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눈 뜬 맹인들의 나라 (1)
군중(群衆)은 머릿수로 힘을 얻는다.
처음에는 재클린의 모습에 발만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무리를 형성하자 당장에라도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할 것처럼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광장으로 끝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
그들은 경계선을 형성하듯, 로만 드미트리와 그 병사들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팽팽한 긴장감.
시민들 무리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시민들을 대표해 목소리를 높였다.
“재클린은 레드포드의 영웅이다! 대체 그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핍박한단 말이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텐데. 재클린이, 론돈 백작의 마차를 털어 금화를 강탈했다는 것을.”
로만 드미트리의 어투는 덤덤했다.
성난 군중을 앞에 두고도 흔들림이 없었고, 시민은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얼굴을 잔뜩 붉혔다.
“론돈 백작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다! 우리도 보고 들은 것이 있고, 론돈 백작이 드미트리 가문과 어떤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지 다 알고 있다. 마차에 실은 금화는 레드포드의 재산. 그것을 빼돌려서 드미트리로 망명하려는 속셈이었겠지. 재클린은 매국노의 돈을 올바른 일에 사용했을 뿐이고, 그것은 타국의 사람인 네가 처벌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옳소!”
“당장 재클린을 풀어 줘라!”
사람들이 들썩였다.
공포심이 옅어지며, 그들은 살의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한 번의 약탈.
피를 보았다.
귀족의 병력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들로서는, 수천의 머릿수라면 얼마 되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와 그 병력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게 그들의 세상에서 허락하는 상식이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수천의 인간을 도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무지했다.
어리석었다.
눈을 뜨고도, 귀를 열고도.
그들은 진실을 보지 못했고, 진실을 듣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너희가 주장하는 것에 근거는 어디에 있지?”
“근거는 무슨! 우리의 경험이 곧 근거다! 론돈 백작은 모두가 아는 쓰레기고, 네가 방문하고서 10만 골드를 실은 마차를 어디론가 빼돌리려 했다. 1만 골드도 아니고, 무려 10만 골드다. 그 엄청난 돈이, 망명을 위한 자금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사용한단 말이냐!”
“그 말은, 추측에 의한 결론이라는 의미인가.”
“논점을 흐리지 마라! 이건 추측이 아니라, 경험에 기반한 사실이다!”
매국노.
10만 골드.
로만 드미트리.
세 개의 연속되는 단어로 인해, 사람들은 론돈 백작이 매국을 저지르려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로만 드미트리가 피식, 웃었다.
논점을 흐리지 말라는 그들의 지적은, 자신의 말을 반박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너희들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론돈 백작을 따르는 병사와 기사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주장이 옳다고 믿으며 살인을 저질렀다. 일반적인 강도질과는 다르다. 사람이 죽은 일에, 너희는 지금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 증거는 없지만, 본인들의 말이 옳다. 증거는 없지만, 론돈 백작은 매국노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서류를 묶은 천을 풀더니, 재클린에게 던졌다.
툭.
“읽어라.”
예상 밖의 행동.
재클린은 물론이고, 시민들은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대체 서류의 정체가 무엇일까.
재클린이 머뭇거리는 반응을 보이자, 로만 드미트리는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행동을 재촉했다.
슥.
서류를 집었다.
그리고는.
찬찬히 안의 내용을 읽는 순간, 재클린의 얼굴이 충격과 공포로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당황하는 재클린.
그는 눈을 부릅뜨며, 서류와 로만 드미트리를 번갈아 보았다.
* * *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서류의 내용.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안에 찍힌 직인(職印)은, 서류의 내용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읽어.”
다시 한번 재촉하는 음성.
재클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창백해진 얼굴은, 눈앞에 닥친 현실을 감당하지 못했다.
“……골든 뱅크는 드미트리 가문의 로만 드미트리가, 레드포드 왕국이 골든 뱅크로부터 빌린 11만 골드를 대신 변제했다는 사실을 문서를 통해 증명한다.”
툭.
