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새로운 판도 (5)
격동(激動)의 시기였다.
카이로 왕국이 빠르게 변화하는 그때, 크로노스 제국을 따르는 그레고리 백작은 감옥에 있었다.
처음에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자신을 건드리면 제국이 가만히 있겠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던 그는, 날이 갈수록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게 사실이냐?”
“예. 지금 밖이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병력을 이끌고 베네딕트로 가서, 반란군을 단번에 무너트렸다고 합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귀족파와 손을 잡고 서부 전선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반란군이 너무 빨리 무너지는 바람에 제국으로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감옥 안.
그레고리의 사람이 몰래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랫동안 베네딕트 후작과 경쟁하던 사람으로서, 그가 반란을 위해 얼마나 만반의 준비를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베네딕트 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이었다.
그런 곳을 단번에 무너트렸다고 하니, 자신의 목숨 또한 위태롭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마지막 희망.
크로노스 제국이었다.
그들이라도 승리해 서부 전선을 차지한다면, 카이로 왕실과 적절하게 타협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방금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저도 잘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서부 전선이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성문을 열고 따라가서 그들의 수장인 파비오 백작과 10기사단의 기사단장인 구스타보를 죽였다고 합니다.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만 드미트리가, 왕국의 위험 요소를 모조리 처리했습니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자리에 주저앉은 그레고리 백작은,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괴물 같은 녀석.’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알았다.
카이로라는 작은 우물이 넘실거릴 정도로 대단한 존재감을 보이던 그가, 설마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도 검을 뽑을 줄은 몰랐다.
과대평가라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과소평가였다.
크로노스 제국이 한발 물러났다면, 반란군과 더불어 제국파의 귀족들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그때부터였다.
그레고리 백작은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언제 사형 선고가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그는 퀭한 얼굴로 감옥에서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그리고 감옥의 문이 열리던 날.
왕의 부름이라는 말과 동시에, 경비병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고리 백작님. 크로노스 제국은 본인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파비오 백작과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죽인 죄를 물어, 로만 드미트리의 팔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말에.
그레고리 백작은 표정이 환해졌다.
사람이 죽으리란 법은 없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로서는 아직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다.
* * *
그레고리 백작은 국왕의 앞에 끌려갔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무릎을 꿇은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다니엘 카이로를 올려다보았다.
“그레고리 백작. 너는 크로노스 제국과 내통하여 나라의 안위를 어지럽혔다. 그 사실을 인정하나?”
예상한 질문이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권력을 모두 잃을 것이고, 어쩌면 목이 나가떨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정합니다.”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다니엘 카이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레고리 백작은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크로노스 제국을 따르는 것은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되었습니까? 베네딕트 후작은 반란을 일으켰기에 그 대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그 무엇도 실행에 옮긴 것이 없는데, 대체 무슨 이유로 저를 이리 대하신단 말입니까?”
“참으로 뻔뻔하구나. 네가 인정한 그 사실만으로도, 너를 반역도로 취급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국왕 폐하야말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베네딕트 후작은 카이로의 사람이기에 그를 반역도로 처단해도 문제가 없겠지만, 저는 크로노스에 충성을 맹세한 존재입니다. 카이로의 귀족이라고 한들 베네딕트 후작과 똑같은 신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저를 이 자리에서 죽인다면. 크로노스 제국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그들은 포식자입니다. 전장에서 적장을 죽인 일로도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존재들인데, 그들이 제 죽음에는 어떻게 반응하리라고생각하십니까?”
태도를 바꾸었다.
비굴하게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
크로노스 제국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었다면, 그것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크로노스 황제 폐하는 피의 복수를 예고했습니다. 저를 죽인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겠지요. 그러니 차라리 저를 제국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손에 피를 묻힐 수 없다면 카이로의 위험 요소라도 제거하십시오. 그게 서로를 위한 일입니다.”
고개를 세우고.
눈을 부릅떴다.
죄인의 신분으로 무릎을 꿇었을지언정, 다니엘 카이로보다 본인이 위라는 사실을 눈빛으로 보였다.
협박은 통했다.
그레고리 백작이 내뱉은 말에, 다니엘 카이로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파비우스가 복귀하고.
평화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다니엘 카이로는 로만 드미트리를 걱정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렇다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로열 나이트로 하여금 신변을 보호해 주는 것? 아무런 소용이 없다.
상대는 무려 크로노스 제국이고, 니콜라스 백작보다도 강한 검사를 암살자로 사용하는 괴물 같은 집단이다.
그렇기에.
죄책감에 휩싸였다.
왕국을 위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확신은 있지만, 그 대가를 로만 드미트리가 떠안는 것은 부당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로만 드미트리가 주도한 전쟁이었다.
그가 귀족파와 크로노스 제국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카이로는 멸망의 길에 들어섰을 텐데, 그를 위한 파티를 열어 주지는 못할망정 암살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방법이 없었다.
매일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다니엘 카이로의 아픔을, 그레고리 백작이 제대로 건드렸다.
제국파.
당장에 소탕하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분노가 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확실히 자신은 유약한 국왕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그때.
