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운명의 수레바퀴 (1)
드미트리의 접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차를 마시고 있던 에드윈 헥토르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급하시군요.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의외였다.
로만 드미트리와 에드윈 헥토르의 마지막 기억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성벽을 무너트리고 헥토르의 병사들을 도륙하는 모습에, 에드윈 헥토르는 피눈물을 흘릴 것처럼 증오하는 눈빛을 보였다.
둘의 사이는 분명히 악연(惡緣)이라고 할 만했다.
아무리 국익을 위해서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해야 한다지만, 이렇게 평화롭게 안부를 물은 사이는 아니었다.
자리에 앉았다.
에드윈 헥토르는, 긴장을 풀기 위해서인지 가볍게 대화의 주제를 던졌다.
“일단 드미트리 공국의 개국을 축하드립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대단한 인물인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카이로의 내란을 단번에 정리하고 크로노스 제국마저도 무찌를 줄은 몰랐습니다. 헥토르에서도 로만 드미트리 님의 행보에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모두가 제국의 만행에 분노하지만, 로만 드미트리 님처럼 직접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곧바로 본론을 말씀하시죠. 우리가, 낯부끄럽게 서로 칭찬할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사실 저 또한, 우리가 전장이 아닌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그때의 일.
에드윈 헥토르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지금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억지로 웃음을 보였지만,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공포를 선사했다.
나라를 위해 국경을 넘었던 그때.
헥토르의 병사들은 일방적으로 도륙을 당했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패잔병들은 정말 춥고 힘든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심각한 내상을 입었던 버틀러는, 다시 검을 잡기 위해서 무려 1년간의 재활이 필요했다.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매일 밤 절망하고 좌절한다는 버틀러의 소식을 들으면서, 천공에서 지내던 에드윈 헥토르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헥토르는 쇠퇴하고 있었다.
자신이 전쟁을 부추기지 않았다면, 당장은 힘들었을지언정 그래도 패배의 아픔은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숨을 골랐다.
지난 악연.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경험해 보았기에, 더더욱 로만 드미트리를 만나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카이로와 헥토르의 전쟁. 그 이면에는 전쟁을 부추긴 흑막(黑幕)이 있었습니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충격적인 소식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에드윈 헥토르는 머릿속으로 정리한 말들을 내뱉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도 아시다시피, 헥토르 왕국은 매년 계속되는 흉작으로 전쟁을 결심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자 카이로를 공격했고,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직후. 우리는 흉작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처음에는 이상이 없었던 마을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이상 징후를 보였다.
“그 시작은 헥토르의 한 마을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흉작이 진행되던 마을인데, 전쟁이 끝나자마자 땅이 메말라 푸석푸석해지고 검게 변했으며, 인근에서 동물들의 사체가 지나칠 정도로 발견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헥토르 전역으로 퍼지는 이상 징후에, 저희는 헥토르를 괴롭히던 흉작에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네크로맨서의 저주였습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땅을 메마르게 한 존재들이, 목적을 이루자 더는 저주의 실체를 숨기지 않은 것입니다.”
저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정황이 보였다.
헥토르는 계속되는 흉작에 신이 나라를 버렸다고 생각했건만, 사실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을 때.
에드윈 헥토르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카이로와의 전쟁.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헥토르를 먹여 살려 보겠다고 전장에 나갔던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라는 괴물을 만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상대에게 그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았다.
멍청하게 흑막의 계획에 당한 것도,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헥토르를 다스리는 수뇌부들이 모자라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만.
진실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천공과의 거래로 마탑에 몸을 담은 그는, 지난 1년 동안 정말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과연 카이로와 헥토르의 전쟁으로 제일 이득을 본 세력은 어디일까?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그 세력은 크로노스 제국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를 대륙 정벌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그들이라면 카이로와 헥토르 중 누가 이기든 이득일 수밖에 없기에, 그들을 중점에 두고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야망이 극에 달했다고는 하나, 흑마법은 인류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이니까요.”
정확히 1년.
최근에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에드윈 헥토르를 드미트리로 이끌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크로노스 제국에서 헥토르와 같은 현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흉작인데, 크로노스 제국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한 한 인물의 실마리를 찾았을 때, 우리는 그들의 흉작이 ‘실험’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증거는 아니었다.
흉작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은 심부름꾼에 불과했고, 증거로 삼을 만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에드윈 헥토르는 확신을 얻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드미트리를 방문한 목적을 밝혔다.
“우리의 예상대로였습니다. 흑막의 정체는, 바로 크로노스 제국이었습니다.”
* * *
두 왕국의 전쟁.
그로 얻을 실익은 뻔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다.
크로노스 제국이 크게 힘을 들이지 않더라도,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여서 카이로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실제로 남부 전선에서의 전쟁은 크로노스의 이득으로 직결되었다.
