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반격 (5)
100m, 90m, 80m…….
로만 드미트리가 거리를 좁혀들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지만, 파비오 백작은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제국의 일원으로서.
겨우 카이로 따위에 겁을 먹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고, 무엇보다도 이대로는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콰르르르르르릉.
“멈춰라!”
크로노스 기사단의 단장.
구스타보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10번째 기사단을 맡은 그는, 돌아가는 상황에 본인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의 검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오라는 강렬한 태양처럼 일렁였다.
굳이 어떠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로만 드미트리가 상대하던 크로노스 제국의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증명했다.
빨랐다.
순식간에 코앞에 도달한 그는, 로만 드미트리가 적을 베어버리는 순간을 포착해 곧바로 공격했다.
카앙!
콰르르르르릉.
단 일격.
엄청난 마나의 파동이 일었다.
구스타보는 멈추지 않고 연계 공격을 펼쳤고,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공격에 둘의 모습이 어지럽게 얽혔다.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을 이렇게까지 막아 내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구스타보의 정체를 몰랐다면 감탄사를 내뱉었겠지만, 그의 실체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대륙 랭킹 78위.
크로노스 랭킹 35위.
세상이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니콜라스 백작보다도 랭킹이 높았지만, 자국에서는 열 손가락에도 들지 못하는 존재.
구스타보는 크로노스 제국이 얼마나 강력한 나라인지를 보여 주는 예시였다.
그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5성의 오라가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다른 검사들은 로만의 일격조차 제대로 받아 내지 못했지만,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밀어붙이며 자신의 선에서 이 싸움을 끝내려 했다.
그런데.
카앙!
카카카캉.
로만은 상대의 공격을 모조리 막았다.
동시에 크로노스의 기사들이 틈을 노리고 공격해 오면, 구스타보를 밀어내며 그들을 단칼에 베었다.
서걱!
“크악.”
방금의 장면이 그러했다.
오라의 파동에도 틈을 노리던 제국의 기사가 달려들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그 공격을 흘려 내면서 상대의 가슴팍을 베어 버렸다.
한 놈을 죽였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다른 기사들이 치고 들어왔고, 구스타보의 공격을 막는 와중에도 그들을 하나씩 확실하게 목숨을 끊었다.
로만은 적진(敵陣) 한복판에 있었다.
구스타보라는 최고의 검사가 나섰지만, 크로노스 제국은 정정당당함을 논하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강력한 포식자들의 공격은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를 집어삼킬 것 같았지만, 치열한 접전 끝에 쓰러지는 것은 결국 제국의 검사들이었다.
하나둘.
시체가 쌓여 갔다.
명백하게 불리해야 하는 상황이건만, 시간이 갈수록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이 적들을 압도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무려 구스타보가 나섰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5성의 검사와 같이 협공을 하는데도, 상대는 전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구스타보는 오로지 승리하겠다는 단 하나의 일념에 집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가 자신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새끼가.’
일대 다수.
구스타보는 다수의 하나가 되었다.
5성 검사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조금 강한 다수일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오름과 동시에, 구스타보는 단 하나의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생각보다도 더 위험한 인물이다. 이 녀석을 그냥 살려 둔다면, 이번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뒤바뀔지 모른다. 내가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제국의 적으로 남을 위험 요소를 반드시 처리해야만 한다.’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필살.
마음을 달리 먹었다.
탈칵.
리미트(limit) 해제.
구스타보의 내부에서, 마나들이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 * *
콰앙!
콰콰콰쾅!
공격의 양상이 바뀌었다.
눈을 녹여 버릴 듯이 타오르는 오라가, 강렬한 열기를 발산하며 로만 드미트리를 몰아붙였다.
방금보다 배로 상승한 위력.
로만 또한 상대에 맞춰서 마나를 끌어 올리며, 구스타보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콰콰쾅!
콰르르르르르릉.
마나의 파동이 일었다.
일개 검사들로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로만 드미트리와 구스타보는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미친 듯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때마다 땅이 들썩였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은 힘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둘의 격돌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일련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는 이상함을 느꼈다.
구스타보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그의 실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지금 상대는 선천(先天)의 기운을 사용하고 있다.’
선천.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타고난 기운을 말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라,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극히 일부의 힘인 데다가 선천의 기운은 생명과도 직결된다.
그 말인즉. 지금 구스타보는,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로만 드미트리를 죽이고자 하는 열망을 표출했다.
지난 몇 년.
로만 드미트리는 대륙에 대해 공부했다.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선천의 기운을 사용하는 방법은 없었다. 구스타보만의 비기이든, 크로노스 제국의 비기이든.
그것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구스타보는 예상하지 못한 힘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겠다는 열망을 보였으나, 사실 그것은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는 힘이었다.
전생.
무림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있었다.
그중 선천의 기운을 사용하는 녀석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하루살이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공격했다.
그들도 알았다.
선천의 기운을 소모하는 순간 끝이 좋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나마 선천의 기운이 모두 달하기 전에 전투를 끝낸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평생을 폐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선천의 힘이었다.
금단(禁斷)의 영역.
무림인들도 선천의 기운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 샐러맨더 대륙에서, 무림인들도 기피하는 선천의 영역을 건드리는 존재를 발견했다.
콰르르르르르릉.
마나가 들끓었다.
주체하지 못하는 힘에 구스타보가 폭주했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다.
