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615)

215화 지하에 숨겨진 비밀 (3)

엄청난 열기였다.

몸을 집어삼키는 불길에, 로만 드미트리는 불길이 내부로 빨려들어 속까지 불태우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

화륵.

화르르륵.

숨이 막혔다.

시야가 멀어 버릴 정도로 불길이 활활 타올랐고,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불길에 닿는 모든 부위에서 끔찍한 고통이 전해졌다.

한서불침은 일정 수준의 열기와 한기는 막아 낼 수 있지만, 화마의 불길은 일반적인 범주를 완전히 벗어났다.

극한의 열기.

예상했던 바다.

얼어붙은 세계수를 녹일 정도의 보물이라면, 호락호락하게 자신의 통제에 따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염화신공.’

화악.

마나를 일으켰다.

단전에서부터 비롯되는 힘이 내부를 순환했고, 장기들을 불태우려는 화마의 불길을 밀어냈다.

내부에서부터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마나와 불길이 격렬하게 부닥칠 때마다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고, 피부는 쩍쩍 갈라지며 불길에 타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딱 한 번이라도 밀리는 순간.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화마의 불길은, 전생에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유형의 힘이었다.

‘나를 집어삼킨 불길에 대항할 방법은 불길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염화신공을 통해 불길을 통제한 것처럼. 서서히 불길을 받아들이자. 뜨거운 열기가 내 피부를 태우고 나를 고통에 밀어 넣는다고 할지라도, 하나가 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화르르르륵.

불길이 거세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호흡을 들이켜며 불길을 받아들이자, 화마의 불길은 마치 분노라도 하는 것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드워프들이 어째서 감히 건드리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불의 기운으로 똘똘 뭉친 덩어리는, 자신과 닿는 존재들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난폭함을 보였다.

피부가 녹아내렸다.

열기를 감당하지 못한 것들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고, 그것은 상상을 넘어서는 고통을 선사했다.

그런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투쟁의 삶을 살아가며 고통은 일상처럼 받아들였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육체는 정신의 통제를 벗어나지 않았다.

강력한 통제력. 화마의 불길에도 굳건한 힘이었다.

화마의 불길은 극한의 고통으로 정신을 무너트리려고 했으나, 로만 드미트리의 머릿속은 태풍 속에서도 건재한 배처럼 평온함을 보였다.

‘지의 단계.’

화악.

감각을 개방했다.

불길을 받아들였다.

인의 단계.

자연에 적합한 신체를 만들었다면, 지의 단계를 통해서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화마의 불길 또한.

자연의 일부였다.

불은 파괴적이면서도 가장 원초적인 힘이었고, 동화를 시도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의도에 화마의 불길은 거세게 일렁이면서 육체를 헤집었다.

그때부터였다.

피부가 녹아내리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피부가 재생되었다.

불에 타오르는 와중에 환골탈태(換骨奪胎)에 의한 육체의 재구성이 이루어졌고, 피부가 녹아내리고 다시 재생되는 것을 반복했다.

만약.

지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화마의 불길은 자신의 정신마저도 태워 버렸을 것이다.

참으로 공교로웠다.

시련을 받아들일 준비를 끝냈을 때, 운명처럼 나타난 화마의 덩어리.

그 불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샐러맨더 대륙으로 이끈 존재가 바란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로 살아가며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울타리를 보호하고.

정점으로 군림하는 것.

그뿐이었다.

세계수와 관련한 문제는, 본인과 이해관계가 얽혔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했다.

‘내가 나아가는 길과 운명이 바라는 목적이 같다면. 그건 운명에 의한 결과가 아닌, 내 선택으로 만들어 낸 삶이다. 운명이 나를 화마의 덩어리로 이끌었다고 한들. 나는 내 선택에 따라 고통을 받아들였다.’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자신을 무너트리겠는 듯이 격렬하게 타오르는 열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강하게 열기를 휘어잡았다.

확.

바람이 일었다.

피부에서 살짝 떨어져 휘감기는 불길.

로만 드미트리의 피부가 빠르게 재생되었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화마의 불길이 더는 로만 드미트리의 육체를 불태우지 못했다.

그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의식이, 지상계(地上界) 너머 어디론가 빠져들었다.

* * *

샐러맨더 대륙.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시작은 바로 불길로부터 비롯되었다.

샐러맨더가 세상에 나타나 모든 것을 불태울 만큼 강렬한 불길을 토해 냈고, 그로 인해 바스러진 무언가가 현재의 대륙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대대로 내려오는 설화(說話)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처음 그 얘기를 퍼트린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진실을 말했다.

불로 이루어진 세상.

로만 드미트리는 근원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 붉게 타오르는 세상에는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화마가 존재했다.

[화염의 축복을 받은 자여. 나를 받아들여다오. 내 천명(天命)은, 너와 단단한 연결 고리로 묶여 있다.]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화마는 일렁이는 불길로, 본인의 존재감을 표출했다.

화마.

엄청난 힘이었다.

펠릭스가 불의 정령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불태울 만큼의 힘을 발현한 것처럼, 화마를 받아들인다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는 악마의 속삭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명을 들먹이며 달콤한 관계를 말하는 화마를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였다.

“나는 네가 어떤 존재이든 간에 상관하지 않는다. 나와 함께 하고자 한다면. 내 통제를 따라라.”

운명과 천명.

혹은, 그와 같은 거부할 수 없는 관계를 말하는 단어들.

로만 드미트리는 강제적인 관계를 뒤엎었다.

화마가 천명에 따라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하고자 한다면 통제를 따르는 일부가 되라고 말했다.

그게 천마 백중혁의 삶이었다.

가장 차가운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도, 천마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시련을 강요받았을 때도, 운명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정점의 자리에 올랐다.

