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칠흑같이 어두운 밤 (4)
비상벨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로만 드미트리는 탁자에 걸터앉아, 브라칸의 자료를 살펴보며 말했다.
“만약 에코르셰가 암살에 실패하고 그 대가로 멸망한다면. 암살 업계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브라칸은 로만 드미트리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서 비상벨을 눌렀는지, 왜 도망치지 않는지, 그로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소문대로 호전적인 인물이다. 보통은 암살을 당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는 없는데, 복수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크로노스 제국의 국경을 넘어선 미친놈이다. 방금의 질문으로 보았을 때, 그의 목적은 에코르셰일 터. 그렇다면 아직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는 있다.’
머리를 굴렸다.
상대의 숫자는 가늠할 수 없다.
집무실 밖에 생각보다 많은 적이 몰려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았다.
이유는 바로 하루 전에 받았던 보고의 내용 때문이었다.
브라칸은 드미트리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정보 길드에 의뢰를 넣었고, 어제 그와 관련한 내용을 전달받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방은 불명(不明).
대신.
그를 따르는 수하들은 드미트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크리스, 케빈, 헨더슨 등등은 모두 드미트리에 있었고, 세간에 알려진 병력이 따로 움직였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다.
그 말인즉.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에코르셰가 상황을 파악하고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한 판단이라고 가정한다면, 얼추 상황이 맞았다.
무모했다.
일반적인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그간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준 행보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가설이었다.
브라칸이 말했다.
“……에코르셰가 멸망한다면, 아마 암살 업계가 발칵 뒤집히겠지. 에코르셰는 2대 암살 길드인 블랙 캐슬(Black Castle)과 화이트 문(White moon)을 제외하고는 단연코 최고의 암살 길드다. 그 말은, 네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다.”
태도를 바꾸었다.
일부러 몸을 부풀렸다.
상대의 자존심을 긁어내며, 호승심을 일으켰다.
“네 말대로 비상벨은 내 수하들을 불러내는 신호다. 이 밖에는 수십의 암살자들이 있는데,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로만 드미트리. 네가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암살자들뿐만 아니라 크로노스의 병력도 몰려들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이었다.
호승심이 강한 인물들은.
지금과 같은 발언에, 도망치겠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증명해 보이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상황은 계획대로였다.
집무실에 들이닥친 에코르셰의 길드원들이, 머릿수를 앞세워 로만 드미트리를 제압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에코르셰의 본거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약 서른 명. 임무를 나간 병력을 제외한다면, 그것이 너희가 현재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겠지. 브라칸. 나는 부디, 그것이 너희의 전력이 아니길 빌겠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미 에코르셰의 전력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브라칸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타다닥.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기다렸다는 듯이, 로만 드미트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길드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처음 목격한 장면은, 로만 드미트리와 땅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브라칸의 모습이었다.
“마스터님!”
“공격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암살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은 사방에서 단검을 뿌려 대며 방어를 유도한 뒤에, 동시다발적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잘 맞추어진 합공(合攻)이었다.
한 명은 머리를, 한 명은 오른쪽을, 한 명은 왼쪽을, 또 다른 한 명을 다리를.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암살자들도, 동료들이 달려드는 틈을 노려서 단검을 던졌다.
위협적인 광경이었다.
죽음에 한걸음 발을 들이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검을 휘둘렀다.
파파팍.
단검이 모두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달려드는 암살자의 머리를 움켜쥐더니, 그대로 끌고 와서 얼굴을 벽에 박아 버렸다.
콰직.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빨간 물감을 흠뻑 적신 붓처럼 흔적을 남기는 시체를 뒤로하고는, 몸을 틀어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상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한 번의 번뜩임이 상대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바짝 붙이며, 주먹질 한 번에 상대의 얼굴을 박살 냈다.
퍽!
인간의 두개골은 단단하다.
일반적인 공격에는 부서서지 않을 그것이, 로만 드미트리의 괴력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좁은 공간.
암살자들과 로만 드미트리가 뒤엉켰다.
암살자 중에는 오라를 사용하는 인물들도 있었고, 그들은 좁은 공간을 활용하는 것에 스페셜리스트였다.
콰르르르르릉.
오라가 폭발했다.
선두에서는 오라를 다루는 암살자들이 달려들었고, 몇몇 인물들은 벽을 타고 이동하며 양쪽 사각지대를 노렸다.
단검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던져 댔다.
보통은 상처를 한두 개씩 허락해야 할 타이밍이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도 존재감이 흔들리지 않았다.
세 방향으로 치고 들어오는 단검.
피해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방향을 예상하고 검을 찔러넣은 암살자는, 의도를 이루기도 전에 머리가 날아갔다.
옆에서 득달같이 달려드는 암살자들의 최후도 다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한 명의 육체를 끌어와서 단검의 방패로 삼았고, 또 다른 녀석은 발차기를 뻗어 얼굴을 부숴 버렸다.
사방에 피가 튀었다.
벽면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암살자들의 피가 공간을 붉게 물들였다.
하나둘.
시체가 쌓여 갔다.
처음에는 자신감을 보이던 암살자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는 것을 떠나서,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라를 단 한 번도 발현하지 않았다.
온전히 육체의 힘으로. 이 많은 암살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일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하지만 암살의 세계에서 후퇴란 없었다.
가슴 속에 죽음을 묻어 두고 사는 사람들은, 한 번의 물러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서걱-
마지막 암살자마저도 머리가 날아갔다.
