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24/615)

224화 눈 뜬 맹인들의 나라 (3)

재클린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몸을 들썩이며 흐느꼈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절망 섞인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론돈 백작님이 저희를 위해 그렇게 노력하신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매국노라고 부르기에, 그분이 베푸는 온정의 의도를 매번 의심했습니다.”

평민 가문에서 태어나.

재클린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먼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눈앞의 삶이 우선이었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답답한 현실이었다.

앞으로도 지금과 똑같이 노력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만 늘었다.

편협해졌고.

시야가 좁아졌다.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그리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크흐흑, 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게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아직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우연한 기회에 레드포드의 영웅이 되었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그가 특별했기에 사람들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일반인이라 사람들은 재클린의 발언에 공감했다.

선동의 대상이 재클린이었을 뿐이지, 사실 그 누구라도 재클린의 역할은 충분히 대체할 수 있었다.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현실을 확인하면서, 그의 얼굴은 세상이 완전히 무너진 사람처럼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았던 일반인으로서는. 일련의 상황을 받아들일 만한 경험이 없었다.

좌절했다.

오열했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개의치 않고 펑펑 울어 댔다.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

사람들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재클린을 비난하지도, 그렇다고 위로하지도 못했다.

본인들 또한 다르지 않기에.

재클린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며, 결국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이 상황에 대한 판결을 온전히 맡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재클린. 너에게도 너만의 사연이 있다. 론돈 백작을 공격한 폭동은 사사로운 이득을 위한 일이 아니었고, 금화를 강탈한 너는 사람들에게 금화를 나누어 주며 네가 무엇을 위해 무기를 들었는지를 증명했다. 하지만…….”

슥.

검을 들었다.

당황하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재클린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어떤 이유든 간에 네가 한 행동들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너는 선동에 당해 론돈 백작의 마차를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병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존재한다. 네가 너의 가족을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해도, 네 오해로 인해 병사들의 가족은 하나뿐인 가장과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 대가는 무엇으로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가 눈물로 호소한다고 한들, 이미 죽은 자들이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보았다.

재클린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상대가 재클린일 뿐, 로만 드미트리의 말은 폭동에 가담한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물은 엎질러졌다. 레드포드가 똑같은 선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수라는 이유로 행동의 책임을 뭉그러트릴 수는 없다. 재클린. 너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레드포드의 영웅’이 아니다. 한 번의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살인마에 불과하고,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재클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을 받아들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연약한 인간임을 증명하지만, 손에 묻은 론돈 백작의 피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자신의 실수 한 번에. 레드포드 왕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죽을 뻔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힘을 더 주었다면, 피를 흘리며 쓰러진 론돈 백작은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회피하지는 않았다.

“레드포드의 시민들은 들어라. 오늘을 기억하라. 재클린은 레드포드의 영웅은 아닐지언정, 너희들의 죄를 떠안고 죽음을 받아들인 생명의 은인으로 남을 것이다. 훗날, 너희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을 때. 그때는 재클린과 같이, 너희의 죄를 대신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 순간.

번뜩.

검을 휘둘렀다.

영웅이라 불리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했던 사내.

재클린은 그렇게,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 * *

그 시각.

론돈 백작은 병력을 이끌고 왕실로 향했다.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는 유혈 사태는 바라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람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지금은 일개 귀족에 불과한 나를 공격하는 정도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언제고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들이닥칠 것이다. 결국, 레드포드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누군가는 무기를 들고, 레드포드 국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려야만 한다.’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머릿속은 끝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제는 레드포드 국왕을 끌어내리자는 목적에는 동의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왕좌를 찬탈해 자신이 왕좌에 오르기를 바랐다.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레드포드 국왕에게는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왕자가 존재했다.

자신에게 이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반란을 일으켜도 좋다고 말했던 왕자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로만 드미트리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은지 의구심이 일었다.

같은 하늘 아래.

왕가의 핏줄은 두 갈래일 수 없다.

국왕을 무너트리고 왕좌를 바란다면, 반드시 왕자의 목숨을 취할 수밖에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인가.’

단 하나의 목적.

나라의 안위다.

정말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레드포드의 왕자는 왕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세(亂世)에는 혼란한 상황을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건만, 왕자는 정치적으로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님을 그간의 세월이 증명했다.

반란을 주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스스로가 국왕의 행보가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상황을 뒤엎을 힘과 능력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선택의 갈래.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무기를 들고 왕궁에 들이닥치는 순간, 그때부터는 찰나의 망설임이 모든 일을 그르칠 것이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선택은 지도자의 몫이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론돈 백작은,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기사단장.”

“말씀하십시오.”

“왕궁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단 한 번의 대화를 요구할 것이다. 국왕 폐하를 따르는 왕실 기사단이 우리를 향한 분노를 드러낸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왕실 기사단장의 머리를 날려서 그 휘하의 병력을 단번에 제압하라. 명심하라. 결국, 레드포드의 살을 갉아먹는 싸움이다. 결과와 과정 모두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레드포드는 멸망의 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착잡한 표정을 보였다.

