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론돈 백작 (5)
로만 드미트리.
의외의 인물이었다.
집행관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로만 드미트리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앉으십시오.”
“……당신이 여기에는 무슨 일입니까.”
“론돈 백작님에게 사고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대리인을 맡았으니, 할 말이 있다면 제게 하십시오.”
집행관의 시선이 재무관을 향했다.
영문을 묻는 물음에, 재무관도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아는 바가 없음을 드러냈다.
어찌 되었든.
협상의 자리는 마련되었다.
대리인이라도 나타났기에, 집행관은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로만 드미트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집행관이 말했다.
“대리인이라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아시겠지요. 앞선 상황들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레드포드 왕국이 골든 뱅크에 갚아야 할 돈은 원금과 이자를 합쳐 약 10만 골드입니다. 문제는 5분 전까지는 그랬다는 겁니다. 만약 론돈 백작이 제시간에 나타나 10만 골드를 갚았다면, 골든 뱅크는 이전까지의 문제를 덮어 주고 다시 원만한 관계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끼익.
몸을 기댔다.
다소 삐딱한 태도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시간은 돈입니다. 우리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돈이 언제 돌아오느냐에 따라, 그 이자를 받아 가는 것이 우리의 일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9시로부터 5분이 지난 지금, 저희가 10만 골드를 받고 이번 문제를 마무리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10만 골드의 빚을 상환하기로 한 것은 정확히 9시였고, 시간이 1초라도 지난 시점에서 우리는 ‘레드포드 왕국’을 악성 채무자로 분류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자격이 있습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씀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집행관이 씰룩, 웃었다.
약속 시각을 넘어선 순간부터.
아니, 정확히는 돈을 빌린 그 순간부터 이 거래가 끝날 때까지 골든 뱅크는 갑(甲)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연체에 대한 이자를 받아야겠습니다. 갚아야 할 돈의 10%. 11만 골드를 당장 상환한다면, 레드포드 왕국과의 좋지 않은 기억은 잊어 드리겠습니다. 그때부터는 다시 돈을 빌리셔도 무관합니다. 악성 채무자만 아니라면, 골든 뱅크는 언제든 거래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11만 골드라니요!”
재무관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11만 골드.
엄청난 금액이었다.
10만 골드를 마련하는 것만 하더라도 레드포드의 사정으로는 불가능했는데, 그것에 1만 골드를 얹은 금액을 갚을 방법은 만무했다.
게다가 론돈 백작이 사고를 당했다는 말이 자꾸만 불편하게 느껴졌다.
최근에 자택이 공격당한 일과 더불어, 하필이면 10만 골드의 금화 상자를 옮기는 도중에 벌어진 사고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론돈 백작은 이곳으로 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금화를 노린 시민들이 공격했고, 그로서는 이제 10만 골드를 갚을 여력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레드포드와 골든 뱅크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10만 골드가 아닌 11만 골드를 갚는 것밖에 없습니까?”
“저희는 채무자의 사정을 헤아릴 의무가 없습니다. 오로지 상환을 약속한 날이 중요할 뿐. 없는 살림에 다시 10만 골드를 확보한다고 할지라도, 저희가 바라는 것은 지금부터 11만 골드입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골든 뱅크.
철혈(鐵血)의 은행.
사람들은 그들이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세력이라고 생각하지만, 대륙에서 그들보다 호전적인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돈을 갚지 않는다면 오로지 파멸을.
크로노스 제국과 같은 대륙의 악보다도, 오히려 골든 뱅크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상대의 시선을 마주 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툭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돈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빌미로 한 파멸입니까.”
* * *
대륙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골든 뱅크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한결같았다.
오로지 채무의 관계만을 말하는 그들에 의해,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골든 뱅크는 금화의 악마다. 그들과 거래를 할 생각이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어떻게든 채무를 상환해라. 그렇지 않다면, 금화의 악마가 너를 비롯한 네 주변의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현자의 조언이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례를 보여 주었던 골든 뱅크의 행보에, 로만 드미트리의 물음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집행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로만의 말.
예민한 문제였다.
사람들은 골든 뱅크의 행보에 비난을 서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이런 발언을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알고도 감히 내뱉을 수 없는 발언.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적의를 보이는 시선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집행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실 저는 골든 뱅크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은 정당한 채무 상환을 주장하지만, 세상에 그 어떤 대부업도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빚을 받아 내지는 않습니다. 상대를 무너트리고 모든 재산을 강탈한다고 할지라도, 전쟁에 소모되는 비용은 금전적인 이득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요. 이자로 수익을 창출하는 세력으로서는, 돈을 갚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무너트리면서까지 일을 악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일반적인 대부업과 골든 뱅크는 다릅니다. 이건 약속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골든 뱅크의 빚을 어떻게든 갚는 이유는, 우리가 약속을 어겼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골든 뱅크가 단순한 대부업이길 바랍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긴장감이 팽배하게 차올랐다.
