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새로운 판도 (1)
한참 전투가 벌어질 그 시각.
카이로 왕궁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내 선택에 카이로의 명운이 걸렸다.’
다니엘 카이로.
그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도, 그때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되뇌었다.
왕국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생각한다면 옳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성패(成敗)의 여부에 따라, 카이로가 짊어져야 할 대가는 천당과 지옥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단 한 번의 승리는 카이로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백성들은 크로노스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가질 테고, 반역도들을 정리함과 동시에 왕국으로서의 체계를 완벽하게 갖추겠지. 크로노스 제국과의 분란과는 별개로, 그것은 약소국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실패였다.
단순히 전쟁에서 병력을 잃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한 대가를 치를지도 몰랐다.
‘이번 전투는 서부 전선의 병력을 총동원한 전쟁이다. 성 밖에서 패배하는 순간, 크로노스 제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부를 무너트리려고 하겠지. 전략적 요충지를 적에게 내준다면, 크로노스는 아무리 왕국 연합과의 분란이 있다고 할지라도 카이로를 직접적으로 노리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어 버릴 수도 있다. 이미 앞선 전투는 전쟁의 명분을 부여하는 일이고, 설령 그들이 먼저 반란에 개입했다고 한들 힘의 논리 앞에서 우리가 대항할 방법은 없다.’
최악의 가능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란으로 왕국의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참.
어려운 일이었다.
정답을 알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책임의 대가가 자신의 목숨 하나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고 초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선택으로 인해 카이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 왕국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한들, 대륙의 역사는 내게 패배의 책임을 묻겠지. 그리고 수많은 백성이 죽어 나갈 것이다. 호시탐탐 카이로를 대륙 정벌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제국에, 우리는 완벽한 명분을 내주는 선택을 내렸다.’
사람들의 평가는 옳았다.
자신은.
난세(亂世)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텅 빈 왕궁에서 홀로 불안에 떠는 모습은, 백성들이 바라는 강직하고 흔들림 없는 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나이 때문이라는 핑계는 대고 싶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에, 최전선에서 크로노스 제국과 싸우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모자랄 뿐이다.
카이로는 약소국에 어울리는 왕을 가졌고, 옳은 판단일지라도 이게 정답이라는 확신은 얻지 못했다.
불안했고, 초조했다.
국왕의 자리.
말 한마디에 돌아오는 대가가 컸다.
그렇기에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보완해줄 사람들을 믿고자 노력했다.
그때였다.
타다다닥.
멀리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복도를 지나, 다니엘 카이로가 있는 장소로 뛰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벌컥.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사이먼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아아, 신이시여.’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밝은 표정에, 다니엘 카이로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 * *
엄청난 대승이었다.
화면 너머에서, 반덴버그 백작은 승리의 기쁨을 가라앉히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국왕 폐하! 카이로가 승리했습니다! 서부에서 한차례 교전이 있었고, 그 결과 크로노스 제국의 지휘관인 파비오 백작을 사살하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생포했습니다!]
카이로 왕국.
급하게 모인 수뇌부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 또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고, 서부에서 날아든 소식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다니엘 카이로가 물었다.
“우리의 피해는 어떻게 되지?”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내부를 정리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고, 이후 크로노스의 대응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병력이 필요했다.
특히.
로만 드미트리의 안위는 중요한 문제였다.
[아군의 피해는 미비한 수준입니다. 이게 전부 로만 드미트리의 활약 덕분입니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적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그사이 로만 드미트리가 파비오 백작을 처리한 덕분에 상대의 항복을 빠르게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크로노스 제국 기사단의 단장인 구스타보를 처리했습니다.]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성과였다.
다니엘 카이로는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도, 크로노스 제국을 성 밖에서 쓰러트릴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그만큼 카이로는 패배의 유전자가 뼛속까지 박혔다.
승리는 카이로에 그리 익숙한 결과가 아니었고, 제국의 강군을 상대로는 승리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해마저 미비한 승리라니.
다니엘 카이로도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체면이고 뭐고 다른 사람들처럼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지금이야말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외교도 전쟁의 한 갈래. 크로노스 제국과의 대화를 잘 끝맺지 못한다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크로노스 제국은 이번 문제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일단 포로들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고, 지금부터 우리는 크로노스와의 협상을 준비할 것이다. 일차적인 목표는 명확하다. 괜한 분란으로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평화적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우리는 아직 내란이 끝나지 않았다. 베네딕트 후작의 귀족파가 몰락했다고는 하나, 그들의 영향력과 제국파의 귀족들을 해결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둠으로 물드는 화면.
다니엘 카이로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방심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표정에는 안도의 기운이 퍼져 나갔다.
* * *
서부의 평야.
인적이 드문 그곳에, 따스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화륵.
화르르륵.
