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론돈 백작 (1)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론돈 백작은 절망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골든 뱅크에서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보름 뒤. 10만 골드를 갚지 않는다면, 채권자의 권리를 행사해 이번 문제를 정식으로 항의하겠다고 합니다. 이를 어찌해야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레드포드 왕실의 국고(國庫)에는 그만한 빚을 갚아 낼 여력이 없습니다. 당장 내년 운영비도 외부에서 충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10만 골드를 뱉어 낸다면 나라가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10만 골드.
분명히 엄청난 돈이지만, 국가 단위에서 나라의 붕괴를 말할 만한 액수는 아니다.
문제는 레드포드의 사정이었다.
국왕의 대책 없는 사치와 도박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국고가 말라붙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감당되지 않을 만큼의 빚이 쌓였다.
뒤늦게 국왕을 통제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하지만 현실을 깨달았을 때는, 처음에는 분명히 눈덩이만 했을 빚이 눈사태를 일으키며 왕국을 덮쳤다.
론돈 백작이 말했다.
“협상의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인가.”
“예. 골든 뱅크에서는 일말의 여지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후우.”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지난 몇 년.
론돈 백작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재산을 상당 부분 날려 먹었지만, 아직도 나라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았다.
10만 골드의 빚. 현재의 자신으로서는 갚을 방법이 없었다.
정확히는 전 재산을 털어 갚는다고 해도, 이후에 닥칠 문제에 레드포드는 똑같은 상황을 반복할 것이다.
막막했다.
골든 뱅크.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그들은, 빚을 갚지 못한 이들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상대가 국가라도 개의치 않았다.
내부에서 돈을 뿌려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은 기본이고, 적대국들의 전쟁 자금을 지원해서 나라를 무너트리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뱉어 낼 여력이 없다면. 알아서 회수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간의 역사가, 골든 뱅크의 경고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똑똑히 보여 주었다.
“국왕 폐하는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늘 똑같습니다. 국왕 폐하는 이미 우리가 알던 그분이 아닙니다. 매일 술과 여자에 빠져 살고 계시며, 틈만 나면 도박판으로 향하십니다. 더는 국고에 손을 댈 수 없도록 제한을 걸었습니다만, 그렇다고 국새(國璽)가 찍힌 빚더미마저 저희가 통제할 방법은 없습니다.”
“외부에 국왕 폐하의 일탈을 부추기는 세력이 존재한다. 그들이 건재한 이상,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겠지.”
레드포드.
나라가 몰락하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아직 그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지만, 론돈 백작은 몰락이 머지않았음을 알았다.
국고가 마르고.
폭동이 일어나면.
나라의 의미는 상실할 것이다.
그게 제국이 바라는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론돈 백작으로서는 악을 쓰고 돈을 끌어모았다.
그 과정에서 반란을 수도 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국왕의 일탈은 외부의 세력으로 인한 결과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는 부류가 반란을 일으키길 바라고, 병력을 일으키는 순간 숙청의 명분으로 삼을 것이 분명했다.
외통수였다.
선택지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너지는 나라의 기둥을 지탱하는 것밖에 없었다.
자신을 찾아온 인물.
재무관(財務官)이었다.
국왕을 찾아가 보고해야 할 인물이, 비밀리에 론돈 백작을 찾아온 것이 나라의 현실을 의미했다.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책상 끝에.
아버지와의 사진이 보였다.
생전에 마법으로 찍은 그 사진은, 론돈 백작과 똑같이 생긴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사실 사람들은 론돈 백작보다는 그 아버지를 기억했다.
모두의 존경심을 받을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한 인물이었고, 불의의 사고로 죽는 그 순간까지 나라 걱정을 입에서 내려놓질 않았다.
그가 죽고.
사람들은 새로운 론돈 가문의 후계자를 비난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사람들을 약탈하고 돈만 밝히는 쓰레기라는 것이 세간에 그를 향한 평판이었다.
론돈 백작이 말했다.
“레드포드는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언제고 이 나라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다. 우리를 도와줄 세력들의 리스트를 뽑아야 한다. 일단 골든 뱅크의 빚부터 해결해야, 레드포드가 무사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재무관.
론돈 백작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먹색의 천장.
그게, 이 나라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 * *
처음부터 드미트리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간 친분이 있었던 세력들을 먼저 찾아갔지만, 그들은 모두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론돈 백작. 이쪽 바닥에서 이제 레드포드 왕국, 그리고 자네에게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네. 아무리 고액의 이자를 약속한다고 한들, 돌려받기도 전에 몰락해 버린다면 우리만 손해이지 않겠나. 미안하네. 우리도 이제는 현실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열 번의 만남.
열 번의 거절.
론돈 백작의 발이 부르텄다.
먼 거리를 직접 걸어 다니며 간곡하게 부탁해 보았지만, 대부분은 만남조차도 거절할 정도로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드미트리 가문을 떠올렸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크로노스 제국과 적대적인 관계이면서도 대부호로 불리는 그들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일말의 가능성.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간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상대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로만 드미트리.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일격에 쓰러트린 대륙 최고의 재능. 소문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 냉철할 정도로 선이 확실한 인물이다. 그가 레드포드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면, 돈을 빌려줄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그도 현실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드미트리는 로메로 공작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실질적으로 주도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그런 이유로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갔다.
