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론돈 백작 (6)
빚을 갚아 준 이유.
단순한 호의가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일련의 상황들로 얻고자 하는 바가 명확했다.
“사람들이 저택에 들이닥쳤을 때, 10만 골드를 실은 마차가 길을 떠났을 때. 저는 분명히 백작님에게 경고했습니다. 어쭙잖은 관용은 시민들의 가슴 속에서 두려움을 없앨 것이고, 그때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백작님은 사람들을 믿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수도 한복판에서 마차를 공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수였다.
선동꾼들이 상황을 주도했다고는 하나, 애초에 시민들의 불만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론돈 백작.
선한 인물이다.
본인은 처음부터 애국자가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아버지의 피를 똑같이 물려받은 근본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사는 세상이 아름답기에,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상식의 틀을 벗어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백작님의 선택은 만용이었습니다. 적어도 타인의 돈을 빌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면, 본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백작님은 드미트리 가문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10만 골드로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골든 뱅크의 빚을 대신 변제해 주지 않았다면 레드포드 왕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미 벌어진 일을 후회하고, 다시 한번 저를 찾아와 약속을 들먹이며 돈을 빌리실 생각입니까? 백작님이 담보로 건 가보와 론돈의 땅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채무의 순위를 따지자면, 드미트리가 권리를 행사하기도 전에 골든 뱅크가 론돈의 기둥까지 뽑아가겠지요.”
담보의 존재.
처음부터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골든 뱅크가 전쟁을 주도하기 시작하면, 론돈의 재산은 종이 쪼가리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패배자의 모든 것을 앗아 가기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 땅의 주인인 론돈 백작이 서명한 서류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로만 드미트리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10만 골드를 영영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에도, 이번 일은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마차를 공격한 일.
방관했다.
론돈 백작이 죽었다면.
그의 명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마교서생 유현이 죽었던 것처럼, 그는 본인이 선택한 일에 대가를 치르는 것일 뿐이다.
그때는 론돈이라는 카드를 포기하고, 레드포드를 지도할 적당한 인물을 새로 내세웠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뚝, 뚝.
론돈 백작의 머리에서 피가 떨어졌다.
아직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현기증이 일었지만, 그는 로만 드미트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떠한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레드포드와 드미트리. 이 불합리한 관계에서, 내뱉은 말과는 달리 저는 아무런 책임도 짊어지지 못했습니다. 돈을 잃었고, 제 선택은 명백히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 해답을 말씀해 주십시오. 로만 드미트리 님이 레드포드를 버리지 않고 채무를 변제해 준 것은, 제게 바라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빨갛게 물든 눈.
독기로 물들었다.
선한 눈이 현실을 직시했고,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론돈은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처음 의도했던 계획을 실행할 차례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드미트리와 레드포드의 약속은 유효합니다. 21만 골드의 돈은 기한을 정해 두지 않되, 차후에 2배로 대가를 받아 내겠습니다. 그리고 론돈 백작님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사람들에게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 론돈 백작님이 어떤 일을 해 왔는지, 사람들이 말하는 매국노가 아니라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는 머릿속으로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미련할 정도로 당하고만 있는 론돈 백작의 모습에, 그런 미련함이 미래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크로노스 제국.
현실에 타협하는 사람들은, 절대 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론돈 백작님은, 반란을 일으켜 왕좌를 찬탈(簒奪)하십시오.”
* * *
레드포드의 호프집.
그곳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한바탕 일을 벌인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벅차오르는 기쁨을 즐겼다.
“마셔!”
“레드포드를 위하여!”
탕-
술잔을 부딪쳤다.
재클린은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 목구멍을 열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즐거웠다.
금화를 나눠 주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재클린의 손을 꼭 잡으며, 레드포드를 구한 영웅이라면서 눈물을 보였다.
며칠 전만 해도 하인에 불과했던 자신이.
당장 어떻게 먹고 살지를 고민하던 재클린이라는 사람이, 단번에 레드포드가 우러러보는 영웅으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맥주잔을 쥔 손.
피로 얼룩졌다.
론돈 백작과 그 병사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피를 보았지만, 자신의 행동에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나는 레드포드를 위한 일을 했을 뿐이다.’
당당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론돈 백작은, 그만한 잘못을 저질렀기에 대가를 치른 것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매국노.
경쟁자들을 악의적으로 무너트리면서 재산을 탐한 쓰레기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분명히 나라의 재산을 빼돌려서 호의호식했을 것이다.
맥주를 마셨다.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몰려들었고, 다들 그를 영웅이라며 치켜세웠다.
“그런데 호프집 주인은 어디로 갔지?”
“알 게 뭐야. 호프집의 맥주를 전부 마셔도 된다고 했으니, 우리는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자고!”
상황이 정리되고.
호프집 주인은 사라졌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재클린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귀족을 공격한 일.
엄청난 중범죄였다.
수도에 있다간 경비병들에게 체포를 당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재클린과 사람들은 그와 관련한 문제는 걱정하지 않았다.
