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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화 (214/615)

214화 지하에 숨겨진 비밀 (2)

드워프.

걸음마를 떼는 그 순간부터, 망치를 쥐고 화덕의 불길과 평생을 살아가는 존재.

소문으로는 들었다.

그들은 대장간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물건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예술적인 작품들에 한해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보인다고 말이다.

그들의 본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영역을 주장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드워프의 정신은 한순간에 육체를 이탈하고 말았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

영롱했다.

횃불에 비추어지는 검의 형태에, 드워프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얼굴을 붉히다가 검을 보여 달라는 게 참 정신 나간 소리 같겠지만, 딱 1분이면 되네. 아니, 3분! 어떻게 그 검을 한 번만 보여 줄 수 없겠나. 만약 내 요청을 들어준다면, 드미트리와의 타협을 정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네.”

목소리가 말랑말랑하게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뢰할 수 없는 대상에게 검을 내주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지만, 드워프의 눈빛에서 순수한 열망(熱望)을 보았다.

어린아이와 같은 강렬한 바람.

로만 드미트리가 그간 만났던 장인들은 예술품을 목격했을 때 저것과 똑같은 눈빛을 보였다.

매우 친숙한 반응이었고, 검을 넘겨준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변 30m.

감각의 영역이었다.

시야 너머에 몇 명의 드워프가 있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머릿속으로 정보가 고스란히 빨려들었다.

만에 하나.

변수를 차단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의 경험은.

검을 보여 주는 행위가, 드워프와의 관계를 진척시킬 계기가 되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드워프들은 드미트리와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굳이 문제를 악화시킬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만 드미트리는 살인귀(殺人鬼)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 잔인해질 뿐.

개선의 여지가 있는 관계조차도, 파멸로 몰아가지는 않았다.

“검을 가져가십시오.”

그 말에.

드워프는 감격하는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를 믿지 못해서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다가, 떨리는 손길로 검을 받아 갔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검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감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세상에 이런 검이 있다니.”

검의 강도.

검의 형태.

완벽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드워프의 세계에서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없었는데, 로만 드미트리의 검은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동화되는 성질을 보였다.

이건 정말 기적적인 일이었다.

드워프들은 항상 검이 물체(物體)로서의 영역을 초월하길 바라는데, 눈앞에 존재하는 검은 그 물음에 해답을 주는 것만 같았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검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 검을 만든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머릿속에 몇몇 인물이 떠올랐다.

인간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영역이고, 한때 대륙에서 명성을 떨쳤던 드워프의 선조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편견에 의한 결론이 아니다.

길어야 백 년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기술력으로는, 이만한 물건에 만들어 낼 만한 기술력과 경험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드워프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런 보물을, 눈앞의 인간이 만들어 냈다니.

검을 다시 한번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드워프는 검을 어루만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검의 기억.

검이 탄생하는 과정을 읽었다.

드워프들만의 특별한 능력이었고, 그가 존재하던 공간이 뒤엉키면서 주변이 공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하 땅굴에서 있었던 일들은 완전히 배제했다.

드워프는 검이 탄생하던 그 순간으로 빠져들었고, 화덕이 엄청난 불길을 뿜어냄과 동시에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화륵.

화르르르륵.

카앙! 카앙!

로만 드미트리가 강철을 두드렸다.

발가벗은 상체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검을 향한 시선은 드워프들과 비슷한 장인의 눈빛을 보였다.

감탄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장인이 분명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동류였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르르륵.

불길이 거세졌다.

화덕의 불길이 일렁이며 로만 드미트리를 휘감았고, 엄청난 광경에 드워프는 검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위험했다.

불길은 드워프들조차도 매번 조심스럽게 다루는 힘이었고, 폭주하는 불길은 인간의 연약한 육체로는 버틸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걱정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불길을 다스렸다.

몸에 휘감기는 불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불에 타오르는 망치로 강철을 거세게 두드렸다.

“아아……!”

입을 떡 벌렸다.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마치 불의 화신(化身)과도 같았다.

몽롱해진 눈에서는 눈물을 흘렸고, 어느새 검의 기억은 끝나 버렸다.

감정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드워프는 파문이 일어난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이전과는 다른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제발, 저희의 땅을 되찾아 주십시오.”

* * *

태도가 변했다.

다가오지 말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드워프가, 지금은 로만 드미트리를 마치 귀인처럼 대했다.

“땅을 되찾아 달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로만 드미트리 또한.

상대에 대한 예우를 보였다.

드워프는 격렬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더니,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 부탁을 말씀드리기 전에, 드워프들이 왜 끝없는 산맥으로 이주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사실 끝없는 산맥은 인간들이 지은 명칭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있는 산맥은, 인간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 끝이 존재합니다. 아르카디아(Arcadie). 우리는 끝없는 산맥 너머를 그렇게 부르며, 그곳은 이종족들이 살아가는 조화로운 세계입니다.”