겁에 질린 얼굴이 하늘에 떠올랐고, 머리를 잃은 몸통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단 5분.
에코르셰가 자랑하는 암살자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 * *
브라칸은 말을 잃었다.
충격적이었다.
전투 도중에 하나 남은 팔로 공격을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압도적인 무력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특별히 오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데도, 로만 드미트리가 상대를 어떻게 쓰러트리는지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확실한 것은.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질 때면, 어김없이 암살자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저벅저벅.
로만 드미트리는 브라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걸음을 옮겼고, 브라칸을 지나서 뒤에 있는 금고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서걱.
단번에 베어 버렸다.
에코르셰의 금고는 강철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법사들의 강화 마법으로 물리적인 힘으로는 절대 파괴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허무할 정도로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강철이 떨어져 나가며 안에 보관하고 있던 내용물이 드러났고, 로만 드미트리는 그 서류들을 확인했다.
‘에코르셰는 크로노스 제국을 주 고객으로 두고 있는 암살 집단이다. 나에 대한 암살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떤 대상을 목표로 하는지에 따라 크로노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겠지.’
팔락.
서류를 넘겼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을 지나서, 시선을 사로잡는 내용이 나왔다.
[1급 암살 칼데론 드레이크]
[1급 암살 론돈 백작]
두 인물.
로만 드미트리가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칼데론 드레이크는 드레이크 가문의 장남인데, 그의 아버지인 드레이크 후작은 움베르토 왕국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군부(軍部)의 수장.
계속되는 전쟁으로 나라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끝까지 크로노스와는 타협이 없다고 주장하는 매우 강직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드레이크 후작이 전장에서 무릎을 꿇는 순간, 움베르토 왕국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것이라고.
그런데 만약.
드레이크 후작의 아들이 죽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지 않아도 크로노스와의 타협을 말하는 이들이 기승을 부리는데, 드레이크 후작으로서는 매국노들의 소행이라고 확신할 것이 분명했다.
움베르토 왕국을 무너트리는 정말 간단한 방법이었다.
실세 중 실세인 드레이크 후작을 처리하는 것이 아닌데도, 크로노스 제국은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움베르토 왕국을 내부에서부터 무너트릴 수가 있다.
그리고 론돈 백작.
레드포드의 대부호인 그는, 구두쇠라는 악명과는 다르게 음지에서 나라를 도와주는 영웅이었다.
국왕이 만들어 낸 막대한 빚.
그것을 론돈 백작이 해결하려고 동분서주 움직였다.
골든 뱅크와의 마찰이 시작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라도 나라에 번진 불길을 막아 냈다.
이미 그런 방법으로 돈을 쏟아부은 재산만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만약 그가 쓰러진다면, 움베르토와 마찬가지로 레드포드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두 인물의 이름.
그것만으로도 크로노스의 의도가 보였다.
그들은 직접적인 전쟁으로 적들을 쓰러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일단 상대의 분란을 유도했다.
천천히.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다면.
왕국 연합이 모두 힘을 합친다고 할지라도, 크로노스의 공격을 막아 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화르르륵.
삼매진화(三昧眞火)로 서류를 불태웠다.
그러자.
“……제가 살아남을 방법이 있습니까?”
브라칸이었다.
적대적인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패배를 인정한.
너무나도 공손한 태도에, 로만 드미트리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서걱.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 * *
그 시각.
코르트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달렸다.
일주일간의 고문으로 몸은 성하지 않았고, 땅을 내디딜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에코르셰의 본거지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은 몸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를 악물었다.
달리고, 또 달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상처 부위를 헤집었지만, 코르트는 강한 열망으로 고통을 점차 잊어 갔다.
빠드득.
‘로만 드미트리. 반드시 복수해 주마.’
암살자로 살아가며.
은혜는 잊을지언정, 원한은 절대 잊지 않았다.
자신을 살려 둔 것.
엄청난 실수였다.
코르트는 크로노스 제국이 아니라, 어느 한 영지에 도착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꼴이야?!”
암살 길드 단테(Dante)의 카이로 지부였다.
특급 암살자 단테가 수장으로 있는 집단인데, 그들은 에코르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상황에 따라 서로 힘을 합치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안가(安家)를 내어주는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단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코르트는 자신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인데, 그의 몰골이 너무나도 처참했다.
“설명할 시간 없어. 일단 마법 통신기를, 마법 통신기를 가져와!”
드미트리에서 크로노스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도보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코르트는 마법 통신기를 활용해서 상황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최선의 판단이었다.
화상 화면까지 제공하는 통신기를 가져왔고, 곧바로 에코르셰에 연결했다.
“연결이 되지 않는데?”
“썅!”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에코르셰가 받지 않는다면.
차선책은 의뢰인이었다.
[꼴을 보아하니, 임무에 실패했나 보군.]
화면 너머.
의뢰인, 찰튼 남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코르트는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저희의 계획을 예상하고 함정을 팠습니다! 드미트리를 공격한 에코르셰의 암살자들은 모두 전멸한 상태고, 로만 드미트리는 지금 에코르셰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서 크로노스 제국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찰튼 남작님.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크로노스의 병력을 움직여 에코르셰의 본거지로 보낸다면,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소리쳤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내뱉는 코르트의 말에도, 찰튼 남작의 표정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그게 끝인가?]
순간.
코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단 하나의 가능성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설마.”
크로노스 제국.
그들은 애초에, 에코르셰의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