서류를 떨구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자, 로만 드미트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는 분명히 10만 골드가 망명을 위한 자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실은 이 문서에 나와 있듯, 레드포드 왕국의 빚을 갚기 위한 돈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론돈 백작은 골든 뱅크로부터 최후통첩을 받고 10만 골드의 돈을 내게 빌렸다. 만약 마차가 무사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면, 우리는 1만 골드의 이자를 추가로 낼 필요가 없었겠지. 그것이, 너희가 외면한 진실이다.”
“개소리하지 마라!”
재클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10만 골드를 빌려줄 이유도 없거니와, 문제는 론돈 백작이 대체 왜 나라의 빚을 대신 갚는단 말인가.
론돈 백작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애국자가 아니다.
자신의 잇속만을 챙기는 쓰레기고, 그간 세간에 떠돌던 소문이 론돈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했다.
그렇다면.
조작된 증거가 확실했다.
다른 이유로는, 문서의 내용을 설명할 수 없었다.
재클린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너희들의 더러운 속내를 모를 것 같으냐! 이 문서는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 론돈 백작은 나라의 어려움을 외면한 쓰레기다. 다들 배고픔을 호소하며 굶주리고 있을 때, 레드포드의 몇 안 되는 상단끼리의 이권 다툼으로 사람들이 일할 자리마저 없애 버렸다. 그렇게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도 론돈 백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금도 베풀지 않았고, 너를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벌였던 것처럼 우리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호화를 누렸다.”
그날의 파티.
인내심이 폭발했다.
론돈 백작이 누리는 호화를,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자.
로만 드미트리가 물었다.
“문서의 진위는 골든 뱅크로부터 확인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망명을 위해 돈을 빼돌리려 한다는 주장이 착각에 불과했던 것처럼. 론돈 백작이 너희가 말하는 매국노라는 증거는 대체 어디에 있지?”
그 말에.
재클린의 눈동자에, 큰 파문이 일었다.
* * *
론돈 백작.
그의 평판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
본인이 의도적으로 쓰레기처럼 보이길 바랐던 것은 아니다.
세간에 악의적인 소문이 형성되는 상황에,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굳이 부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시작.
상단 경쟁자였던 드레드 남작의 수작질이었다.
드레드 남작은 론돈 백작과 수도의 상권을 두고 다툼을 벌였는데, 자금 싸움에서 밀리자 그는 하나의 계획을 떠올렸다.
바로 애국심(愛國心)을 활용한 평판이었다.
론돈 백작의 아버지는 모두가 인정하는 애국자였지만, 가문을 물려받은 그 아들은 아버지처럼 대외적으로 애국심을 보이진 않았다.
그렇기에.
론돈 백작이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쓰레기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동시에, 본인은 사람들에게 재물을 풀어 벌어들인 돈을 일부분 사회에 돌려준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듯한 연극이었다.
드레드 남작은 새벽부터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거짓된 웃음을 보이면서 사람들의 환심을 얻었다.
덕분에 세간에는 드레드 남작의 상단을 이용하는 것이 레드포드를 위한 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딱 그 정도였다면. 론돈 백작은 드레드 남작을 무너트리지 않았겠지만, 드레드 남작은 뒤에서 남들은 상상치도 못할 악행을 저질렀다.
인신매매와 마약.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댔고, 크로노스 제국과 연을 맺어서 일자리를 얻으러 찾아온 레드포드의 사람들을 제국에 팔아 버렸다.
사실 드레드 남작의 평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면 진실은 분명히 새어 나왔겠지만, 그 전에 론돈 백작이 그를 무너트리고 상단을 먹어 버렸다.
그 모습이.
악인처럼 비추어졌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드레드 남작을 선인(善人)이라고 생각했다.
진실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선인을 무너트린 론돈 백작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매국노라는 소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실제로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나 나라에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겉으로만 드러난 사실을 보며 론돈 백작을 비난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인식은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상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할지라도, 사람들은 돈에 미친 매국노가 일을 벌인다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론돈 백작이 그동안 악행(惡行)이라고 불릴 만한 일을 단 한 번이라도 저지른 적이 있었나? 드레드 남작과의 다툼은 악행이라고 할 수 없다. 너희가 일터에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론돈 백작은 변제의 의무가 없는데도 드레드 남작이 남긴 채무를 모두 해결해 주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아니다. 이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에 평판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드레드 남작에게 물건을 납품한 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해서 본인이 직접 그렇게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눈앞의 진실.
