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8화 (218/615)

218화 론돈 백작 (3)

일반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을 몰랐다.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지만, 레드포드의 땅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알아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다!”

“저 녀석이야! 론돈 백작은 지금 드미트리 가문과 작당하고, 레드포드의 재산을 빼돌리려 하고 있어! 매국노 녀석들! 그렇게 살고도 하늘이 부끄럽지 않더냐!”

무리 중 일부가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재클린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는 파티에 참석했기에 로만 드미트리를 알아보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도발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소문의 오라 검사다.

얼마나 강한 괴물인지를 알기에, 극단적인 상황에 치달아도 되도록 로만 드미트리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 처음에 의도한 계획이었다.

그랬던 계획이.

돌발 행동으로 망쳐 버렸다.

로만 드미트리를 자극하는 발언에, 재클린은 물러나지도 못하고 상당히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련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는, 목소리를 높인 녀석들을 보았다.

‘선동꾼들이 섞여 있군.’

평민들의 반란.

억눌렀던 분노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재클린의 반응과 자신을 알아보며 특정해서 도발하는 모습은, 이들을 부추긴 세력들이 섞여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크로노스 제국은 론돈 백작을 공격할 무기를 준비했다.

카이로에는 나라를 집어삼키려는 매국노들을, 자신을 상대로는 그림자라고 불리는 암살자들을, 그리고 론돈 가문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분노한 민심(民心)을 활용했다.

재밌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대륙 곳곳에 혼란을 흩뿌렸다.

제국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도, 적들이 알아서 무너지도록 상황을 만들었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그것이 제국의 방식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 그 말에 명확한 근거가 있나?”

“근거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로만 드미트리! 네가 정녕 정의를 아는 인물이라면, 우리의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썩 레드포드에서 물러나라! 네가 가져가려는 레드포드의 재물들. 그것은 백성들이 피땀을 흘려 가며 벌어들인 것이다. 악독한 론돈 가문은 재물을 모두 독식하고 홀로 호화로운 생활을 보내고 있는데, 그게 매국노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악에 받쳤다.

상황이 틀어진 이상, 재클린으로서는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화륵.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길처럼.

언제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의 말.

그들의 표정.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만, 레드포드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가치가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사실 론돈에 들이닥친 분노한 민심을 가라앉힐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진실.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론돈이 그간 했던 일들을 말한다면, 그들은 더는 매국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끼익.

문이 열리고.

론돈 가문의 기사가 나와,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 론돈 백작님은 로만 드미트리 님이 저희의 문제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이만 들어가시지요. 백성들의 분노한 민심은, 저희가 알아서 잘 정리하겠습니다.”

그 말에.

로만 드미트리는, 더는 평민들과 대치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 * *

안으로 들어서자.

론돈 백작이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한 분란에 휘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오늘과 같은 일이 처음인 것은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제가 운영하는 상단을 공격하는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처럼 저택에 들이닥치는 극단적인 상황은 없었으나, 사람들의 인내심이 결국 한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이번 일.

평화적인 해결을 바랐다.

론돈의 기사는 밖으로 나가서 파티에서 남은 음식과 금전적인 보상으로 타협안을 제시했고, 목표를 이룬 민심은 분노가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선동꾼들을 제외하고는 극단적인 상황을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전투가 벌어졌다가는 소문의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그래도 어느 정도 목적을 이루어 내는 선에서 그들은 이만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론돈의 방식.

참으로 미련했다.

로만 드미트리였다면, 이유가 어찌 되었든 칼을 들이민 사람들을 곱게 돌려보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곳은 레드포드다.

드미트리가 아니기에, 레드포드의 방식을 따를 뿐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물었다.

“왜 진실을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레드포드의 빈곤에는 론돈 가문의 책임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매국노들의 타깃이 된다고 한들, 진실을 밝히는 것이 론돈 가문을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죄송스러운 말입니다만. 레드포드의 국왕은 이번 문제의 책임을 질 필요가 있습니다.”

로만의 말.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말했지만, 론돈 백작으로서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저도 론돈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레드포드를 위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혐오(嫌惡)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각박한 현실에 타인에게서 문제의 책임을 찾습니다. 만약 국왕 폐하 때문에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레드포드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습니까.”

그때부터는 문제가 다르다.

사람들의 분노가 왕실을 향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질 것이다.

“누군가를 비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국왕 폐하를 목표로 한다면. 그때는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봉기(蜂起)를 일으킬 것이고, 어쩌면 크로노스 제국과 싸우기도 전에 내부에서부터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진실을 밝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분노가 왕실이 아니라 저와 같은 일개 귀족을 향한다면, 그들의 분노는 해 봤자 상행을 방해하고 저택을 공격하는 것에 그칩니다. 결국, 저 또한 왕실의 통치를 받는 존재에 불과하기에. 그들의 분노가 왕국 전체로 번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요.”

그도 사람이다.

비난이 달갑지는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욕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며, 한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이득은 보잘것없었다.