맞은편에 자리하는 로만 드미트리. 간단하게 서로의 신분을 밝히고는,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초면에 이런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저희에게 10만 골드만 빌려주십시오. 물론 이게 무리한 부탁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인연이 있었던 사이도 아니고, 돈을 빌린다고 한들 빠르게 갚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치부를 밝혔다.
그럴듯한 말로 돈을 빌리는 게 아니라, 어떤 사정인지를 솔직하게 말했다.
론돈과 드미트리.
둘 다 장사꾼의 피가 흐르는 가문이다.
어쭙잖은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애초에 10만 골드라는 거액을 빌려주는 일인데도 드미트리 가문이 얻어 갈 이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자의 존재는 의미가 없었다.
레드포드와 론돈이 멸망해 버린다면, 이자를 받아 갈 상대가 사라지며 돈 또한 증발하는 것이니 말이다.
“만약 이대로 골든 뱅크의 빚을 갚지 못한다면 레드포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것만큼은 막고 싶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당신은 레드포드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왕국 연합은 그렇지 않아도 간신히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데, 레드포드가 몰락한다면 왕국 연합은 크로노스 제국을 막아 낼 힘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힘을 보태 주십시오. 레드포드는, 타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버틸 힘이 없습니다.”
이번 거래.
상황을 뒤엎었다.
단순히 이득의 관계가 아니라, 크로노스와 척을 진 드미트리에게 레드포드의 중요성을 어필했다.
론돈 백작.
영리한 인물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되, 레드포드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만들었다.
일련의 상황.
상대의 말을 덤덤히 듣던 로만 드미트리는, 차를 마시며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간에 론돈 백작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레드포드의 대부호. 주변 사람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잔인한 장사 수완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존재. 사람들은 당신을 쓰레기, 혹은 피도 눈물도 없는 구두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제가 마주한 론돈 백작님은 소문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군요.”
세간의 평판.
눈앞의 모습과는 달랐다.
적어도 레드포드의 사람들은, 론돈 백작을 애국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제게 한번 설명해 보십시오. 그런 평판을 가진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레드포드를 위해 노력하는지를 말입니다. 사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애국심을 버리면 살길은 충분히 있지 않습니까?”
* * *
로만의 말.
침묵에 빠졌다.
론돈 백작은,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세간의 평가.
자신도 알았다.
사람들은 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에서도 사업을 확정하고, 주변의 재산을 빼앗는 론돈 백작의 모습을 보며 쓰레기라며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남들을 위해 돈 한 푼 쓰지 않았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돈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겉으로 비추어지는 론돈 백작이었다.
실상은 달랐다.
그렇게 힘들게 벌어들인 돈을, 대부분 레드포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해 왔다.
론돈 백작이 말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저는 이 나라의 사정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고, 대륙 제일의 상인이 되는 것이 저의 목표였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막대한 부를 쌓으면 사람들이 모르는 진실을 보게 됩니다. 레드포드 국왕 폐하의 일탈. 사람들은 국왕 폐하가 나라의 사정을 어렵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과정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 일의 배후에 크로노스 제국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국왕.
그는 누군가에 의해 도박판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거액의 돈을 벌어 환희했던 그는, 1년도 지나지 않아 도박에 찌든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대륙의 거물들이 모인 도박판.
처음에 국왕이 어떻게 그 자리에 들어갔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고, 론돈 백작은 배후 세력이 레드포드의 몰락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레드포드의 대부호. 나라를 몰락시키려는 매국노들에게, 저희 가문이 어떻게 비추어질 것 같습니까? 아버지의 죽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애국심과 재력을 동반한 인물은, 그들의 계획에 큰 걸림돌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세간의 평판을 등졌습니다. 남의 사업을 짓밟고 재산을 빼앗으며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너트렸던 존재들. 그들은 모두 매국에 가담한 녀석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재산을 환수해서, 저는 국가로 돌려주었을 뿐입니다.”
기억 너머.
처음 가문을 물려받았던 론돈 백작은, 사실 이토록 모든 것을 헌신할 만큼의 애국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가슴 속에 단단한 무언가가 생겼다.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레드포드가 무너지는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론돈 백작은 크로노스가 의도하는 대로 상황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금은 자신의 삶을 레드포드를 위해 바쳤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 하나의 목적.
아버지를 비롯한 선대가 이룩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평판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론돈 백작이 말했다.
“10만 골드의 책임을 모두 떠안길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거래의 담보로 론돈의 땅뿐만 아니라, 가문의 가보(家寶)를 대가로 걸겠습니다. 만약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고 한들. 드미트리로서는 그리 손해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레드포드가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론돈 가문. 나아가 레드포드는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모두 끝냈을 때.
론돈 백작은 직감했다.
‘이번에도 거절하겠지.’
드미트리.
강철을 팔아 현재의 위치에 오른 장사꾼의 집안이라면, 이번 제안은 승낙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구구절절한 사연?
크로노스와의 관계?
그들에게 직면한 문제가 아니다.
타인의 발등에 떨어진 불길은, 자신에게 번질 때까지는 그 위험성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알겠습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돌아온 대답.
이미 포기했던 론돈 백작으로서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