론돈 기사단과 왕실 기사단은 친분이 깊었지만, 자신이 따르는 론돈 백작의 명령에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바라 왔던 일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론돈 백작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항상 그와 같은 사람이 레드포드 왕국의 국왕이었다면 현실은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왕궁에 도착했다.

그런데, 경비병은 마치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시선 너머.

왕실 기사단이 있었다.

그들은, 론돈 백작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레드포드 왕실 기사단은 왕실을 수호하는 존재. 국왕 폐하를 반하는 것이 대역죄(大逆罪)임을 아나,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겠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바를 이루십시오. 레드포드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해 주십시오.”

론돈 백작의 결단.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론돈 가문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 * *

왕궁의 사람들.

그들은 듣는 얘기들이 있다.

사람들이 론돈 백작을 매국노라고 떠들어 대지만, 왕궁으로 흘러들어 오는 정보의 내용은 달랐다.

레드포드의 희망.

재정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론돈 백작은 대대로 벌어들인 막대한 재산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국왕과는 비교할 수밖에 없는 행보였다.

매일 도박판으로 향해서 돈을 흥청망청 사용하며 여자와 술에 빠져 사는 국왕과는 다르게, 론돈 백작은 국왕이 해야 할 일을 도맡았다.

그렇기에.

문을 열었다.

왕가의 검의 존재 의미를 알면서도, 한 번의 외면이 자신들의 가치를 깎아내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왕실 기사단장은 눈을 감았다.

차마 반란에 가담하지는 못하지만, 론돈 백작이 왕좌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를 최대한 차단하는 것이 레드포드 왕국을 위한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덕분에 론돈 백작은 무사히 길을 지날 수 있었다.

평소에는 국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용했던 긴 복도를 걸었고, 그를 따라서 무장한 병력이 흉흉한 기세를 보였다.

오늘을.

후대는 어떻게 기억할까.

어떤 이는 반란을 일으킨 역적(逆賊)이라고 부르겠지만, 역사의 기록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매국노라고 불리던 사내.

론돈 백작에게 최우선은 언제나 레드포드의 안위였다.

자신이 어떻게 불리든,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할 뿐이었다.

끼익.

문을 열었다.

가문의 기사들이 길을 열자, 론돈 백작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국왕이 있을 공간에 발을 들였다.

그 순간.

론돈 백작의 표정이 경악으로 얼룩졌다.

항상 우러러보았던 왕좌(王座)에.

레드포드 국왕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상태였다.

* * *

창백한 얼굴.

입에서 흘러내린 피.

국왕은 죽었다.

시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정보에, 론돈 백작은 국왕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를 발견했다.

[론돈 백작. 네가 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동안 스스로를 향한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레드포드의 국왕인 나로 인해 생겨난 혼란이기에. 네가 레드포드를 위해 헌신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 외면했던 나날에 분노가 일었다.]

이상했다.

유서의 내용은, 사람들이 말하는 국왕과는 달랐다.

[사실 내게는 방탕하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내 자식들의 죽음이 불행한 사고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레드포드의 안위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장남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 어린 딸의 목숨도 앗아 갔다. 그리고 어느 날. 내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앞으로 도박판을 매일 찾아가 방탕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죽인다는 것이 그들의 협박이었지. 실제로 둘째는 맹독에 중독되었다. 내가 매번 그들에게서 받아 내는 해독제를 먹이고 있기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나라를 위해 올바른 태도를 보인다면 둘째는 그대로 죽고 말 것이다.]

숨겨진 진실이었다.

론돈 백작으로서도 알지 못했던 정보가, 유서 안에 있었다.

[나는 무능력한 왕이다. 국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이기적으로 자식들의 안위만을 챙겼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아이들을 지키자고 더 욕심을 부렸다간, 레드포드의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겠지. 론돈 백작. 너는 레드포드가 바라는 지도자다. 내가 왕위에서 물러난다면, 레드포드는 너를 중심으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겠지. 그러니. 손에 피를 묻히지 마라. 더는 악의 무리가 협박하지 못하도록 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내가 망가트린 이 나라를 부탁한다.]

“……이게 대체.”

유서를 쥔 손이 떨렸다.

론돈 백작은 이를 악물며, 마지막 글귀를 읽었다.

[마지막으로 왕자에게 남은 삶을 강제로 앗아 가지 않길 바란다. 어차피,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론돈 백작이 유서를 움켜쥐었다.

똑같았다.

재클린이 자신의 진실을 몰랐던 것처럼, 자신 또한 국왕의 진실을 몰랐다.

정말 무책임한 존재였다.

이렇게 죽는다고 국왕이 행한 만행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나, 론돈 백작으로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 당장 왕자님을 찾아라! 그분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남은 삶.

그 시간이 짧을지라도.

론돈 백작은, 왕자가 사람들이 비난하는 무능한 왕의 진실을 알길 바랐다.

무능할지언정.

레드포드 국왕은,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에 불과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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