검을 뽑지 않았다뿐이지, 둘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골든 뱅크가 레드포드 왕국에 돈을 빌려주었을 때. 레드포드 왕국은 이미 국왕의 일탈로 채무 관계가 매우 복잡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골든 뱅크는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상대의 신뢰도와 채무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당신들이, 돌려받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만 골드를 거리낌 없이 빌려주었다는 말입니다. 상대가 국왕의 신분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간의 선례가, 골든 뱅크가 잔인할 만큼 철저하게 상황을 따진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역사의 한 페이지.
그것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골든 뱅크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신기루처럼 나타난 의문의 세력이었다.
누가 주인이고.
자금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돈을 가지고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순식간에 대륙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력으로 거듭났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없었다.
지나간 세월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사람들은 골든 뱅크를 있는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달랐다.
하오문을 통해서도 골든 뱅크의 근간은 알아낼 수 없었지만, 이번 레드포드 왕국의 사건과 같이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벌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추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골든 뱅크의 행보가, 타국의 파멸을 바라는 크로노스 제국과 흡사하다는 결론에 말이다.
공격적인 발언.
집행관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그는 분노를 토해 냈다.
“그래서 우리가 레드포드의 파멸을 바라고 돈을 빌려주었다는 말입니까? 이건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는 발언이군요. 협상은 결렬입니다. 레드포드 왕국은 채무 상환의 의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드미트리 가문의 발언은 후에 국제사회에서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떠나가려는 그때.
“말은 끝까지 들으십시오.”
멈추는 걸음.
로만 드미트리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레드포드의 빚. 제가 갚겠습니다.”
* * *
상황이 정리되었다.
집행관은 분노하면서도, 11만 골드를 대신 갚겠다는 로만 드미트리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대부업의 목적은 돈에 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채무를 빌미로 파멸을 바라느냐는 물음에 발목이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집행관은 11만 골드가 담긴 금화 상자에, 레드포드 왕국이 채무를 완전히 이행했다는 서류를 작성하고는 성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방을 나서기 전.
그는 로만 드미트리를 등진 채로 이렇게 말했다.
“드미트리 가문은 오늘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훗날, 다시 볼 날을 기대하죠.”
집행관의 경고.
로만 드미트리는 덤덤히 차를 마셨다.
일련의 상황에, 숨을 죽이고 있던 재무관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레드포드 왕국이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
11만 골드.
엄청난 돈이다.
드미트리 가문은 무려 10만 골드를 빌려주고도, 이후에 11만 골드를 추가로 변제하는 재력을 보여 주었다.
드미트리 공국의 재력이 엄청나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샐러맨더 대륙의 강철은 모두 드미트리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 산업을 꽉 틀어쥐고 있는 드미트리는 웬만한 왕국들조차 부담스러워하는 금액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았다.
게다가.
최근에 드워프들과의 기술 협력으로 인해, 드미트리는 이전보다도 더한 재물을 쓸어 모으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생각은 없습니다. 드미트리 또한, 아무런 이유 없이 도와준 것은 아닙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차갑게 반응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듯이.
차를 전부 마시고도, 자리에 앉아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문밖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 *
론돈 백작.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각이 훌쩍 지난 뒤였다.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저희를 공격한 무리가, 금화를 일반 시민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어렵사리 확보한 10만 골드는 그야말로 증발해 버렸고, 시민들에게 뿌린 돈을 되찾을 방법은 없었다.
물론 무력을 동원한다면 일부는 돌려받겠지만, 굶주린 시민들에게 쥐어진 금화를 찾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잘못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안전을 지켜 주겠다고 말했는데도, 극단적인 상황을 배제하고 일을 진행했다가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참.
어리석었다.
대부호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명석한 그가, 나라와 관련한 일에는 현명하질 못했다.
아니.
현명했다면 애초에 애국심을 버렸을 것이다.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상황을 정리한 론돈 백작은, 곧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채무를 해결할 능력은 없지만, 일단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든 돈을 확보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빚을 해결해 주었다는 재무관의 말에, 론돈 백작은 당장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털썩.
“레드포드가, 로만 드미트리 님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제가 10만 골드를 시민들에게 강탈당하는 바람에, 로만 드미트리 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레드포드는 골든 뱅크의 빚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레드포드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빚을 갚기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감수할 것이며, 평생 드미트리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직 레드포드가 끝나지 않았음에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표정은 싸늘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재무관조차도, 지금이 감사함을 표하는 감동적인 상황이 아님을 알았다.
“론돈 백작님. 지금 크게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차가운 음성.
론돈 백작이 놀라서 얼굴을 들자, 그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백작님은 제게 10만 골드를 빌리면서 그 책임을 떠안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왕국 연합의 안위를 들먹이는 그 말에, 드미트리는 금전적인 이득을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10만 골드를 빼앗겨 변제할 능력을 잃어버렸고, 저는 레드포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1만 골드를 추가로 사용했습니다.”
금화를 실은 마차가 떠났을 때.
시민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상황을 전달받았다.
마음을 먹었다면 도와줄 기회는 분명히 있었으나, 로만 드미트리는 그보다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기에.
“레드포드의 무능이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백작님, 당신은 지금 감사 인사나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부터는.
드미트리의 방식으로 상황을 해결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