* * *

맹수를 만나면 몸이 굳는다는 말이 있다.

그들의 포효는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하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눈빛만으로도 정신을 완전히 옭아맸다.

사고 회로가 굳었다.

기사단에 명령을 내리던 도중에, 세상이 멈추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크악.”

로만 드미트리가 적을 베더니 땅을 박찼다.

확실했다.

그는 파비오 백작과 눈이 마주쳤고, 지휘관의 존재를 파악하자마자 이쪽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황당할 정도로 무모한 판단이었다.

그와 자신의 거리는 짧지 않았고, 그 길목에 크로노스의 병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저들을 모두 뚫고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카맣게 밀려든 제국군이,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를 덮쳤다.

‘끝났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찰나의 시간에.

상황이 바뀌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마주하는 족족 병사들을 도륙해 버렸고, 제국군으로 득실거리던 공간에 길이 열렸다.

깜빡.

방금보다도 거리를 좁혔다.

한 번의 걸음에 수십의 병사가 달려들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그 한 걸음을 나아가기 위해서 기꺼이 그들의 목숨을 취했다.

그러한 상황에 크로노스 기사단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파비오 백작이 명령을 끝맺음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눈치껏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 중에는.

4성의 검사도 있었다.

강하게 일어나는 오라는, 확고한 신뢰를 부여했다.

깜빡.

피가 흩날렸다.

4성 검사의 머리가 하늘에 떠오르며, 다른 크로노스 제국의 기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절대 자신에게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어느새 멀지 않은 거리에 도달했다.

그제야 알았다.

‘이런 미친 새끼가.’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이 인파를 뚫고, 크로노스의 지휘관인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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