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드미트리 공국 (4)
연무장 한복판.
로드웰 드미트리는 검을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한쪽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고, 불균형한 감각은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순간적으로 역한 기운이 일었다.
한때는 검이라는 도구가 신체 일부분인 것처럼 익숙한 시절이 있었건만, 지금은 자신의 육체마저도 통제를 온전히 따라 주지 않았다.
타닥.
앞으로 치고 나갔다.
수년간 단련되었던 근육이 폭발하며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가상의 적을 상대로 검을 휘둘렀다.
확-
간발의 차이.
공격이 빗나갔다.
감각으로 전해지는 정보는 적의 위치를 올바르게 판단했건만, 막상 검을 휘두르고 보니 상대의 위치가 조금 더 멀리에 있었다.
감각의 괴리였다.
머릿속은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감각을 활용했지만, 현재 정보를 전달하는 감각은 눈을 하나 잃었다는 이유로 다른 정보를 주었다.
스텝을 밟았다.
공격을 멈추지 않고 몰아붙였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공격은 없었다.
훅.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가상의 적과 바짝 붙어서 공방을 주고받았고, 실전이라면 목숨을 도외시하는 위험한 공격을 펼쳤다.
그런데 만족스러운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공격들은 적의 살을 얕게 베어 버리는 정도가 끝이었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가상의 존재가 자신의 심장에 칼을 박을 때면, 목을 베어 버릴 때면, 로드웰 드미트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죽어도 좋다.
딱 한 번만.
감각을 제대로 활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악착같이 시도한 마지막 공격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콰당!
흉하게 넘어졌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지만, 로드웰 드미트리는 넋을 잃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크로노스와의 전투.
목숨을 걸고 대전사 전투에 나섰던 일은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시간을 그때로 되돌린다면, 카이로의 승리를 위해서 망설임 없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다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들이 너무 가혹했다.
한평생 드미트리의 미래를 위해 살았건만, 후계자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본인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만한 결과를 보여 주었기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인생의 큰 목표를 잃었고, 더불어 불안전한 육체 상태는 검술마저도 퇴보시키고 말았다.
역했다.
후계자를 포기하겠다고 말한 것은 본인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생각을 정리한 결론이었는데도, 뒤늦게 찾아오는 후폭풍은 감정을 들끓게 했다.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았다.
자신의 마음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평온한 하늘을 바라보며, 로드웰 드미트리는 어느 순간부터 실없는 웃음을 보였다.
짜증이 났다. 사실 그 누구의 탓도 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눈을 잃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면. 로만 드미트리보다 후계자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면.
일련의 상황에서, 자신이 이토록 초라해질 이유는 없었다.
‘……추해지지 말자.’
탁.
검을 짚고 일어났다.
자신은 명예를 아는 사람이다.
형이 어떠한 이유로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린 것처럼 가문의 오점으로 남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후계자가 아니면 어떤가.
눈을 하나 잃으면 또 어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를 악물고는, 로드웰 드미트리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엉망이었다.
예전과 같은 날카로움은 잃었지만, 하나뿐인 눈에 적응하고자 최대한 노력했다.
햇볕이 따가웠다.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는 그때.
“그렇게 해서는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익숙한 목소리.
로만 드미트리가, 연무장 한편에 서 있었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네 몸은 오랫동안 정상적인 상태에서 검을 휘두르는 방식을 연습했다. 눈을 하나 잃은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제약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변화를 말한다. 지금처럼 무식하게 훈련하는 방법이 무조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무림 정벌 당시.
신체를 잃은 수하들이 많았다.
그들은 감각의 괴리를 경험했고, 수많은 사례는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오감(五感)을 차단하고 새로운 출발점에서 시작해라. 하나를 잃은 것에 방황하지 말고, 단 하나만 허용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연습한다면, 나중에 오감을 모두 개방했을 때는 시력의 공백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오감을 차단할 수 없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그렇게 해 줄 수 있다.”
솔직한 조언이었다.
최선의 해결책을 말했지만, 로드웰 드미트리의 반응은 달갑지 않았다.
“내가 왜 형의 말을 들어야 하지?”
오감의 차단.
어쩌면 정답일지도 몰랐다.
단시간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일지라도, 로드웰 드미트리는 형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건 감정의 문제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대단하고 후계자의 자리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어찌 되었든 간에 모든 것을 박탈당한 상황에서 형의 도움마저 받기는 싫었다.
괜한 반발심이었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검술 훈련에 매진했다.
“선택은 너의 몫이다. 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말.
상대가 자신의 말을 무시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을 말했다.
“드미트리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아마도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크로노스 제국, 발할라 제국에서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고, 당장은 아군이라고 생각하는 왕국 연합도 끝까지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내부에서 무너지고 곪아 버린다면, 우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울타리.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인연들을 받아들이면서, 로만 드미트리의 가치관도 변해 갔다.
전생에는 약육강식을 따랐다면.
현생은 실익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나는 드미트리의 미래를 위해 내가 신뢰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나 혼자서도 모든 일을 책임질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만으로는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겠지. 국경에서의 전투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드미트리가 공격을 당한다면, 제국이 병력을 이끌고 사방에서 공격해 온다면. 내가 없는 전장에서는 분명히 나를 대신할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무림 정벌.