사람들은 론돈 백작의 행보에 영웅으로 치켜세우겠지만, 왕실을 향한 분노는 레드포드의 근간을 뒤흔들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영웅이라는 명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라가 무너진다면, 반란이 일어난다면. 그간 노력했던 것들이 모두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억눌렀다.

애써 웃으며,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레드포드의 문제는 비단 국왕 폐하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만약 책임을 물어 그분을 끌어내린다고 한들, 국왕 폐하의 일탈을 부추긴 세력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방관한 존재들로 인해서 레드포드는 더한 분란에 휩싸일 것입니다. 차라리 제가 사람들의 비난을 감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들이고도 무사할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레드포드가 살아남을 근간을 마련할 때까지는 백성들은 진실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지난 세월.

론돈 백작이 짊어진 삶의 무게였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기억 속에 있는 한 인물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마교서생 유현.

그는 참 독특한 인물이었다.

약육강식을 말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면을 타고났다고 믿는 존재였고, 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는 위치와는 다르게 권력에 큰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백중혁과는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이었을까.

둘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고, 종종 같이 시간을 보냈다.

백중혁은 물었다.

“빈민가에 찾아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너는 단순히 선의로 그런 행동을 했겠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은 하염없이 네가 찾아올 날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면, 단 한 번의 선의가 동정일 뿐이었다면서 화를 내겠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가난과 부유함.

상반되는 가치가 인성을 대변한다는 믿음.

백중혁이 살아온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를 도우며 살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런 가난함을 착취하는 악인처럼 표현했다.

그런데 정말 진실이 그러할까.

부유하다고 해서 무조건 악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해서 인간의 정을 아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삶의 밑바닥.

사람들의 이기심이 번들거렸다.

주먹밥 하나를 먹겠다고 사람을 죽일 듯이 패는 그들의 모습에서, 백중혁은 인간의 밑바닥을 보았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같은 환경이라도 형성되는 인격은 다른 법이고, 백중혁은 상대의 환경에 따라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

철저하게 경험에 기반해 상대를 판단했으며,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들만이 백중혁의 신뢰를 받을 가치가 있었다.

유현이 말했다.

“……글쎄. 네 말처럼 사람들이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 마음이 원하는 일을 행할 뿐이야. 세상에 너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같은 사람도 있어야 균형이 맞지 않겠어?”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도.

백중혁은 웃지 못했다.

유현과 자신이 살아온 길이 다르기에.

자신은 천마의 아들이면서도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고, 유현은 명문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서 좋은 것만 보고 자랐다.

선량한 마음은 그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백중혁과 같은 삶을 경험했다면, 인간이 선한 면을 타고났다는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유현이라는 사람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와의 시간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자신의 삶에 한 줄기의 빛을 내려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1년 뒤.

유현은, 빈민가에서 알몸이 되어 버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 * *

유현과 론돈 백작.

비슷한 유형의 인간들이었다.

하나뿐인 삶을 살아가며, 그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중요한 가치를 믿고 따랐다.

론돈 백작과 헤어진 로만 드미트리는, 밖으로 나와 새카만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련한 놈들.”

유현이 죽은 날.

백중혁은 빈민가 일대를 뒤엎었다.

그동안 유현과 접촉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냈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서야 유현을 죽인 범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기껏해야 10대 초중반의 소년이었다.

양쪽 귀가 잘려 나가 피를 흘리는 그를 바라보며 이유를 물었을 때, 소년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다, 다시는 저희를 찾아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났습니다.”

한 달 만의 방문.

굶주린 사람들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했다.

유현이 빈민가에까지 찾아와 자신들을 도와주는 것보다는, 은혜를 베풀고 떠나 가는 유현의 옷차림새가 비싸 보인다는 사실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돌아서는 유현의 뒤통수를 돌멩이로 찍어 버렸다.

피가 튀고 사람이 신음하는데도, 소년은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옷을 챙겼다.

그 소년과 재클린.

다르지 않았다.

조금만 현명하게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론돈 백작이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왔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진실을 모른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재클린이 잠깐이라도 일할 수 있도록 파티에 부른 것도, 파티가 끝나고 먹거리를 조금이라도 챙겨 준 것도, 단순히 귀족들이 호화스러운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에 분노하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감사함을 표현해야 했을 일이었다.

그렇게.

재클린은 선동꾼들에게 이용당했다.

그가 론돈 백작의 저택을 찾은 이유는, 어쩌면 그간 사람들의 만행을 봐주었다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현.

론돈 백작.

평소라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존재.

그들은, 사람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받았다.

멍청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전생에도.

그리고 지금도.

로만 드미트리는, 타인의 삶에 자신의 가치관을 들이밀 생각은 없었다.

론돈 백작이 희생을 자처하겠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면서도 굳이 건드리진 않았다.

이번 레드포드행.

골든 뱅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까지가 자신의 역할이었다.

걸음을 돌렸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그렇게 밤이 저물었다.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골든 뱅크가 통보한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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