이번 전쟁은 반덴버그 백작의 말처럼 피해가 미비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전쟁의 기준이었고, 그렇다고 정말 적은 숫자가 죽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수백의 사람들이 작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간혹 냉혹한 지휘관들은 아직 상황이 혼란하다는 이유로 장례를 진행하지 않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시체가 모두 타들어 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죽음은 익숙했다.
전생을 통틀어 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이다.
그들의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사람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지휘관은 신뢰를 잃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로만 또한.
한때는 희생을 강요받았던 사람이기에.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그들에 대한 예의를 보였다.
“주변을 잘 정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장례가 끝났다.
크리스에게 뒤처리를 맡긴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성으로 돌아와서는 부상자들의 상태를 파악했다.
넓은 공간.
부상자들로 득실거렸다.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치료사를 찾았고,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치료사가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전투를 떠나기 전에. 로만 드미트리는 파비우스 백작에게 연락해서 수도의 치료사들을 서부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그에 관한 경비는 드미트리가 처리할 것을 약속했고, 파비우스 백작은 일 처리 만큼은 확실한지 정말 많은 수의 치료사를 보냈다.
그들이 전부 치료에 전념했다.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상태에 따라 고가의 포션을 들이붓기도 했다.
그 모습을 다른 병사들이 보았다.
눈앞의 광경이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마음이 일었다.
“대단하네.”
“일개 병사들의 치료에 포션을 사용하다니.”
“드미트리가 돈이 많다고는 해도, 이건 전부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은덕이겠지.”
이번 전쟁.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압도적인 무력은 경외심을 자아냈고, 전쟁이 끝나고 병사들을 챙기는 모습은 진심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에만 해도 드미트리 병사들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기세에 참으로 미련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처우를 눈으로 확인하니 신뢰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소홀하지 않았다.
그들이 현재에 만족하도록, 그 어디에서도 받아 보지 못한 대우를 해 주었다.
언뜻 듣기로는 전쟁에서 죽거나 불구가 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가족에게 보내 준다고도 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륙에 떨치는 명성만큼이나 항상 위험한 장소를 찾아갈 운명이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치료가 막바지에 달했을 즈음.
로만 드미트리에게 말을 거는 존재가 있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서부 참모진의 수장.
노엘 남작이었다.
* * *
참모는 두뇌다.
전장에서 직접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계획을 수립하고 자신이 보유한 체스 말들이 이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상황을 주도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다소 고지식할지라도 안정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서부 전선에서 지내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고, 그간 겪었던 고통이 로만 드미트리의 작전을 머릿속에서 허락하질 않았다.
가장 마지막까지.
노엘 남작은 작전에 의구심을 보였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의 전력을 생각했을 때, 성 밖에서의 전투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승이었다.
성문을 열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모습에, 노엘 남작은 그제야 자신의 현실을 직시했다.
‘나는 퇴보하고 말았구나.’
플로라 로렌스.
그녀는 끝까지 로만 드미트리를 믿자고 주장했다.
동북쪽 일대에서 이미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을 떠나서, 그녀는 대세를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성문을 열자는 판단도, 로만 드미트리를 믿고 후방에서 전력을 최대한 보호하자는 제안도.
그런 열린 사고가 결과적으로 가장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시야가 트였다.
지금은 수도 진출에 연연할 때가 아니라, 서부 전선에 어울리는 사람으로서 발전할 필요가 있었다.
다짐을 확실히 하기 위해.
노엘 남작은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인적이 드문 장소로 이동해, 진심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 님의 판단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점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사실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카이로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약소국의 참모로서 제가 마주한 현실에서는 오늘과 같은 판단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서부 전선에서 나름대로 경험이 쌓였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것은 편협한 생각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꼭 사죄와 더불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덕분에 서부 전선이, 카이로 왕국이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노엘 남작.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가 경험한 세계가 부정적인 선택지를 강요했을 뿐, 그는 서부 전선에 어울리는 그런 존재였다.
카이로.
약소국이라 불리는 나라는 노엘 남작과 같은 인물들로 인해 지탱되었다.
어떠한 이유든 간에 가장 최전방에서 피와 땀을 흘리는 존재들이 있었고, 그들이 존재하기에 외세의 침략에도 카이로는 명맥을 유지했다.
로만이 말했다.
“아닙니다. 전장에서 맹목적인 신뢰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제 선택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의견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보다 이상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노엘 남작님은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고, 우리는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크로노스의 포로들을 확보했으니,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했습니다.”
화제를 바꾸었다.
앞으로 남은 숙제가 있었다.
크로노스와의 협상을 잘 마무리해야 정말 전쟁이 끝나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수뇌부 전체가 희망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로만의 생각은 달랐다.
“상황은 생각만큼 그리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간의 선례.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의 선택을 단언했다.
“우리가 수많은 포로를 확보했을지라도, 크로노스 제국은 절대 협상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