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615)

196화 드미트리 공국 (1)

카이로의 네 파벌.

그중 세 파벌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베네딕트 후작과 같이 직접 반란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피의 숙청을 당했고, 그레고리 백작과 덴버 백작을 따르던 무리는 그간 저질렀던 잘못의 경중(輕重)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었다.

적극적으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반역도들과 똑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정도를 지키던 사람들은 목숨을 구제할 수 있었다.

이번 내란.

나라를 완전히 뒤엎는 문제였다.

다른 파벌에 가담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기에는 그들의 숫자가 과반수를 넘어섰고, 그렇기에 용서할 수 있는 죄목과 없는 죄목을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모두가 동의한 판단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대가를 치르고 싶지만, 그랬다간 카이로의 국력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질 것이다.

대신.

크로노스의 포로들을 풀어 주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한 다니엘 카이로는, 자신을 끝까지 믿어 준 사람들을 위해 성대하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자리를 마련했다.

카이로 왕궁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이름을 한 명씩 읊으며 상을 내렸다.

“서부 전선의 지휘관인 반덴버그 백작은, 크로노스 제국의 공격에도 당당하게 그들을 물리치고 카이로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에 나 다니엘 카이로는 반덴버그 백작에게 후작의 작위를 하사하고, 그에 합당한 땅과 인력을 부여할 것이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왕국에 단 두 명뿐인 자리.

그중 한 명이었던 베네딕트 후작의 죽음으로, 다니엘 카이로는 새로운 후작으로 반덴버그 백작을 올렸다.

그리고.

“서부 전선에는 반덴버그 백작 외에도,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목숨을 건 영웅들이 존재한다. 노엘 남작, 플로라 로렌스…… 로드웰 드미트리는 서부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들에게는 진급과 더불어 각각 1000골드의 포상금을 부여하겠다.”

“오오오!”

“와아아아.”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서부 전선의 영웅들에게 과할 정도로 부여하는 포상은, 다니엘 카이로가 인색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외에도 논공행상은 계속되었다.

크로노스를 물리친 사람들뿐만 아니라, 베네딕트 후작을 상대로 반란을 정리한 사람들도 당연히 논공행상 대상에 포함되었다.

국왕파의 사람들.

파비우스 백작을 비롯한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들.

축제의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로만 드미트리.

과연 그에게는 어떤 포상을 내릴까.

상식적으로는 최고의 대우를 해 주는 것이 옳지만, 처형식을 진행한 직후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다니엘 카이로가 세 파벌을 정리하면서 카이로의 권력을 손에 넣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존재하는 이상 그게 의미가 있을까? 로만 드미트리의 세력은 세 파벌보다도 강력해. 어쩌면 왕실을 단번에 집어삼킬 세력을 형성할지도 모르는데, 그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상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아. 카이로 왕실이 존재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금 잔인한 일이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적당한 선에서 끊어 내야 해.”

권력의 이동.

그 중심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그가 증명한 대단한 능력들은, 역설적으로 왕실의 위험 요소가 되었다.

카이로 왕실이 나머지 세 파벌을 컨트롤하지 못했던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왕실이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토사구팽(兔死狗烹).

사람들의 추측이 소문을 부풀렸다.

로만 드미트리 덕에 권력을 쟁취했지만, 다니엘 카이로가 은혜를 저버릴지도 모른다고 떠들었다.

사람들의 시선.

이목이 집중되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들의 눈빛에, 다니엘 카이로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전쟁은 로만 드미트리, 나아가 드미트리 가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절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다니엘 카이로는 그들의 공을 인정해 드미트리 가문에게 공작의 작위를 하사하고, 드미트리를 포함한 동북쪽 일대를 공국의 땅으로 인정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하나의 나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지식과 인력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겠다.”

국왕의 선포.

그가, 사람들의 의구심을 단번에 종결시켰다.

* * *

이번 선택.

그 위험성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로 왕궁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국왕파의 사람들은 하나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덕분에 승리한 싸움입니다. 그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이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현재 카이로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지만, 그런 말에 현혹되어 왕실이 받은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그간 비상식이 통용되는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국왕 폐하가 존재하는데도 네 개의 목소리를 내던 세상이었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그와 똑같은 결정을 내린다면. 과거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바라는, 상식적이고 당연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들도 알았다.

한 번의 결정이.

드미트리를 걷잡을 수 없게 성장시킬 것이라고.

그렇다 할지라도, 비상식의 세계에 살았던 사람들은 카이로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길 바랐다.

다니엘 카이로가 말했다.

“내 생각도 너희와 같다. 드미트리 가문이 세 파벌을 능가할 만큼의 힘을 보유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일련의 사건.

다니엘 카이로는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할 것들을 보고 느꼈다.

어렸던 국왕의 가슴 속에 경험이 켜켜이 쌓이며, 그만의 확실한 기준이 생겼다.

“앞으로 카이로의 미래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드미트리는 카이로가 품을 수 없는 존재다. 그들을 통제하려고 해도, 베네딕트 후작을 쓰러트리는 과정에서 그들은 카이로를 넘어서는 전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했다. 그렇다면 드미트리는 일반적인 개념의 공국(公國)이 아니라,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우방국(友邦國)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군신의 관계가 아니다.

드미트리는 카이로를 군신의 관계로 생각하겠지만, 카이로도 그들의 충성을 당연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카이로는 그간 내외부로 적들을 마주했다. 국경 밖에서는 외부의 세력들이 들끓었고, 내부에서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매국노들이 나라의 안위를 위협했다. 만약 우리가 드미트리를 굴복시키려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카이로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을 넘보지만 않는다면, 카이로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드미트리를 든든한 우방국으로 확보할 수 있다.”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정리되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였다.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통해서 새로운 카이로의 미래를 그려 나갈 생각이었다.