산맥 너머.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엘프나 드워프와 같은 이종족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가 그곳에서 살았다.

만약 이종족들을 절망에 빠트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드워프들은 지금도 끝없는 산맥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 인간들의 세계가 지금처럼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던 시기에, 산맥 너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한파가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해 땅은 얼어붙었고, 이 세상의 근간인 세계수(世界樹)조차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재앙의 시작이었습니다. 세계수를 지키는 엘프들은 어떻게든 세계수를 살려 보고자 노력했지만,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세계수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 낼 수 없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이종족이 죽었습니다. 끝까지 아르카디아에서 살아가겠다던 이종족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하나둘씩 쓰러지고 말았고, 당시 드워프들의 선조님은 종족의 생존을 위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곳 끝없는 산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머나먼 옛날.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케케묵은 얘기였다.

드워프가 끝없는 산맥 너머의 일을 설명한 이유는, 지금부터 말할 본론과 관계가 있었다.

“약 수십 년 전. 우리는 지하 깊숙이에서 화마(火魔)의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 만큼 위험한 힘이지만, 역으로 잘만 활용한다면 세계수를 녹일 유일한 희망이기도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 나는 당신을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화마의 덩어리에 감히 다가가지도 못하는 이때,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당신을 만난 것은 신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화마의 덩어리를 가져다주십시오.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드워프를 이끄는 ‘갈색 바위’의 이름으로 어떤 부탁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분란으로 시작되었던 관계.

그것이, 새로운 국면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 * *

갈색 바위.

드워프들은 태어난 그때, 산모의 눈에 들어오는 주변의 자연을 활용해 이름을 짓는다.

지하 세계.

갈색 바위만이 시선을 사로잡는 세상에서, 드워프들의 새로운 지도자는 암흑기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의 부탁에.

로만 드미트리는 생각에 빠졌다.

‘이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화마의 덩어리.

위험한 힘일 것이다.

일반적인 불길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고, 갈색 바위의 부탁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가 말하는 보상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드워프와의 관계는 어떻게든 해결하면 그만이고, 굳이 목숨을 담보로 걸면서까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로만 드미트리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일련의 상황들이, 어쩌면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생은 내가 바란 삶이 아니다. 죽음을 받아들였고, 눈을 떠 보니 나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게 닥친 상황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는 운명을 거론할 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니었고, 내게 닥친 현실을 살아갈 뿐이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경험한 일들은 어느새 하나의 연결 고리를 형성했다.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며. 전생과 비슷한 인연들을 만난 것이 과연 우연일까. 드미트리는 흔하지 않은 대장장이 출신의 가문이었고, 영지 뒤로 펼쳐진 끝없는 산맥은 천마신교의 십만대산과 매우 흡사했다. 나는 전생의 삶을 답습했다. 결과적으로는 전생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전생의 경험은 현생을 살아가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끝없는 산맥에서 드워프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의 검에 감탄했고, 불을 다루는 능력에 본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적임자라고 말했다.

운명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드미트리가 끝없는 산맥과 붙어 있지 않았다면.

철광석 개발이 지하 통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자신이 염화신공을 다루는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어느 하나라도 조건이 어긋나는 순간, 드워프를 마주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의 단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 화마의 불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감당하기에도 힘든 시련이라면, 지의 단계는 그것을 버텨 낼 힘을 부여할 것이다. 하필 이때 드워프들을 만났다는 것. 과연 이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애초에 이 세상과는 관계가 없는 무림에서 살았던 내가,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것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꼬리를 무는 물음들.

명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마 백중혁.

운명을 저주하며 살았다.

삶의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투쟁하며, 자신을 이런 삶에 빠트린 신을 수도 없이 저주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삶은 그 누구에게나 시련을 부여하고, 온갖 역경을 이겨 내고 정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천마 백중혁의 의지이자 선택이었다.

자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존재들.

그들은 운명이기에 그런 결말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치열한 싸움에서 패자로 전락했을 뿐이었다.

운명.

믿었다.

사람마다 부여받은 현실은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 짓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자.’

드워프와의 관계를 떠나.

이번 결정은, 자신을 위한 결단이었다.

“당신의 부탁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침묵 끝에 돌아온 대답.

갈색 바위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한 얼굴을 보였다.

* * *

걸음을 옮겼다.

가장 밑.

지하 끝까지 내려갔다.

점점 달아오르는 열기는, 지열(地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갈색 바위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들어갈 수 없는 영역입니다. 화마의 덩어리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세계수를 살릴 실마리를 안겨 준다면. 저희는 당신을 평생의 은인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시선을 거두었다.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한참을 이동하자 지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그 중심에.

화마가 일렁였다.

작은 태양과도 같은 그것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내가 믿고 따르는 것들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화마에 다가갔다.

뜨거운 열기를 마주하며,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화악.

화르르르르르륵.

엄청난 열기가, 그대로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덮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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