다니엘 카이로는, 로만 드미트리와 눈이 마주쳤다.
* * *
무언의 신호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한발 앞으로 나와, 국왕을 보았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크로노스 황제는 한번 내뱉은 말을 무를 사람이 아닙니다. 피의 대가를 받아 내겠다고 발언했다면, 분명히 저를 암살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지금부터 감당해야 할 문제와는 별개로, 적들의 살인 예고를 받은 상황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파비오 백작, 구스타보 기사단장. 그레고리 백작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름값이 무거운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결단을 내리시어 카이로의 짐을 덜어 주십시오.”
그레고리 백작이 당황했다.
뭐라고 말하려는 그의 말을 끊고, 로만 드미트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반역도를 처단한 그 순간부터, 카이로의 평화는 끝났습니다. 국왕 폐하는 카이로를 위한 선택을 내리십시오. 그로 인해 국왕 폐하의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고 할지라도, 올바른 판단이었다면 그 누구도 국왕 폐하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전쟁은 없습니다. 목숨의 무게를 따져 중요한 것을 놓친다면, 그때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카이로 왕궁.
이곳에 자리한 수뇌부들은 말을 잃었다.
도대체.
로만 드미트리는 겁도 없단 말인가.
크로노스 제국이 대놓고 암살을 예고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음성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다니엘 카이로가 마른침을 삼켰다.
유약한 왕은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끝까지 현실을 직시하려고 노력했다.
“카이로는 드미트리 가문에게 큰 빚을 졌다. 이 선택으로 나 또한 암살의 대상이 될지언정, 카이로 왕가는 드미트리의 헌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
시선을 옮겼다.
그레고리 백작.
당황한 얼굴의 그를 바라보며, 단호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레고리 백작. 너는 그동안 크로노스 제국과 내통한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내 앞에서 그 사실을 밝힘으로써 카이로의 명예를 더럽혔다. 카이로의 혼란은 단 한 번의 방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베네딕트 후작, 그레고리 백작, 덴버 백작. 나라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존재들을 방관한 순간부터, 카이로는 더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국왕 폐하! 무슨 오해를…….”
“닥쳐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니엘 카이로.
어린 국왕은 그 자리에 없었다.
계속되는 시련과 로만 드미트리라는 계기로 인해, 다니엘 카이로의 심장에 단단한 무언가가 생겼다.
국왕으로서의 결단.
다니엘 카이로가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그레고리 백작.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 반역도에게 사형(死刑)을 선고한다.”
* * *
인생은 쉽고도 어려웠다.
카이로는 갈기갈기 찢겨 나간 권력 체계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에 신음했지만, 다니엘 카이로의 결단 한 번에 처형식이 진행되었다.
교수대(絞首臺)에 오를 사람은 두 명.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의 최후에, 그동안 그들을 따랐던 사람들은 겁을 먹고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카이로스의 광장.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덴버 백작은 허망한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내가 참 어리석었구나. 너를 회유의 대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국에 위협이 될 존재라고 인식했다면, 이렇게 되기 전에 너를 처리했겠지. 로만 드미트리. 너만 아니었다면, 카이로 왕국은 갈기갈기 찢겨 나가 멸망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레고리 백작은 말을 잃었다.
절망에 빠진 얼굴로 땅만 바라보는 그와는 다르게, 덴버 백작은 아직 삶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제국에 충성을 맹세해라. 당장은 네가 대단한 것을 이루었다는 착각에 빠지겠지만, 너는 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구스타보 기사단장? 카이로에서는 니콜라스 백작을 넘어설 만한 실력자지. 하지만 대륙의 기준에서 그는 겨우 78위에 불과하다. 그보다도 강한, 아니 감히 넘보지도 못하는 실력자가 제국에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 괴물들을 네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들이 너와 네 가족을 죽이려 한다면 너는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국왕은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마음을 바꾼다면, 자신이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멍청하지 않아. 인생은 한 번의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네가 카이로의 사람으로 남는다면 앞으로 네 모든 선택은 고난이 동반하겠지만, 제국은 네 등 뒤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있다. 현명하게 생각해라. 크로노스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해도, 발할라는 아직 기회가 있다. 그리고 내 목이 날아간다면 발할라와의 관계도 끝이다.”
마지막 회유였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덴버 백작은 이를 악물더니, 악에 받친 얼굴로 말했다.
“너는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복수는 크로노스 제국만의 것이 아니다. 발할라 제국 또한, 내 목숨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멍청한 녀석. 한 번의 선택으로, 대륙의 양대산맥을 모두 적으로 돌리다니.”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 상황.
로만 드미트리에게 익숙했다.
패자가 내뱉는 말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고, 그들은 발악하고 또 발악하다가 최후의 보루마저도 실패도 돌아갔을 때 세상을 잃은 눈빛을 보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레고리 백작처럼.
아직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덴버 백작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웃음을 보였다.
“기대하지.”
딱.
그 정도였다.
패자를 위한 마지막 말.
덴버 백작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대로 끌려갔다.
그리고는.
툭.
털컥.
그렇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