“나는 카이로가 어렵게 얻은 기회를 잘 살려 보고 싶다. 상식적인 나라. 국익을 생각하는 나라. 드미트리를 우방국으로 인정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사람들은 카이로에서 큰 덩어리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만의 나라를 만들어 갈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렇기에. 드미트리가 공식적으로 개국(開國)을 선포하는 그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카이로 왕실은, 처음으로 하나 된 눈빛을 보였다.

“나 다니엘 카이로는, 기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 * *

드미트리 공국의 선포식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드미트리에서 선포식과 더불어 파티가 예정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정말 난 놈이라니까.”

“내가 말했었잖아. 남부 전선에서 헥토르 왕국을 물리칠 때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겨우 남작 가문의 장남으로 남을 인물이 아니라고. 다니엘 카이로 국왕도 대세를 읽은 거지. 카이로가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파벌 싸움을 겨우 며칠 만에 정리하고 크로노스 제국마저도 물리쳤는데, 어떻게 로만 드미트리를 적대할 수 있겠어?”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어디까지 성장하는 거지? 크로노스의 구스타보 기사단장도 이겼다며.”

처음에는 단순한 감탄이었다.

카이로의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업적을 치켜세웠는데, 그러한 소문이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살이 붙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예전의 사건들을 재조명하면서, 카이로의 영웅이 단순히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단정할 존재가 아님을 강조했다.

“세상에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성장세를 보인 인물이 있었나?”

“단언컨대 그런 괴물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 현재 대륙에서 제일 검이라고 불리는 존재도, 로만 드미트리의 나이에 5성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어. 그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행보를 보여 주고 있다고.”

“……정말 어쩌면, 대륙에서 처음으로 마(魔)의 50위를 넘어서는 왕국의 검사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네.”

마의 50위.

사람들이 말하는 왕국의 한계였다.

니콜라스 백작이든, 그 어떤 인물이든.

왕국의 출신들은 단 한 번도 그 위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은 더욱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구스타보를 쓰러트린 무력이면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했고, 어쩌면 30살도 되기 전에 50위의 경계를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나왔다.

이례적인 행보였기 때문일까.

대륙의 사람들은 국가를 가리지 않고 로만 드미트리를 언급했고, 어디에서든 그에 관해 떠드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허름한 호프집에서도.

일과를 마친 사람들은, 맥주잔을 기울이며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라도 되는 것처럼 검을 휘두르는 흉내를 냈다.

거리에 나가면.

음유시인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업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카이로가 아닌 그 어디에서도, 로만 드미트리는 모르면 이상하다는 취급을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럴수록 드미트리의 위상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비록 카이로에 있는 남작 가문에 불과하지만, 내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드미트리가 보여 준 저력은 대단했다.

카이로는 그들을 하나의 왕국으로 인정하겠다고 선포까지 한 상황. 로만 드미트리에 관한 관심은 드미트리로 직결되었다.

앞으로 대륙에 큰 파란을 일으킬 존재의 가문이 공국으로서 첫발을 내딛는다는데, 대륙의 눈과 귀가 당연히 드미트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련의 소문들은 그리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소문이 바람을 타고 몸을 부풀린 것은 맞으나, 그 시작은 카이로스의 한 저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 * *

카이로스의 한 저택.

사내가 수하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대륙 전역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상인들을 고용해서 소문을 퍼트리고, 음유시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를 주인공으로 한 시를 만들라고 했던 것이 주요했습니다. 이제 카이로가 아니더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역시 주군의 계획은 완벽합니다.”

수하의 말.

계획대로였다.

어딜 가든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이 들렸지만, 사내는 그리 만족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해. 로만 드미트리는 웬만한 사람들이 인생을 통틀어 감히 엄두도 내질 못할 업적들을 이루었어. 남부 전선에서 헥토르 왕국을 물리쳤고, 혼란했던 동북쪽 일대를 단번에 휘어잡았으며, 이번에는 베네딕트 후작의 반란군을 정리하고 크로노스 제국까지 물리쳤지. 겨우 2년이야. 일개 남작 가문이, 드미트리 공국이라 불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로만의 업적.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굵직한 사건들만 언급해서 그렇지, 세세하게 따져 보면 그 과정에 쓰러트린 존재들의 면면도 대단했다.

헥토르의 별, 에드윈 헥토르.

대륙 랭킹에 오른 버틀러, 니콜라스, 구스타보.

처음에 쓰러트렸던 호메로스는 이제 피라미라고 생각될 정도로,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모르지 않아. 하지만 카이로라는 작은 우물에서 일어난 일을, 일부 사람들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야. 대륙 끝에서, 대륙 끝까지. 대륙의 모든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를 우러러보는 것. 그가 대륙이 인정하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대단한 행보를 연속해서 이루어 내는 게 아니라 그의 업적을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널리 퍼트려야 해.”

갈증이 일었다.

겨우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사내가 말했다.

“가문에게 요청해서 자금을 더 확보하고, 사람들을 최대한으로 풀어. 소문은 결국 메신저의 싸움이야. 로만 드미트리에 대해 많이 떠들수록, 사람들의 입과 입을 오르내리는 빈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겠지.”

“알겠습니다.”

수하가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공간.

사내는, 로만 드미트리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천운(天運)이었습니다.”

사내의 정체.

그는 바로 남부 전선의 인연인, 헨리 앨버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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