딱 그 정도.
이변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수하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1년의 시간을 부여했다. 생각해 보면, 1년 전.
로만 드미트리는 동북쪽 일대의 서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미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버틀러를 넘어서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릴 힘은 이미 갖추었지만, 그래도 내실을 다질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그렇다면.
강해진 것이 수하들만일까.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더더욱 강해졌다.
겨우 1년 만에 남들이 상상하지 못한 경지에 올랐던 것처럼, 지난 1년은 로만에게 다르게 적용되었다.
힘과 힘의 대결.
정면으로 맞붙었다.
상대는 전력을 끌어올렸는데도, 로만을 단 한 발자국도 밀어내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구스타보.
그가 경악했다.
선천의 기운을 사용한들.
그는 폐인이 되거나 죽지는 않는다.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무기를 사용한 것이건만, 그래도 적을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비정상적인 방법. 구스타보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런데도 상대를 쓰러트릴 수 없다면, 그것은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빠르게 사라지는 선천의 기운에, 구스타보는 결단을 내렸다.
“이것만큼은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콰르르르르릉.
마지막 일격.
마나를 끌어 올렸다.
불의 화신처럼 오라에 휩싸이는 그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도 일격을 준비했다.
중반부 초식.
거기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검술이 발전한 만큼, 천마검법의 위력도 달라졌다.
‘천마검법 초반부 삼초식.’
콰르르르릉.
힘과 힘의 격돌.
구스타보의 공격이 작렬하는 순간, 세상을 뒤흔드는 오라의 폭풍이 둘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콰콰쾅!
콰콰콰콰쾅!
* * *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났다.
세상을 휩쓸었던 기운이 가라앉았을 때,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격했다.
“……구스타보 기사단장님이 패배했어.”
차가운 땅바닥에.
구스타보로 보이는 흔적이 널브러져 있었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찢겨 나갔고, 로만 드미트리는 전과 다를 것 없는 얼굴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니콜라스 백작만큼이나 강한 인물이었다.
한때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힘을 극한으로 표출하는 방법만큼은 무림과는 다르게 발달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보다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의 지식을 받아들일수록.
전생의 무력을 회복할수록.
로만 드미트리는, 무림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남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섰다.
시선을 옮겼다.
파비오 백작.
그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차마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벅저벅.
로만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길을 막아서는 존재는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자랑하는 기사들조차도 겁을 먹고 바라만 보는 상황에, 파비오 백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항복, 항복하겠다!”
자존심을 버렸다.
생존을 위해 백기를 내걸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날 죽일 생각이구나.’
직감적으로 알았다.
백기 투항한다고 한들, 상대는 자신을 살려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파비오 백작은 표정을 바꾸었다.
상대가 타협을 불허한다면, 그 기세를 꺾어 버리는 것만이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 나는 제국의 귀족이다! 아무리 전쟁 도중이라고는 하나, 크로노스는 제국의 귀족을 건드리는 존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 뒷감당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천만에! 너는 매일 밤 제국의 암살이 두려워 벌벌 떠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피가 말리고, 잠을 이루지 못해 정신이 날아가겠지. 그러니 선택하라. 나를 살리고, 명예만을 취하라!”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눈을 부릅뜨고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탁.
로만이 걸음을 멈추었다.
“알아. 내 선택의 대가는.”
백중혁.
무림의 정점이었던 남자.
암살 시도는 일상이었고, 투쟁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죽어.”
푹.
검을 찔러 넣었다.
서서히, 아주 고통스럽게.
제국의 병사들이 보란 듯이, 로만 드미트리는 파비오 백작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 * *
콰앙!
콰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
구스타보와 로만 드미트리의 격돌은, 후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게 무슨?!”
반덴버그 백작.
그는 달려드는 제국군을 베어 버리더니, 갑작스럽게 들려온 폭발음에 고개를 돌렸다.
마나의 파동이 심상치 않았다.
일반 병사들은 단순히 폭발음에 놀란 정도겠지만, 반덴버그 백작은 바람에 섞여 날아오는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시간이 없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다면.
중간을 공격한 병력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카이로가 양방 공격을 택한 이유는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후방부터 처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소모하고 말았다.
크리스의 도움으로 승기는 잡았다.
하지만 폭발음의 여파를 경험하고 나니,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휘관님이 우려한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였다.
생각이라도 읽은 걸까.
불안감을 달래 주고는 곧바로 전투에 가담하는 모습에, 반덴버그 백작은 말을 잃었다.
‘어떻게 저리 확신할 수 있지?’
이번 작전.
매우 위험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중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았고, 크로노스 제국의 전력을 생각하면 그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를 비롯한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그 누구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폭발에 잠시 시선이 돌아갔을 뿐, 이내 다시 전투를 속행했다.
맹목적인 믿음.
감탄이 나왔다.
최근에 드미트리가 부흥하는 원동력은, 로만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유대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는.
탄탄한 철옹성(鐵甕城)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드미트리가, 카이로 제일의 가문으로 우뚝 서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때였다.
파앙.
파파팡!
저 멀리.
신호탄이 터졌다.
빨간색은 공격 개시, 노란색은 후퇴, 그리고 초록색은.
‘적의 지휘관을 사살했다는 의미.’
눈을 크게 떴다.
신호탄은 분명히, 초록색의 빛깔을 보였다.
반덴버그 백작의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