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615)

210화 칠흑같이 어두운 밤 (6)

바스락.

누군가가 나뭇잎을 밟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밟았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소리 정도로 들렸다면, 감각이 확장되면서 머릿속에 전달되는 정보의 형태가 달라졌다.

바, 스, 락. 누군가의 발이 나뭇잎에 닿고, 나뭇잎을 밟으면서 소음이 발생하는 과정이, 1초 그 이하의 단위로 내려가며 세분화해서 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휘잉.

바람이 불었다.

로만 드미트리로부터 일어난 마나가 바람과 뒤섞였고, 바람에 닿는 적들의 형태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주변에 몇 명의 적들이 존재하는지, 그들의 신체적인 특징은 어떠하며, 지금 내뱉는 호흡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몸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조차 보였다.

인의 단계.

가장 기초적인 경지다.

천마신공의 토대를 쌓고, 감각을 발달시키며, 마나가 분출하는 길목을 닦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간 인의 단계를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발전이 비약적이라며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버틀러를 쓰러트리는 그 순간까지도 인의 단계에 머무른 상태였다.

그리고 수련을 거듭하며. 마침내 벽을 허물었다.

지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발전을 넘어서서 자연 그 자체와의 동화를 의미했다.

감각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인의 단계에서 자연을 받아들였다면, 지의 단계에서는 자신을 자연과 동화시켰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림자들로서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다.

전생.

지의 단계에 처음 들어선 날.

백중혁은, 막다른 길목에서 맞닥트린 정파의 고수 백 명의 목을 날려 버렸다.

* * *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오라가 일었다.

선천의 기운을 발현한 그림자들은, 특별한 신호가 없는데도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파바박.

처음 달려든 존재.

그가 발에 힘을 주고, 허벅지가 크게 부풀어 올랐으며, 암흑의 오라를 일으키기 위해 숨을 들이켜는 일련의 과정에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림자들의 변화는 연쇄적으로 번져 나갔다.

정신적으로 소통하는 모양인지, 그들의 공격은 찰나의 순간에 폭발했다.

빨랐다.

암흑의 오라가 그들의 몸을 휘감았고, 눈으로 파악하기 힘을 정도로 빠르게 로만 드미트리를 덮쳤다.

그러나.

훅.

첫 공격은 빗나갔다.

예민하게 일어난 감각은 주변의 정보를 파악했고, 단검을 찔러 넣는 방향과 근육의 꿈틀거림과 같은 복합적인 정보들은 어떤 공격인지를 머릿속에 전달해 주었다.

자연과 동화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마나를 잔뜩 머금은 자연은 일정 구역을 로만 드미트리의 공간으로 만들었고, 첫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섬전을 사용하며 상대의 머리를 베었다.

번뜩.

푸확.

머리가 날아갔다.

그림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암흑의 오라를 극성으로 사용했건만, 로만 드미트리의 공격에는 미처 반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몸이 연기처럼 변하는 능력도 발동되지 않았다.

‘적들의 능력에는 약점이 있다.’

앞선 공방.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능력을 파악했다.

약점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그림자들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육체를 구성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물리 공격을 흘려 보내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가슴팍을 베었을 때 연기로 흩어졌다가, 후속타에서 검붉은 피를 흩뿌리며 죽음을 맞이했던 상황이 바로 육체의 재구성을 노린 것이었다.

두 번째.

이것은 첫 번째보다도 어려운 조건이었다.

상대는 특수한 힘을 발현하고 있고,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는 미묘한 마나의 흐름을 보였다.

그것은 그림자의 존재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연기로 흩어진다고 한들 마나의 연결 고리만 있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그 흐름을 단번에 베었다.

연결 고리의 해제.

그림자의 죽음을 의미했다.

신체가 원래 상태로 돌아오며, 몸을 베어 버리는 검에 그들은 눈을 부릅떴다.

그림자의 공략법.

일반적이지 않았다.

순간적인 기회를 공략하는 방법은 보통의 감각으로 불가능하건만, 지의 단계에 들어선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했다.

육체를 재구성하는 타이밍과 마나의 흐름을 간파했고, 이번에도 상대가 뭘 해 보기도 전에 육체와의 연결 고리를 끊었다.

일격.

그림자가 죽었다.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그림자들의 존재감이 더욱 불타올랐다.

콰앙!

콰콰콰쾅!

사방에서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

그림자들은 목숨을 버렸다.

처음 달려들었던 그림자의 목이 날아가자, 뒤따르던 그림자가 앞선 그림자의 몸을 베어 버리며 그 너머에 있는 로만 드미트리를 노렸다.

동료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몸이 베어지는 그림자 또한.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강렬한 살의를 드러내며,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뻗었다.

콰르르르르릉.

암흑의 오라가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동료가 죽을수록.

그들의 오라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현했고,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다.

그림자들.

강했다.

구스타보, 니콜라스, 버틀러.

지금까지 쓰러트렸던 대륙의 랭커들을 동시에 상대해도, 그림자들의 합공보다는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다.

숨을 한 번 들이켤 때마다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앞에서 달려드는 공격을 막으면 옆에서 치고 들어왔고, 그것마저도 막아 내고 적의 머리를 베어 버리면, 머리 위에서 암흑의 오라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났다.

