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새로운 판도 (4)
위압감에 숨이 막힌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크로노스 황제는 말없이 파비우스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왕좌(王座)를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덩치에, 다소 창백해 보일 정도로 차가운 안색.
크로노스 황제라는 허울을 벗어던지더라도, 그는 무려 5성에 오른 오라 검사였다.
공식적으로 랭킹에는 등록되지 않았지만, 크로노스 황제가 분출하는 존재감은 거대한 황궁을 완전히 잠식했다.
파비우스는 천천히 걸었다.
황제의 앞에 도달할 때까지 걸음을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감히 황제를 올려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처음 문이 열린 순간.
시각적으로 들어온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황제를 필두로 양옆으로 도열한 크로노스의 핵심 인사들은, 크로노스 제국이 얼마나 거대한 산인지를 보여 주었다.
탁.
걸음을 멈추었다.
사절단을 대표해 예를 표하자, 크로노스 황제가 입을 열었다.
“네가 로만 드미트리더냐.”
“아닙니다. 저는 카이로의 파비우스 백…….”
확.
“크악.”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파비우스 백작이 신분을 밝히는 순간, 크로노스 황제가 표정을 일그러트림과 동시에 파비우스를 안내했던 기사가 갑작스럽게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그대로 넘어트렸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파비우스의 머리를 억누르며,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위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대리인이 분명히 말했을 텐데. 협상은 불가하며,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을 바라지 않는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직접 찾아와 팔을 바치라고.”
“그, 그게…….”
꽉.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크로노스의 기사는 파비우스의 얼굴을 과할 정도로 억눌렀고, 입을 열려고 해도 바닥과 맞닿는 부분에 말이 뭉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크로노스 황제가 호전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사절단의 대표로 나온 사람을 이렇게 대할 줄은 몰랐다.
“카이로의 뜻은 잘 알겠다. 너희가 정녕 전면전을 바란다면, 사절단의 대표인 네 팔이라도 잘라서 크로노스의 뜻을 보여 주마.”
쿵.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면 카이로는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할 수도 없다. 그때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계획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릴 테고, 애매한 발언은 계획을 실패하게 만들겠지. 문제는 과하게 공격적으로 나갈 경우, 크로노스 황제는 제국의 위상 때문에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비굴하지 않되, 상대의 자존심을 깎아내리지 않는 선에서 카이로의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판단 한 번에, 말 한마디에 많은 것이 걸렸다.
파비우스 백작은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상황에, 오히려 주변의 감각이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크로노스 황제 폐하! 카이로는 전면전을 바라지 않습니다! 제게 발언할 기회를 주십시오. 카이로의 뜻을 모두 전달하고 나면, 그때는 팔이 아니라 제 목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목숨을 걸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을 뿌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심장 소리만이 귓가를 파고드는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크로노스 황제가 물음의 답을 말했다.
“지금 내뱉은 말을 명심하라. 카이로의 뜻이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너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옆으로 물러나는 기사.
파비우스는, 기어코 발언의 기회를 얻었다.
* * *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숨을 골랐고,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크로노스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웠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지만, 파비우스 백작은 두려움을 안으로 삼켰다.
“크로노스 제국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애초에 베네딕트 후작의 반란이 정당한 명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트 후작은 단순히 자신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고, 그가 크로노스 제국을 끌어들인 것은 올바른 결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을 바라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왕국의 인재를 희생할 일도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크로노스는 일전에 명분을 들먹였다.
카이로 내부에서 제국을 끌어들였으니, 본인들의 공격은 정당하다고 말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부정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발언은, 크로노스 제국이 대륙의 법도를 어겼다는 가정하에서 진행되었다.
“카이로는 이번 일에 대해서 국제사회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그 책임을 물을 의무가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할라 제국을 제외한 5개의 왕국은 카이로와 뜻을 같이할 것을 표명했습니다. 크로노스 황제 폐하. 이번 전쟁은 타국이 개입할 명분이 없는 내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일방적으로 카이로의 희생을 바란다면, 저희로서는 막다른 길에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묘한 화법이었다.
왕국들의 동의를 구했다는 말을 앞에 깔면서, 카이로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말했다.
며칠 전.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와의 협상을 위해 대륙에 존재하는 5개의 왕국에 연락했다.
그들과의 대화는 어렵지 않았다.
크로노스 남부에 있는 왕국 연합은 크로노스와의 분란 때문에라도 카이로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바랐고, 헥토르 왕국은 지난 악연을 떠나서 이번만큼은 목소리를 합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국이 아무런 명분 없이 왕국을 억압한 사건이다.
지금 공격당하는 것은 카이로지만, 그 이후에는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로만의 계획.
왕국들의 힘을 모으는 것에 있었다.
각 왕국은 그리 대단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6개 왕국의 연합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파비우스 백작이 말했다.
