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드미트리 공국 (2)
헨리 앨버트.
그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처음에는 단순한 일거리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면서, 남부 전선의 접점인 헨리 앨버트의 가치도 덩달아 상승해 버렸다.
앨버트 가문의 망나니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요청했고, 명문 가문의 자제들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다.
그때.
그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남부 전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방식으로 헥토르 왕국을 물리쳤는지. 보고 들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강의 내내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인생이 변했다.
중앙 정부에서 알아주는 가문의 자제들이 강의가 끝나면 찾아와서 사인을 요청했고, 헨리 앨버트를 마치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영웅으로 우러러보았다.
그들은 진실을 몰랐다.
하지만 남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헨리 앨버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단 한 번의 강의.
폭발적인 반응.
강의가 줄을 이었다.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에서는 주기적으로 강단에 서 주길 바랐고, 다른 곳에서도 헨리 앨버트가 얼굴을 비추어 주길 바랐다.
당연히 그만한 대가도 따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명예를 바라서 강단에 올랐다면, 헨리 앨버트의 시간을 사기 위해서 거금을 내놓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카이로스 길거리를 걸어도 사람들이 알아보는 상황에, 망나니처럼 살아가던 헨리 앨버트로서도 허리를 펴고 최대한 명성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했다.
혹시라도 강의 도중에 학생들이 어려운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공부를 시작했고, 미천한 지식을 쥐어짜서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부와 명예가 따라왔다.
가문의 사람들은 헨리 앨버트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어느 순간부터는 금전적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강의 한 번이면 수십 골드다.
어떤 사람들은 백 골드도 넘게 준다고 말하는데, 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아, 행복하다.”
겨우 반년.
카이로스에서 호화스러운 저택을 얻었다.
강의를 다니며 안면을 튼 인맥의 도움으로 구매한 저택이었는데, 주변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헨리 앨버트를 정말 좋은 이웃으로 받아들였다.
한 번쯤은 상상하며 히죽거렸던 이상적인 삶.
명품 소파에 앉아 포근함을 느끼던 헨리 앨버트로서는, 문득 이 안락함이 허상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운이 좋아서 이런 삶을 살고 있지만, 당장 내일 나락으로 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행복과 불행이 동반되었다.
처음에는 행복한 삶을 마냥 즐겼다면, 불안함이 일어날 때마다 술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 앨버트는, 정말 충격적인 순간을 마주했다.
“헨리 앨버트 님. 당신의 강의를 들으면서 심장이 끓어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남부 전선에서 카이로의 영웅들이 헌신한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인데, 대체 왜 사람들은 그런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던 걸까요. 덕분에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저 또한 카이로 국방에 힘을 보태고, 헨리 앨버트 님의 강의가 얼마나 유익하고 대단한지를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다.”
60대 후반의 사내.
백발에 점잖게 수염을 기른 그는,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교수 중 한 명이었다.
강단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 인물인데, 그가 헨리 앨버트를 바라보며 존경하는 눈빛을 보였다.
충격적이었다.
멋모르는 어린아이들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학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저런 눈빛을 보이다니.
그 순간.
헨리 앨버트는, 인생을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 * *
자신의 강의.
정말 대단한 내용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 한마디에 환호하고, 자신의 팬이라며 찾아오는 이유는 전적으로 로만 드미트리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명성을 활용하는 것도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동북쪽 일대를 점령하면서 자신을 향한 반응이 더욱 격정적으로 변하는 상황에,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한 관심.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명성을 떨칠수록, 이름을 알릴수록, 헨리 앨버트도 덩달아 득을 보았다.
‘사람들이 왜 내게 열광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남부 전선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유독 자신의 언행에 환호하는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정답은 간단했다.
다니엘 카이로와의 연락.
남부 전선의 상황을 보고하는 상황에서, 헨리 앨버트는 ‘로만 드미트리’를 대신해서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국왕을 마주할 신분(귀족)이 그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얼떨결에 통신 화면에 얼굴을 드러냈다.
그때.
사람들은 보았다.
헨리 앨버트가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를 대신했다는 사실을.
남부 전선에서 활약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헨리 앨버트는 명확한 행적이 드러난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통해 로만 드미트리를 투영하고 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로만 드미트리를 대신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지. 참 웃기네. 앨버트 가문의 망나니로 불렸을 때는 무슨 행동을 해도 같잖게 여기던 사람들이, 그때와 똑같은 사람인데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잖아. 그들이 멍청하기 때문이 아니야. 카이로 왕실 아카데미의 교수조차도 나를 우러러보는 것이라면, 이건 인간들의 원초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어.’
단 하나의 사실.
인생을 바꿀 계기로는 충분했다.
자신이 대단하지 않더라도, 대단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상에 명성을 떨치는 영웅들이 존재했어.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명성을 얻었을까? 본인이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내고 동네방네 자신이 그 주인공이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명성을 떨침으로써 콩고물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소문을 내고 다녔기 때문이겠지. 지금부터 내가 부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명확해. 로만 드미트리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것. 그가 지금처럼 대단한 인물로 남는다면, 그와 전장에서 같이 동고동락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 내 인생을 안락하게 만들어 주겠지.’