헥토르 왕국은 불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크로노스 제국을 끌어들이려고 했었고, 결과와는 상관없이 카이로 왕국으로서는 한동안 서부 전선보다 남부 전선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카이로는 숨통이 조였다.
헥토르가 흉작에 메마른 것처럼, 내외부에서 이루어지는 분란은 카이로를 점점 약하게 했다.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사람들은 크로노스 제국이 눈앞에서 벌이는 만행에만 집중합니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대륙 정벌을 입에 올렸기에, 직접적으로 국경을 침범하는 일만 아니라면 다행이라고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다릅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영악하게 방해가 되는 존재들을 하나씩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최우선의 목표는 카이로입니다. 그들은 네 왕국이 힘을 합친 왕국 연합과는 달리, 비교적 힘을 들이지 않고 쓰러트릴 수 있는 카이로를 전쟁의 교두보로 삼고자 합니다. 카이로, 헥토르. 그렇게 두 왕국을 무너트리고 대륙의 북부를 완전히 장악한다면, 그때는 대륙을 반으로 갈라 본격적인 정벌을 시작하겠지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공론화하지 않고 저를 찾아왔습니까? 흑마법은 민감한 주제기에, 크로노스 제국이라도 해도 완벽하게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제국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아니요. 어쩌면 대륙 전쟁을 앞당기는 시발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발할라 제국의 존재로 그들의 야망을 억누르고 있지만, 사실상 지금 당장 전쟁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 제국을 제외한 왕국 연합의 힘만으로는, 제국의 야망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증거는 빈약했다.
크로노스는 발뺌하면 그만이고,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에드윈 헥토르는, 로만 드미트리를 먼저 떠올렸다.
“우리의 관계는 시작부터 잘못되었습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헥토르에 있고, 이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크로노스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드미트리와 헥토르가 힘을 합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목적이었다.
동맹.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바랐다.
“수년간, 헥토르의 백성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메마른 그들의 얼굴이 크로노스 제국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그들과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음을 느낍니다. 지금도 심장이 뜨겁습니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헥토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리려는 제 계획에 동참해 주십시오.”
다소 일방적인 대화였다.
에드윈 헥토르는 그간 쌓인 울분을 토해 냈고, 그의 말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모든 진실을 듣고도.
로만 드미트리의 표정은, 너무나도 침착했다.
* * *
묘한 분위기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찻잔을 내려놓고는 에드윈 헥토르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남부 전선에서의 전투 이후. 저는 대륙에 제 사람들을 퍼트렸습니다. 사실 헥토르와 카이로의 전쟁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고, 어쩌면 그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드윈 헥토르 님의 말처럼. 두 국가가 피를 흘림으로써 이득을 본 존재가 너무나도 명확했습니다.”
하오문.
정보 길드의 사람들이 대륙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들은 각종 정보를 모았고, 그렇게 퍼즐을 맞추어 간 정보들을 흑마법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헥토르의 흉작.
인위적인 냄새를 풍겼다.
에드윈 헥토르가 조사한 것처럼 그것이 명확하게 크로노스 제국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다는 추론 정도는 가능했다.
사실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인간이 어떻게 흑마법을 사용하냐는 부분에서 분노를 토로하는 것 같았지만, 무림에서는 그보다 더한 일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체로 만들어 내는 강시.
사람의 기를 빨아들이는 괴물들.
본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인간으로서 살아가길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라면 분명히 대륙 정벌의 야망을 실행에 옮길 테고, 헥토르 왕국의 일처럼 드미트리를 무너트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떠나, 드미트리가 왜 헥토르가 주도하는 계획에 동참해야 합니까?”
“……제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의미입니까?”
“말은 똑바로 합시다. 정확히는, 헥토르가 그런 제안을 할 입장이 되느냐고 묻는 겁니다.”
눈빛이 바뀌었다.
전장에서의 모습.
로만 드미트리가, 에드윈 헥토르를 잡아먹을 것처럼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헥토르 왕국은 크로노스의 의도에 따라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리고 기습적으로 카이로 왕국을 공격했는데도, 목적을 전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헥토르의 나약함을 뜻합니다. 오랜 흉작으로 헥토르는 내부에서부터 곪았고, 제대로 먹고 즐기지 못한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병사로서의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잔인한 진실이었다.
애써 외면하는 그것을, 로만 드미트리는 무참히 들추었다.
“카이로와의 전쟁이 끝나고 의도적이었던 흉작도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메마른 땅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헥토르 왕국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백성들이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이 천공에 들어가면서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헥토르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습니까? 당장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헥토르는 넉넉한 군량과 그들을 무장시킬 완벽한 환경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왕자님. 당신의 진심을 모르지 않습니다.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복수심은, 크로노스 제국을 어떻게든 무너트리고 싶겠지요. 하지만…….”
이번 만남.
순조로울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대화는, 두 사내의 관계처럼 시작부터 틀어지고 말았다.
“제가 알고 있는 뻔한 소리 말고, 드미트리가 당신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근거를 말씀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