언제나.

삶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잔인한 현실은 운명이 주도했을지 몰라도, 하나의 삶을 이루어 낸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화르르르르륵.

화염이 일그러졌다.

그건 마치, 기괴한 웃음과도 같았다.

[멋진 대답이구나.]

화악.

콰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화마가 세상을 뒤덮었고,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도 같이 휩쓸렸다.

세상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로만 드미트리의 정신은 온전히 살아남은 채로, 화마가 빨려드는 일련의 과정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 * *

눈을 떴다.

목이 말랐다.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몸을 일으켰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갈색 바위의 모습이었다.

“……정말 성공하셨군요.”

갈색 바위.

그는 감격한 표정을 보였다.

드워프들은 우연한 기회에 세계수를 살릴 화마의 덩어리를 찾았지만, 그동안 그것을 건드릴 방법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끝없는 산맥 너머.

갈색 바위의 세대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지만, 그들의 핏줄은 그 너머의 세상을 간절하게 갈망했다.

그리고 드디어 세계수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툭.

“받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가 무언가를 건넸다.

화마의 덩어리.

그것의 결정체(結晶體)였다.

불그스름한 작은 구슬이었는데, 만지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열기가 전해질 정도로 안에 타오르는 불길을 품고 있었다.

화마의 결정체를 받아 든 드워프는 손을 덜덜덜 떨었다.

사실 상대가 보물에 대한 욕심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약속을 지켜 주었다.

인간이라는 족속들.

싫었다.

선조들이 대대로 말해 주었던 경험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드워프들을 이끄는 갈색 바위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했다.

“로만 드미트리님이 화마의 불길과 싸우는 동안. 드미트리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드미트리는 대장간 기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축복 받은 도시라고 들었습니다. 이번 일의 대가로 로만 드미트리 님이 요구하시는 부탁과는 별개로, 저희 드워프 일족은 앞으로 드미트리 가문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대장장이들의 발전을 위한 대장간의 기술을 전수해 드릴 것이고, 그 누구도 드미트리를 침범할 수 없도록 탄탄한 성벽을 쌓아 드리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구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감사함을 표하는데도, 감사한 마음이 모두 전달되지 않았다.

“가끔 소식을 전해 오는 엘프들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르카디아의 한파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이제는 세계수의 생명력도 한계에 달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고향을 완전히 잃어버릴 날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대로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울컥했다.

이백팔십 년.

지하에서만 살았다.

선조들은 넓디넓은 땅에 드워프들의 터전이 있다고 말했지만, 갈색 바위는 단 한 번도 고향의 따뜻함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를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희망을 부여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갈색 바위는, 로만 드미트리를 흘러가는 인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드미트리는, 더는 당신들을 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뢰할 이유.

적대하지 않을 이유.

갈색 바위의 눈빛은,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 * *

사건은 정리되었다.

새로운 철광산의 개발은 중지되었으나, 드워프와의 협력 관계에 대장장이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드워프의 기술.

그것을 배우는 것은 대장장이들의 꿈이지 않은가.

그날.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연무장에 섰다.

검을 들어 오라를 일으키자, 화염의 기운이 뒤섞이며 불길을 일으켰다.

‘화마의 불길이 내 단전에 자리를 잡았다.’

의식 너머의 세계.

화마의 존재는 진짜였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은 현실이 되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단전에서 강렬한 열기가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갈색 바위에게 주었던 결정체는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갈색 바위는 목적을 이루었기에, 단전에 존재하는 화마의 존재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의지에 따라.

불길이 일렁였다.

마법과는 다른, 순수하게 불을 다루는 힘이었다.

‘앞으로 화마의 활용성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확실한 것은, 이번 일로 나는 육체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화마로 인한 육체의 재구성이 주요했던 것이겠지.’

얼마 전.

지의 단계에 들어섰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은 기연으로 인해, 단번에 지의 단계를 빠르게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전생과 비교해도 압도할 만큼의 성장세였다.

현재 로만 드미트리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전생의 백중혁은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현생의 삶에서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성장 시간을 단축했다.

당분간.

자신의 힘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얼마큼 발전했는지.

화마의 힘은 어떤 것인지.

앞으로 상대하는 적들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걸음을 옮겼다.

에코르셰.

그림자들.

그리고, 이번 화마의 불길까지.

일련의 상황들을 경험하고도, 로만 드미트리는 휴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발길이 허락하지 않는 공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끼익.

쿵.

폐관 수련을 위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 *

한 달 뒤.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가 머무르는 공방으로 향했다.

‘한 달이 지나면 찾아와도 좋다고 하셨지.’

걸음을 서둘렀다.

며칠 전.

로만 드미트리를 찾는 손님이 있었다.

폐관 수련에 돌입했기에 당연히 나중에 오라고 말했지만, 손님의 의지가 워낙 완고해서 드미트리에 머무른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그를 위해서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불러와야 할 때.

익숙한 길을 따라서 공방에 도착하자, 이미 문을 열고 나온 로만 드미트리를 발견했다.

“도련님. 수련은 잘 끝내셨습니까.”

“덕분에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특별한 문제는 없었나.”

“도련님을 찾는 손님이 있었습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벌써 며칠째,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이라는 말.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한스의 반응은, 익숙한 인물이 아니라 새로운 얼굴을 의미했다.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접객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인물은, 로만 드미트리가 들어서자마자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레드포드의 론돈 백작이라고 합니다.”

론돈 백작.

에코르셰의 암살 명단에서 보았던, 1급 암살 대상.

그가 바로 로만 드미트리를 찾은 손님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공방을 정리하러 간 한스는, 새카맣게 타 버린 공방에 입을 떡 벌렸다.

화덕의 불길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로서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