사람들은 색안경을 썼다.
어떤 이들은 속인 이가, 혹은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이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올바른 주장일까.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기 전에, 분명히 진실을 판별할 근거들은 존재했다.
드레드 남작에 대해 조금만 알아보았다면 그가 악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것이고, 론돈 백작은 드레드 상단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투명할 정도로 올바른 절차를 밟았다.
그게 대체 어떻게 악인이란 말인가. 단순히 눈에 벗어나는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사람들은 모든 행동에 악행의 꼬리표를 붙였다.
론돈 백작의 평판은 만들어졌다.
하나의 시작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누구라도 론돈 백작이 매국노라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면, 재클린을 이 자리에서 풀어 주겠다. 대체 너희는 론돈 백작을 무슨 이유로 쓰레기라 부르는 거지? 그가 사치를 부려서? 상대한 파티를 열어서? 그것들은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는 정당한 행위일 뿐이다. 설령 론돈 백작이 본인의 잇속만 챙기는 인물일지라도. 본인을 희생하지 않는다는 같잖은 이유로, 너희들의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편견 하나가.
사람들의 생각을 제한시켰다.
마교서생 유현이, 론돈 백작이.
상대가 가난하다고 해서 도움이 필요한 상대라고 단정하고, 그들이 도움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레드포드의 사람들은 론돈 백작이 부유하기에 당연히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르게 불법적이고 악한 일을 벌였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둘 다.
착각에 불과했다.
본인이 살아가는 세상과 타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다르다.
똑같은 상황에서 본인은 선행을 택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은 악행을 택할 수도 있는 게 세상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정녕, 론돈 백작은 너희가 말하는 매국노가 분명한가.”
일련의 말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말.
옳았다.
정말 론돈 백작이 매국노가 맞을까.
생각해 보면 근거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드레드 남작을 무너트렸다는 이유만으로 악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버렸고, 그때부터는 무슨 일을 하든 좋게 보지 않았다.
사실 재클린이 폭동을 일으킨 이유도 웃겼다.
론돈 백작이 스스로 벌어들인 돈을 사용했을 뿐인데, 사치를 벌였다고 분노하다니.
레드포드의 시민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마차를 공격한 일.
무고한 병사들을 죽였다.
피와 죽음을 마주하고도 이건 올바른 일이라고 자위할 명분이 있었지만, 론돈 백작이 악인이라는 전제가 사라진다면 그 명분을 잃어버린다.
결국, 그들은 살인자가 되었다.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고, 있지도 않은 진실을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살인을 저지른 존재.
눈앞의 진실.
참담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레드포드의 빚을 해결해 준 은인이었고.
론돈 백작은 망명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일을 행하려다가, 시민들에게 봉변을 당한 것이 되었다.
믿음이 무너졌다.
적의가 사그라졌다.
하지만.
아무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손에 쥐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는 순간, 본인들이 착각해서 벌인 일들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때였다.
“레드포드에는 애나벨 보육원이라는 곳이 있다. 아마 다들 그 이름을 모르지 않겠지. 집을 잃은 아이들을 돌봐 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애나벨 보육원장을 너희들은 재클린과 마찬가지로 레드포드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왜, 애나벨 보육원의 재물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지? 애나벨은 일반 평민에 불과한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수년 동안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재물을 갖추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나.”
악인의 행보는 따져 물으며.
선인의 행보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선행을 베푼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애나벨의 보육원을 성역으로 취급했다.
순간.
사람들이 당황했다.
지금 왜 애나벨 보육원을 언급한단 말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한 생각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애나벨 보육원의 후원자. 그가, 너희가 쓰레기라고 비난하는 론돈 백작이다.”
숨겨진 진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고 들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