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칠흑같이 어두운 밤 (5)
코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싶었지만, 상대가 크로노스 제국이기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우리를 미끼로 쓰신 겁니까?”
[미끼라니. 말을 섭섭하게 하는군. 이번 거래는 조금의 강압성도 존재하지 않았어. 너희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확인했고, 거액의 보상에 덜컥 받아들였지. 만약 예정대로 너희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면, 우리는 처음 약속했던 보상을 그대로 지급했을 거야.]
정당한 거래였다.
다만.
찰튼 남작으로서는, 일을 확실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잘 생각해 봐. 로만 드미트리의 암살은 크로노스 황제 폐하가 공표한 사실이야. 대륙 모든 사람이 우리가 로만 드미트리의 목숨을 원한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게 만약 실패한다면 제국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우리로서는 그저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야. 에코르셰가 임무를 완수하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너희만 믿기에는 이번 일이 다른 때보다 중요하다는 게 문제였지.]
로만 드미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파비오 백작과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죽이는 과정에서 그는 압도적인 무력을 보였고, 그간의 행보를 보았을 때 드러난 것보다 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계획을 철저하게 구상할 필요가 있었다.
최우선은 에코르셰에게 맡기되, 진짜 무기는 따로 준비해 두었다.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크로노스의 체면이 걸린 문제를, 에코르셰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지 않겠나.]
“……이런 씨.”
욕이 치밀었다.
상대의 주장.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애초에 따로 무기를 준비했다면, 처음부터 에코르셰와 힘을 합쳐서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말만 그럴듯할 뿐. 그들은 에코르셰를 화살받이로 사용했다.
제국의 힘을 아끼기 위해서, 에코르셰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지로 등을 떠밀었다.
그때였다.
뭐라고 말하려는데, 속에서 울컥 핏물이 올라왔다.
“쿨럭.”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루카스가 먹인 액체.
독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효과를 발현했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을 의미했다.
‘내가 드미트리에서 벌어진 사실을 알릴 최소한의 시간을 계산했단 말인가.’
확실했다.
자신은 도보로 이동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법 통신기를 이용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드미트리는 애초에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사실을 계산에 두었다.
생각해 보면 루카스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드미트리를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알리길 바랐고, 자신이 죽는 모습을 바라보는 단테는 그 선례를 기억하는 증인으로 남을 것이다.
정신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찰튼 남작의 발언과 자신에게 들이닥친 상황에, 코르트는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빨개진 눈으로 찰튼 남작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자신이 경험한 드미트리는, 크로노스의 수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생각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였지만, 찰튼 남작을 보니 진실을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어디 한번 알아서 해 보라고.
고통에 눈을 부릅뜨더니, 그대로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았다.
[이런.]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는 찰튼 남작.
코르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암살자의 초라한 최후였다.
* * *
로만 드미트리는 도시를 벗어났다.
이제는 카이로로 돌아갈 차례였는데, 한참을 이동하던 로만 드미트리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나와.”
그 말에.
어둠이 새어 나오듯, 어둠 속에서 의문의 존재들이 나타났다.
“언제부터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
탁하고 기분 나쁜 음성.
십수 명이 넘어가는 인원은 하나같이 검은 천을 얼굴에 두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흰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맸고, 눈빛만으로는 어딜 바라보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앞뒤.
나무 위.
사방을 둘러쌌다.
자세를 잔뜩 낮춘 그들은, 언제든지 달려들기 위해 단검을 역으로 쥐었다.
그들의 행색.
크로노스 제국에는, 그들과 똑같은 조건을 갖춘 세력이 존재했다.
‘크로노스의 어둠을 먹고 자라는 존재들. 열 개의 검(劍)이 크로노스의 빛나는 영광을 대표한다면, 세 개의 그림자는 크로노스의 추악한 현실을 의미한다. 예상대로군. 크로노스 황제는, 나를 죽이기 위해 가장 위험한 힘을 동원했다.’
그림자들.
그들은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에 반하는 세력들은 항상 그림자의 공격을 받았고, 잔인하게 죽어 나간 사람들이 그림자의 존재를 증명했다.
사실 세 개의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도 확실한 사실은 아니었다.
예전에 그림자들이 대륙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있어서 그렇게 추측할 뿐이지, 그들이 얼마큼의 규모를 갖추었고,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눈앞의 상황.
예상했던 그림이었다.
크로노스.
유일무이(唯一無二)하길 바라는 존재들.
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황제가 암살을 공표하는 순간, 그들은 에코르셰와 같은 단체에 성패를 온전히 떠맡길 리가 없었다.
그건 강자의 생각을 이해한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림자의 존재는 거론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국경을 넘었다.
상대가 자신이 드미트리의 영역을 벗어나길 바란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에코르세에게 복수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가 아닌데도, 지금 당장 한 번의 선례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에코르셰의 본거지에 불을 질렀다.
브라칸의 머리는 길거리에 매달았고, 단테의 증언에 따라 그것이 드미트리의 소행임이 알려질 것이다.
그건.
명확한 메시지였다.
앞으로 드미트리를 적대할 암살 세력이 있다면, 그 대가를 기억하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은.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자신과의 전쟁이 어떤 의미인지를 증명할 차례였다.
언제부터 알았냐는 물음.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처음부터.”