언뜻 드러나는 모습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암흑의 오라에 휘감긴 채로 적들을 우악스럽게 베어 버렸다.

팟.

피가 튀었다.

사방을 적시는 검붉은 핏방울에, 로만 드미트리의 눈이 빨갛게 물들었다.

‘혈류(血流).’

피가 반응했다.

핏방울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변하더니, 득달같이 달려들던 그림자의 급소를 관통했다.

파바박.

비틀.

그림자가 몸을 떨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손을 뻗어 그림자의 머리를 잡아챘고, 바닥에 찍어 버리자 연기처럼 머리가 흩어졌다.

그뿐이었다. 육체를 재구성하기 전에 머리를 짓밟아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이 잔인하게 보일 정도로 핏물이 튀었고, 혈류로 그 핏방울들을 일으켜 적들의 몸을 사정없이 관통해 버렸다.

마귀(魔鬼)의 무공.

오로지 강함만을 추구하는 마교의 무공을,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마교의 무공을 적극적으로 발현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게 정확한 이유겠지만, 시각적으로 보이는 충격을 생각한 선택이기도 했다.

마교는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피가 튀고, 악귀처럼 보일지라도.

강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는 굳이 선택지들을 숨기지 않았다.

어둠으로 둘러싸인 적들을 상대로, 핏빛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더욱 악마처럼 보였다.

콰직.

적의 머리를 부쉈다.

벌써 열 명째.

적들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었다.

그들은 분명히 강했으나, 크로노스의 최선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이 되지는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

패색(敗色)이 짙었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우두머리로 보이는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 * *

그림자가 숲속을 달렸다.

이번 작전.

완벽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크로노스의 예상대로 호전적인 성향을 보였고, 에코르셰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사실상 작전의 성공을 의미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단 한 명의 수하도 대동하지 않는 모습에, 그림자들은 이번 작전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당해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그림자들을 학살하는 모습은, 직접 경험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 전투의 증언을 기반으로, 우리는 로만 드미트리가 그보다 최대 배는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계산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과할 정도의 대응이건만, 대체 그 악마 같은 모습은 뭐였지? 우리들의 능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고, 힘과 힘의 대결에서 압도적으로 밀렸다.’

작전 실패였다.

에코르셰를 동원해 힘을 빼고, 일대 다수로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이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정면 대결에서 패배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압도적인 무력에, 그림자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마인(魔人)들을 동원했는데도 쓰러트리지 못하다니. 로만 드미트리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다. 이 사실을 제국에 알려야만 한다. 만약 오늘 목격한 모습마저도 로만 드미트리의 전력이 아니라면, 그는 크로노스 제국의 계획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림자들.

그들은 제국을 위한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강자라고 불리는 적들을 상대했다.

딱 한 번.

이번처럼 압도적으로 패배한 적이 있었다.

성스러운 힘을 사용하는 존재는 랭킹 외의 인물이었는데, 어둠을 상대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모습에 싸우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였다.

천적도 아니고, 상황도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오로지 힘과 힘의 대결이었는데, 감히 넘보지도 못할 만큼 압도적인 무력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당혹스러웠다.

단언컨대, 크로노스의 상위 랭커들도 자신들의 합공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이겨 내지는 못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알수록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로만 드미트리를 암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전력을 다해 뛰었다.

일단 거리를 벌리고, 제국에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비틀.

몸이 기울어졌다.

그림자가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순간, 시야가 급격하게 틀어지면서 땅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방금까지 건재했던 두 다리.

그것이 잘려 나가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림자는, 뭘 해 보기도 전에 가슴이 밟혔다.

콱.

‘……벌써 전부 처리했단 말인가.’

로만 드미트리였다.

그가 따라붙었다.

이로써 계획은 실패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제국에 보고하려고 했건만, 꼬리가 따라붙고 말았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품속에서 마법 통신기를 꺼내더니, 그림자에게 툭 던졌다.

“제국에 연락해. 그리고,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고해.”

* * *

로만 드미트리.

그의 의도는 알 수 없었다.

함정일 확률이 있었지만, 그림자로서는 리스크를 짊어져서라도 제국에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통신을 연결했다.

그러자.

[로만 드미트리는 처리한 건가.]

통신기 너머.

찰튼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자는,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작전에 실패했습니다.”

[실패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찰튼 남작님. 지금부터 제 말을 황제 폐하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저희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습니다. 마인을 열여덟이나 동원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고, 물리적인 공격을 무시하는 저희의 능력조차 통하지 않았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힘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힘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보고 들은 정보들.

그것을 말하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말리지 않았다.

가만히 내려다만 보는 모습에, 그림자는 말을 서둘렀다.

“지난 2년. 로만 드미트리의 성장세는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시작점을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비밀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반드시 죽여야만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하기 전에, 크로노스 제국이 직접 나서서 로만 드미트리의 숨통을 끊어야만 합니다.”

목소리가 격렬해졌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자신을 죽여 보라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이로써.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

임무 실패와 더불어 이런 보고가 올라간다면, 크로노스 황제는 절대 방관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다.

순간.

통신기 너머가 정적에 물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보고에 당황했기 때문일까.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던 통신기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로만 드미트리. 지금 거기에 있구나.]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