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운명의 수레바퀴 (2)
에드윈 헥토르는 당혹스러웠다.
크로노스 제국의 음모를 알고 있다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공공의 적.
크로노스 제국을 타도(打倒)하겠다는 계획인데, 왜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반응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드미트리 공국은 왕국 연합을 초대해 앞으로의 미래를 말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과의 사건에서 왕국 연합을 끌어들인 것처럼, 제국의 야망에 대항하기 위해 주변국의 힘이 최대한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증명했습니다.”
드미트리와 헥토르.
둘의 목적이 부합했다.
그렇다면, 에드윈 헥토르가 내민 손길을 반기며 맞잡는 것이 옳았다.
“헥토르가 나약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겨우 1년만으로는 흉작으로 인한 피해와 전쟁의 여파를 해결하지 못했고, 지금도 헥토르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단 한 명이라도, 크로노스 제국을 타도하는 일에 뜻을 보태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드미트리로서는 이득인 일입니다. 당신들이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전쟁을 같이 떠안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헥토르의 계획은, 드미트리가 왕국 연합을 끌어들인 일의 연장선이지 않습니까.”
집무실 밖.
파티장에서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잔을 부딪치며 왕국의 미래를 말하는 그들은, 공동의 적을 두고 힘을 합치자면서 서로 웃었다.
이미 합의가 된 바다.
겉으로는 드미트리와 헥토르의 연대가 이루어졌고, 에드윈 헥토르는 그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거절은 예상할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전장에서도 예상하기 힘든 인물이었지만, 전장 바깥에서도 이토록 애를 먹이게 할 줄은 몰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맞습니다. 제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왕국 연합은 뭉쳐야만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은 왕국 연합을 믿습니까? 지금 당장은 서로의 안위를 위해 등을 맡길지 몰라도, 그러한 상황이 끝까지 지속한다고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아군은 없다.
그것을 전제로 한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확실한 관계를 위해 서로를 위한 명확한 이득을 바랐다.
“지금부터 제가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왕국 연합이라는 모래성을 어떻게 무너트릴지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인간관계는 복잡하다.
자신의 사람은 확실한 믿음을 보여 준다면, 울타리 바깥의 존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했다.
동맹, 연합.
그러한 관계를 견고하게 형성하기 위해서는, 목적뿐만 아니라 서로의 관계가 이득이 된다는 확신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헥토르는 확실한 목적만 있을 뿐. 대세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아니었다.
“최근, 움베르토 왕국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장 최전방에서 크로노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번번이 일어나는 전투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있고, 그로 인한 피로도로 내부에서 불만이 새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제가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일단 움베르토부터 회유하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에라도 움베르토가 그 회유에 넘어간다면, 왕국 연합은 내부에서부터 일어난 균열에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가능성.
“레드포드 왕국은 국왕이 도박에 빠졌습니다. 나라의 안위는 뒷전에 두고 국고를 흥청망청 탕진했고, 그 밑에 신하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결국 골든 뱅크에 손을 댔습니다. 아시다시피 골든 뱅크는 대륙 전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들이 압박을 시작한다면, 빚에 쪼들리던 레드포드 왕국은 새로운 해결책을 찾으려 할 테고, 그것이 배반일지도 모릅니다.”
둘의 가능성.
“그렇다고 프랑크와 오델리아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전 카이로와 마찬가지로 권력 체계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프랑크가 피닉스의 지원을 소홀히 한 것도, 제국을 따르는 세력들이 국왕을 부추기는 바람에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카이로는 베네딕트 후작과 귀족파를 숙청하면서 안정을 찾았지만,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넷의 가능성.
마지막으로.
“헥토르는 어떻습니까. 왕국 연합의 네 왕국은 크로노스가 공략할 충분한 약점이 있습니다. 헥토르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이 극한에 달한다면. 혹은, 발할라가 갑자기 전쟁을 선포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버틸 자신이 있습니까?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복수하겠다고 말하는 당신들이, 변화하는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저력이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왕국 연합.
모래성에 불과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런 불안한 관계를 형성했다.
“드미트리는 왕국 연합과의 관계를 먼저 깨트리는 실수를 범할 생각이 없습니다. 헥토르와도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바라지만, 에드윈 헥토르 왕자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과도한 믿음의 대가는 치명적입니다. 주변국들이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전제로 깐다면 드미트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겠지만, 서로 믿음을 준다면 그때는 문제가 다릅니다. 헥토르에게 바라는 역할이 있기에. 우리는 그 공백이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잡한 문제였다.
동맹은 형성하되, 진심은 주지 않겠다.
진심을 토로하는 에드윈 헥토르에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에드윈 헥토르를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헥토르 왕국의 진심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다른 왕국들과는 다르게, 크로노스 제국에 복수해야만 한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는 헥토르는 아군으로 받아들일 명분은 충분합니다. 문제는 드미트리가 진심으로 헥토르를 대할 가치가 있느냐입니다. 이는 헥토르가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만약 헥토르가 지금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입으로만 크로노스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한다면, 드미트리는 헥토르를 진심으로 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차피 헥토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미비하기에. 차라리 스스로를 믿고 따르는 것이 리스크를 감당하지 않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앞으로의 계획.