“카이로는 평화를 바랍니다. 만약 크로노스 제국이 전쟁을 바란다면, 제 목을 자르는 것으로 크로노스의 뜻을 보여 주십시오. 하지만 카이로와 뜻이 같다면, 이번 일은 이대로 마무리하길 바랍니다.”
발언은 끝났다.
패를 모두 공개했고, 지금부터는 크로노스가 결정할 차례였다.
* * *
카이로의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벼랑 끝.
자신들을 몰아붙인다면, 나머지 5개의 왕국과 연합해서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그 발언에는 노림수가 있었다.
발할라 제국을 일부러 이번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크로노스의 역린(逆鱗)이기 때문이다.
크로노스와 같은 대륙의 양대산맥.
만약에 발할라 제국의 이름을 들먹이며 협박성의 발언을 내뱉었다면, 크로노스 황제는 제국의 위상을 위해서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발할라 제국을 철저히 배제했다.
그들은 이번 일과 관련이 없음을 말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크로노스와 왕국 연합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분명히 승리하겠지만,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난 뒤다. 6개의 왕국을 쓰러트리느라 많은 힘을 소모한 크로노스 제국으로서는 발할라와의 전쟁을 걱정할 수밖에 없겠지. 발할라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발할라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제국의 자존심은 지키되.
최선의 타협점을 말했다.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여, 크로노스가 주장하는 논점을 흐려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
대단한 인물이었다.
단순히 무력에만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보다 좋은 계획은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아직 대륙 정벌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고, 이런 문제로 그들의 원대한 계획을 앞당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은 신뢰하지만, 크로노스 황제의 존재감은 자꾸만 입을 마르게 했다.
그때였다.
“제법 머리를 굴렸구나.”
당황하지도.
그렇다고 화난 음성도 아니었다.
크로노스 황제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파비우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크로노스 황제는 대화 내내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았다.
어떤 감정인지를 유추할 수가 없다 보니, 카이로스의 너구리로서도 이 자리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크로노스의 포로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이번 문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만, 로만 드미트리에 관한 처우는 별개의 문제다.”
“……그게 무슨.”
“로만 드미트리는 나의 사람들을 죽였다. 파비오 백작, 구스타보 기사단장. 모두 제국을 위해 헌신한 인재들이지. 그리고 나는 크로노스의 황제로서, 피의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앞으로 매일 밤, 나의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갈 것이다. 제국의 인재를 죽인 죄.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로만 드미트리, 나아가 카이로의 몫이다.”
크로노스 황제.
그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카이로는 이번 문제에 타국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에게만 행하는 복수라면, 그들의 도움을 받아 낼 방법이 없었다.
암살 시도.
그걸 어떻게 도와준단 말인가.
아무리 부당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한들,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암살은 로만 드미트리의 죽음으로 끝맺을 확률이 높았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크로노스 황제는 애초에 카이로와의 전면전을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카이로를 궁지에 몰아붙이고, 로만 드미트리를 암살함으로써 제국의 위상을 바로 세우려는 판을 깔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위.
천외의 존재였다.
제국은, 제국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오늘과 같은 수작질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발언.
파비우스 백작은, 참담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 * *
며칠 뒤.
파비우스는 카이로로 복귀했다.
국왕을 찾아가 일련의 상황을 보고한 그는, 로만 드미트리와의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전쟁은 막았다.
하지만 앞으로 암살 시도가 이루어진다는 말은, 로만 드미트리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차마 입밖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변절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겠다는 자신감을 보이고 떠났건만, 크로노스 황제라는 거인 앞에서 파비우스는 완벽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잘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개의치 않는 표정을 보였다.
파비우스 백작이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을, 그는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단 한 번도 본인들의 뜻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나였고, 카이로의 협상을 받아들이면서 그와는 별개로 나에 대한 위협은 거두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너는 내가 바라는 최선을 다했다.”
크로노스의 대응.
예상 범위에 있었다.
‘크로노스 황제. 예상대로 호전적인 인물이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사절단으로 갔다면.
그는 암살을 언급하면서도 자신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익보다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살려 보내 놓고 제국 밖에서 그를 죽인다면, 사람들은 제국의 영향력에 겁을 먹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사절단을 자처했다.
크로노스 황제가 자신과 같은 동류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크로노스 제국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의 암살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였던 발할라의 검사는, 처참하게 죽음으로써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파비우스 백작이 우려를 표했다.
당연한 감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신뢰하나, 크로노스라는 이름값은 엄청난 무게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
아니, 천마 백중혁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암살은 일상이었고, 자신을 두려움에 빠트리려는 크로노스 황제의 의도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신경 쓰지 마라. 그것은 지금부터 내가 감당할 문제다.”
피가 끓었다.
드디어.
칼 위를 걷는, 자신의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