혼자만의 힘으로 이룩한 결과가 아니다.
백중혁이 없는 자리에는 그를 대신할 사람들이 있었고, 후일 그들을 네 명의 왕(王)이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로드웰 드미트리. 너는 내 동생이고, 나의 혈육이다. 내가 없는 자리에 드미트리를 이끌 사람이 필요하다면…….”
신뢰의 관계.
서로의 교류가 필요한 그것은, 가끔은 한쪽의 맹목적인 감정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너이길 바란다.”
마지막 말.
로드웰 드미트리의 눈에 파란이 일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에게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형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 * *
시간이 흘러.
마침내 축제의 날이 밝았다.
사람들이 드미트리 성으로 몰려들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드미트리 공국의 선포식이 진행되었다.
다니엘 카이로.
그가 앞으로 나섰다.
“오늘은 카이로, 나아가 샐러맨더 대륙에 정말 뜻깊은 날이다. 최근 카이로는 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사건들을 겪었다. 반역도인 베네딕트 후작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크로노스 제국을 끌어들였고, 서부에서 일어난 전투로 인해 카이로의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 사실, 이전의 카이로는 최근과 같은 상황에서 타협을 택했었다. 우리가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먼저 고개를 숙였고, 한때는 그게 당연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미트리 가문은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했다. 카이로의 자긍심(自矜心)을 일깨우고, 나라가 나라답게 존재하기 위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간의 경험은 다니엘 카이로를 발전시켰고, 이제는 제법 사람들을 압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왕국 연합부터 시작해서 헥토르 왕국까지.
드미트리 공국의 개국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혔다.
“드미트리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새로운 출발을 할 자격이 있다. 나 다니엘 카이로는, 카이로 왕국의 국왕으로서 우방국인 드미트리 공국의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할 것이며, 앞으로 카이로와 드미트리를 같은 뿌리를 둔 운명공동체로써 그들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순간.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드미트리의 백성들이 열광했고, 타국의 주요 인사들은 다니엘 카이로의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다.
우방국.
속국의 개념이 아니었다.
동등한 위치에서, 드미트리 공국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카이로가 먼저 드미트리 공국을 개별적인 세력으로 인정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로 사람들이 열광하는 상황에서, 드미트리 공국의 앞날에 날개를 달아 주는 꼴이구나.’
누군가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니엘 카이로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그가 말을 마치고 로메로 남작이 무대에 올랐을 때, 드미트리는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로 물들었다.
* * *
파티가 진행되었다.
드미트리 가문은 내성에 귀족들을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하고, 바깥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먹거리를 풀었다.
그야말로 드미트리의 재력(財力)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할 텐데, 로메로 공작은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철광산.
안전망을 설치한 이후로, 철광산에서부터 창출되는 부의 규모는 일반적인 수준을 완전히 넘어섰다.
끝없는 산맥.
사람들이 몰랐던 광맥들이 발굴되었다.
일자리는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고, 드미트리가 안전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드미트리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인부들이 몰려들었다.
드미트리가 발전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수요와 공급이 완벽한 화합을 이루면서, 드미트리는 대규모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고로.
사람들에게 베푸는 정도로는, 드미트리의 재력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먹고 떠들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 로메로 공작과 대화를 나누던 왕국 연합의 대표가 은근슬쩍 새로운 주제를 언급했다.
“드미트리 공작님. 로만 드미트리의 나이도 어느덧 2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는데, 슬슬 혼사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가정이 안정돼야 큰일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때마침, 움베르토 왕국의 왕녀님도 혼기가 찬 상황인데, 이에 대해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움베르토 왕국의 대표.
베르디 백작이었다.
직접적으로 로만 드미트리와의 혼사를 언급하자, 로메로 공작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저 또한 로만이 좋은 짝을 찾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로만에게는 흠이 있습니다. 한 여인과 약혼을 했으면서도 끝을 보지 못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혼사를 주도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지금은 로만의 혼사보다도, 그가 위험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답을 피했다.
보통 귀족사회에서는 10대 후반만 넘어서도 짝을 찾는다.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명성 때문에 그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20대 중반에야 추진된 혼사는 무산이 되고 말았다.
드미트리 가문으로서는 깊게 생각해야 할 문제였지만, 로메로 공작으로서는 로렌스와의 사건으로 혼사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파혼은 너무나도 큰 문제였다.
이슈에 예민한 귀족들로서는, 파혼이라는 리스크를 감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흠이라니요. 겨우 20대의 나이에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쓰러트린 드미트리의 영웅인데, 파혼을 한 번 했다고 대체 누가 그걸 흠으로 취급한답니까. 영웅의 인생은 원래 굴곡이 있는 법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파혼을 흠이라고 여긴다면, 제가 로만 드미트리의 가치를 알아주는 현명한 여인과의 혼인을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이제는 드미트리 공국의 후계자인데, 파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왕국 연합 소속.
레드포드 왕국의 링고 자작.
오델리아 왕국의 마르텐 후작이었다.
각 왕국을 대표하는 그들이, 베르디 백작의 발언에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순간.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방금의 발언으로, 그들은 서로가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이 파티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녀석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넘보다니!’
‘빌어먹을 녀석들.’
‘어디서 감히!’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경쟁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