헥토르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한다면, 그때부터는 헥토르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해 볼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계획의 주체는 드미트리라는 것이, 로만 드미트리의 주장이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드미트리가 헥토르와 진심으로 손을 잡아야 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 * *
로만 드미트리의 말.
옳았다.
헥토르는 나약했다.
그런데도, 에드윈 헥토르는 주제도 모르고 먼저 계획을 운운했다.
‘……생각해 보면 크로노스 제국이 흑막의 주체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크로노스.
그들은 겉으로는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뒤로 음모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앞뒤가 똑같았다.
항상 한결같이 대륙 정벌을 입에 올렸다.
헥토르의 땅을 메마르게 한 것은 분개할 만한 일이나, 정치적으로 대놓고 헥토르를 무너트리려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원래 그런 녀석들이었다.
진실은 확신을 주었을 뿐.
감당해야 할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헥토르 왕국은 계획을 실행할 힘이 없으면서도, 입으로만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리자고 떠들었다.
“참 잔인하십니다.”
허탈하게 웃었다.
진실.
가혹할 정도로 참담했다.
에드윈 헥토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도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헥토르는 몰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고, 이대로라면 누군가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복수가 간절한지도 모릅니다. 헥토르의 저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헥토르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크로노스 제국에 복수하고, 그들의 재물로 왕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심도 있습니다.”
헥토르의 가치.
초라했다.
딱 한 번 불태울 힘은 있어도, 그게 대단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헥토르는 계획을 주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대륙 전쟁이 발발하고 왕국 연합이 승리하게 된다면. 헥토르는 그 자리에 있겠지만, 헥토르의 힘으로 승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수를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헥토르의 사람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쓰러져 쓸쓸하게 죽어 나간 그 순간부터, 헥토르는 크로노스와 공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드미트리의 진심을 끌어낼 근거를 물으셨습니까? 단 하나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헥토르 왕국의 왕자로서, 크로노스 제국을 무너트리는 일이라면 제 목숨을 걸고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우리가 주인공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크로노스를 무너트리고, 헥토르의 미래를 약속해 준다면. 가장 최전방에 헥토르가 있겠습니다. 전쟁은 소모전이고, 드미트리로서도 길을 열어 줄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로만 드미트리.
그와의 대화로 확신했다.
이렇게까지 치밀한 사내라면,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는 이보다 완벽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희생을 자처했다.
“헥토르가 크로노스의 전력을 백 분의 일만 줄여도 드미트리에는 득이 되는 일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드미트리가 헥토르를 도와주십시오. 많은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병사들이 먹을 군량과 무장을 내어준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크로노스를 상대하는 원동력으로 삼겠습니다. 명분만 있고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 전력이라면, 우리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겉만 번지르르한 왕국 연합보단. 확실한 목표가 있는헥토르가 드미트리의 계획에는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당돌한 제안이었다.
가치를 묻자, 역으로 가치를 부여해 주길 바랐다.
에드윈 헥토르의 눈빛이 독기(毒氣)로 물들었다.
잔인한 진실을 파헤치면서, 그는 헥토르 왕국의 왕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다.
크로노스를 무너트리지 않는다면, 헥토르는 어차피 끝이었다.
그때였다.
“방금 한 약속. 그 말을 명심하십시오.”
완벽한 아군을 뜻하진 않았다.
다만.
헥토르를.
아니, 에드윈 헥토르를 받아들일 가치 정도는 확인했다.
“드미트리는 앞으로 헥토르가 전력을 되찾도록, 음지에서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 * *
카이로에 이은.
두 번째 동맹을 형성했다.
겉으로만 떠들어 대는 왕국 연합이 아니라, 헥토르는 앞으로의 계획에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물론.
언제나 변수는 대비하겠지만, 헥토르의 의미가 이전과는 달라졌다.
떠나기 전.
에드윈 헥토르가 말했다.
“전장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난생처음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헥토르는 전쟁에서 패배했고, 지난 1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완벽하게 준비한 계획이 어째서 실패했을까.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의 존재로 인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 사람들은 말합니다. 상대를 잘못 만났다고. 하지만 크로노스를 상대하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없기에, 저는 그런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국의 왕자.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에드윈 헥토르의 삶은, 숨이 막힐 정도로 치열했다.
“천공에서 지내며 스스로가 변수를 만들어 내는 인물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헥토르는 지금보다 강해질 것입니다. 변명 따위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헥토르의 가치를 높일 테니, 로만 드미트리 님은 우리를 위한 무대를 만들어 주십시오.”
이를 악물었다.
그것이.
에드윈 헥토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접객실을 나서는 그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가 떠나간 자리를 보았다.
‘헥토르 왕국. 그들은 에드윈 헥토르 단 한 명만으로도, 앞으로의 계획에 끌어들일 가치는 충분하다.’
육체 너머.
그 안을 보았다.
에드윈 헥토르는 지난 1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고,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
내부에서 들끓는 폭발적인 마력.
펠렉스를 통해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에드윈 헥토르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았다.
그의 성장세.
폭발적이었다.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 에드윈 헥토르는 반드시 제 역할을 해낼 인물이었다.
재밌었다.
적에서 아군이라니.
운명의 수레바퀴가, 둘의 관계를 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로만 드미트리의 운명이 이끄는, 또 다른 관계가 운명의 소용돌이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