재클린은 레드포드의 영웅이다.
금화를 받은 사람들이 재클린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것처럼 이름을 부르짖는 상황에서, 재클린을 건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론돈 백작을 공격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재클린. 경비병 따위는 걱정할 필요 없어. 너도 봤잖아. 우리가 론돈 백작을 공격했을 때, 오라 검사들조차도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사실 그 녀석들도 별거 없는 거야. 우리가 머릿수로 밀어붙인다면, 레드포드 왕실에서 병력을 보내도 너를 붙잡아 갈 방법은 없어.”
로만 드미트리의 말은 옳았다.
한 번의 선례.
벽을 허물었다.
그간 올려다보던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었다.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그동안 허락되지 않았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벌컥.
“재클린을 찾아서 내 앞으로 데려와라.”
문을 열고 들어선 일단의 병력.
일순간의 행복이, 와장창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 * *
호프집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맥주잔을 집어 던지더니, 한편에 두었던 무기를 챙기며 병사들의 앞길을 막았다.
“재클린은 건드릴 수 없다!”
“빌어먹을 새끼들. 너희가 지금껏 우리에게 뭘 해 주었다고, 레드포드의 영웅을 건드린단 말이냐!”
분노가 폭발했다.
가뜩이나 취기가 올라온 사람들은, 병사들이 공격하기도 전에 먼저 득달같이 무기를 휘둘렀다.
“죽어!”
확.
강철 검이었다.
론돈 백작의 병사를 쓰러트리고 얻은 무기다 보니, 평소에 다루어 보지 못한 무기를 휘두르는 모양새가 참으로 같잖았다.
그런데도 달려드는 사내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한 번의 승리를 맛보았기에, 그들은 병사들을 그리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 순간.
번뜩.
피가 튀었다.
사내의 검이 비스듬히 잘려 나감과 동시에, 사내의 머리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으악!”
“머, 머리가 날아갔어!”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단 일격.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정말 순식간에 사내의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호프집에 들이닥친 병사들은, 레드포드의 문양이 아니라 드미트리의 문양을 가슴팍에 달고 있었다.
“지금부터 길을 막아서는 자들은 즉결 처형한다.”
크리스였다.
레드포드의 시민들.
그들은 드미트리의 법도를 알지 못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결단을 내렸다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고, 로만 드미트리의 오른팔로 알려진 크리스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처음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달려드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들조차도 눈 깜빡할 사이에 모두 처리해 버리자, 사람들은 더는 달려들질 못했다.
공포에 질렸다.
재클린을 지키겠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크리스와 같은 공간에 있기 싫다는 듯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길이 열렸다.
크리스는 걸어가, 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재클린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
재클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던 기억에 그는 당당히 가슴을 폈다.
그리고는.
죽음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 내가 재클…….”
콰악.
“크악!”
크리스가 재클린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질질 끌려가는 상황에, 재클린은 허우적거리면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는 결국.
일반인에 불과했다.
고통이 머릿속을 장악하자, 방금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팍.
바닥에 내던져졌다.
재클린은 공포에 덜덜 떨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만 드미트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 *
재클린.
그를 끌고 광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머리칼을 잡아서 끌었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았다.
“재클린님이 끌려가고 있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개새끼들. 감히 레드포드의 영웅을 건드리다니!”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던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걸음을 따라 같이 광장으로 향했다.
그들의 표정은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장에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해 재클린을 구해 주고 싶었지만, 드미트리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차마 달려들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도 대담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도시 곳곳으로 뛰어가더니,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레드포드의 영웅인 재클린 님이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레드포드 왕실마저 버린 우리를 구해 준 분입니다! 모두 무기를 드십시오! 레드포드의 영웅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영웅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저 극악무도한 무리에게 보여 줍시다!”
“모두 광장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 재클린 님이 있습니다!”
악에 받쳐 소리쳤다.
죽음을 도외시한 그들의 외침은, 겁에 질린 군중들을 물들였다.
사람들이 무기를 들었다.
제대로 된 무기가 없다면 농기구를, 농기구도 없다면 무기로 사용할 만한 무엇이든.
하나씩 손에 쥔 채로 독기를 보였다.
재클린 죽는다면 금화를 다시 뱉어 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영웅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재클린은 하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인 순간, 그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재클린! 재클린!”
“재클린! 재클린!”
“재클린! 재클린!”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길목 곳곳에서 무리를 형성하며, 모두가 광장을 항해 밀려들었다.
그 끝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재클린을 무릎 꿇린 그는, 사람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때를 기다렸다.
광장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더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든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론돈 백작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연민(憐憫) 또한 편견임을 명심하십시오. 본인이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상대는 당신의 연민을 활용해 같은 밑바닥으로 끌어갈 뿐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갖춘 환경이 아니라, 백작님이 보고 들은 명확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만 합니다. 백작님이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백작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마저 선하다고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유현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앞을 보았다.
분노에 차오른 군중.
마침내.
진실을 밝힐, 완벽한 무대가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