소문을 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반적인 인물들은 평생 이루지도 못할 만한 일들을, 로만 드미트리는 끊임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헥토르 왕국.
드미트리 동맹.
공개 랭킹전과 이번 내란까지.
소문의 근거는 차고 넘쳤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부채질을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헨리 앨버트는 자연스럽게 영웅의 동료가 되었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와인을 한잔 마시며, 헨리 앨버트는 웃음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 당신과 나는 사람들의 말처럼 그리 대단한 사이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항상 남들이 우러러보는 삶을 살아간다면, 내 안락한 삶을 위해서라도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최고급 와인.
달았다.
자신이 거주하는 저택이, 소파가, 와인이.
헨리 앨버트의 삶을 증명했다.
그것이, 한때는 망나니라고 불리던 헨리 앨버트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다.
* * *
헨리 앨버트의 방식은 통했다.
그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소문을 내고 다닌 덕분에,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제일 큰 관심사는, 드미트리 공국의 선포식이었다.
카이로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로만 드미트리가 역사에 남을 첫발을 내딛는 상황에, 타국의 사람들조차 선포식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것은 소문으로 접한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동경심이었다.
그간의 소문이 절반만 진실일지라도, 머나먼 거리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선포식 며칠 전.
드미트리는 대륙 곳곳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특별히 성문의 경비를 맡은 조나단 기사단장은,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하며 감탄하는 기색을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보겠다고 타국의 사람들이 이렇게나 몰려들다니. 그리고 그들 중에는 각 나라를 대표하는 핵심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어. 어제는 프랑크 왕국에서 사람을 보냈고, 오늘은 아침부터 왕국 연합 소속 세 왕국의 대표들도 도착했어. 그 말인즉, 그들은 드미트리 공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겠다는 의미겠지.’
감회가 새로웠다.
불과 몇 년 전.
드미트리는 동북쪽 일대의 돌연변이였다.
평민 출신의 가문을 귀족들은 인정해 주지 않았고, 조나단 기사단장이 드미트리에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동료들은 기겁하며 말렸다.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3성의 오라 검사면 미래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조나단 기사단장의 선택은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동료들에게 가끔 자리가 없냐는 연락이 올 정도로, 드미트리의 가치가 천정부지(天井不知)로 치솟았다.
‘로만 드미트리. 모두 그분 덕분이지.’
그도 알았다.
로메로 남작은 욕심이 그리 대단하지 않기에, 로만 드미트리가 판도를 뒤엎는 행보를 보여 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바르코와의 대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단 한 사내가 일으킨 변화.
사람들의 기질을 변화시켰고,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더는 평민 출신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단한 존재였다.
드미트리를 찾아온 사람들.
그들은 모두 한 사람을 만나 보길 원했고, 어느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자랑이 되었다.
‘조나단.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지금과 같은 상황일수록 기쁨에 취해서는 안 돼.’
정신을 다잡았다.
자신은 드미트리를 수호하는 검.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야 했다.
그렇게 방문객들을 꼼꼼히 살펴보던 그는,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눈앞의 사내.
그는, 드미트리를 축복하는 자리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 * *
그 시각.
로메로 남작은 두 아들을 불러들였다.
‘드미트리 공국을 선포하기 전에. 나는 후계 문제를 확실하게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 어중간한 태도로 모두에게 희망을 준다면, 분명히 공국이 설립된 이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겠지.’
골육상쟁(骨肉相爭).
그가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
어떤 아버지들은 아들들의 경쟁을 지켜보고 승자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다지만, 로메로 남작은 애초에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실 이미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 버린 상태였다.
어렸을 때부터 로드웰 드미트리가 가문을 위해 헌신한 세월이 있었지만, 단언컨대 지금 그를 후계자로 올렸다가는 가문 사람들의 반발이 정말 대단할 것이다.
그래서.
자리를 마련했다.
막내인 로렌 드미트리의 경우에는, 후계자 경쟁과는 거리가 멀기에 부르지 않았다.
똑똑.
“아버지,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렸다.
가문을 대표하는 두 형제의 모습에, 로메로 남작은 무거운 표정을 보였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이유는 가문의 후계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며칠 후면 드미트리는 공국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선포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드미트리의 세력이 강해졌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떠안아야 할 책임과 의무 또한 이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의 선택 한 번에 많은 목숨이 달려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드미트리의 후계 문제를 결정하고자 한다.”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이 자리.
드미트리의 가주로서 있었다.
로메로 남작은 로드웰 드미트리를 보았다.
전장에서 눈을 하나 잃은 아들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로서도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에게도 정당한 권리가 있었다.
만약 그가 자신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말한다면, 그때는 차라리 수뇌부들을 불러들여 공정하게 투표라도 진행해 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아버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로드웰 드미트리였다.
로메로 남작이 의아한 눈빛으로 보자,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겠습니다. 저보다는, 로만 형이 그 자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며칠.
전쟁이 끝나고 드미트리에 도착한 그는, 정말 많은 일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