그 순간.
그림자들이, 일제히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발검.
검을 뽑았다.
번뜩이는 검이 가장 먼저 달려드는 그림자를 베어 버리자, 그의 몸이 마치 연기처럼 흩어졌다.
파사사삭.
마법은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힘.
그림자의 육체는 몇 걸음 나아간 위치에서 다시 원래대로 합쳐졌고, 단검에서 어둠으로 물든 오라가 피어오르며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순간적으로 격렬한 충동이 일었다.
그림자들은 번갈아 가면서 몰아붙였고, 사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으면서도 로만 드미트리는 틈을 노렸다.
‘섬전(閃電).’
번뜩.
적의 목을 베었다.
절대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다.
만약에 연기로 변하는 기술이 의지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똑같았다.
목 부근에서 연기처럼 육체가 흩어졌고, 그림자의 새카만 눈은 로만 드미트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본인들의 안전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목숨을 잃을 공격에도, 그들은 역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콰앙!
콰르르르릉.
오라가 격렬하게 부딪쳤다.
일대 다수의 대결에도 로만 드미트리가 밀어붙이자, 그림자들이 뒤로 빠지면서 무언가를 행했다.
확.
파파팟.
어둠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괴물의 촉수와도 같이 로만 드미트리의 몸을 휘감았지만, 마나를 일으켜 순간적으로 침투하는 암흑의 오라를 없애 버렸다.
매우 기분 나쁜 힘이었다.
일반적인 오라와는 달랐고, 접촉하는 부위에서 힘을 빨아들이는 흡(吸)의 능력을 보였다.
한때.
무림에서도 그와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현세에 허락되지 않는 힘을 사용하며, 살아 있는 인간들의 힘을 빨아들이는 존재들.
그림자들의 힘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상적인 힘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다.
‘크로노스 제국. 그들은 악(惡)과의 타협을 받아들였다.’
황제.
그는 대륙 정벌을 바랐다.
정점에 오른 인간으로서 그의 욕망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크로노스 제국은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어섰다.
헥토르 왕국의 일.
그들은 헥토르를 말려 죽이겠다는 의도로 땅의 생기를 없애 버렸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고, 헥토르 왕국은 살기 위해서 전쟁을 택했다.
흑마법.
당시에 사용되었던 힘이다.
그림자의 정체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흑마법사를 보유한 것이 틀림없었다.
역사는 말했다.
악마의 힘을 발현하는 흑마법사들은 인간이길 포기한 존재들이고,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애초에 흑마법을 구성하는 근간은 피와 죽음에 있지 않은가.
명백한 악.
크로노스에 악이 싹을 텄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림자가 어떤 힘을 사용하든, 그것의 근간이 무엇이든, 그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생의 그에게.
악은 익숙했고, 악을 짓밟고 올라선 그를 천마라고 불렀다.
파팟.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목숨을 도외시하는 공격.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덤벼드는 그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퍽-
강렬한 파열음.
그림자의 육체가, 처참하게 부서져 버렸다.
* * *
그림자가 찢겨 나갔다.
고깃덩어리로 변한 그것이 바닥에 흩뿌려졌고, 검은 기운이 꿀렁이며 서로 다시 이어 붙으려 했다.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것을 짓밟으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콰직.
앞선 공방.
적들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림자들은 양쪽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고, 몇 번 공방을 주고받더니 번뜩이는 검이 그들의 가슴팍을 베었다.
연기가 피처럼 흩뿌려졌다.
미지(未知)의 힘이 서로 뒤엉키려는 순간, 번뜩이는 검이 한 번 더 연기를 가르자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검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그림자들.
그들은 불사신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연속되는 죽음에 그들은 황급히 로만 드미트리에게서 떨어졌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음성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들의 육신을 베어 버리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아닌데도,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은 그들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림자들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들은, 이대로는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없음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
계산한 것 이상이었다.
그림자들은 따로 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아닌데도, 동시다발적으로 암흑의 오라가 강하게 피어올랐다.
화르르르륵.
그들의 존재가 타올랐다.
일전에 경험했던 힘.
선천(先天)의 기운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전보다 배는 강해진 기세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개개인의 힘은 구스타보 기사단장보다 약하다. 하지만 일대 다수의 대결에서, 그림자들은 구스타보 기사단장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
강했다.
현생을 살아가면서, 그들보다 강한 존재는 만나 보지 못했다.
이번 작전.
홀로 국경을 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선택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에 크리스와 같은 인물들은 본인들도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들의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코르셰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의도를 떠나서.
크로노스가 어떤 무기를 준비했든 간에 그것을 혼자서 상대해 보고 싶었다.
드미트리 공국.
크로노스와의 마찰.
감당해야 할 영역이 커지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한계를 알 수 없기에, 지금은 그들의 최선을 파악할 기회가 필요했다.
그림자들.
제국의 최선이다.
그들은 암살을 공표하고, 그림자라는 카드가 이번 문제를 해결할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사지에 들어섰다.
적들을 마주하고, 검을 들었다.
지난 1년.
로만 드미트리는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단 한 번도 전력을 드러내지도, 그럴 필요도 존재하지 않았다.
화악.
감각이 확장되었다.
천마신공.
천지인의 단계 중.
로만 드미트리는, 벽을 허물고 지(地)의 단계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