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눈 뜬 맹인들의 나라 (4)
왕자를 찾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왕자는 별궁에 머물렀고, 론돈 백작은 착잡한 얼굴로 자신이 목격한 진실을 말했다.
“조금 전, 국왕 폐하가 승하(昇遐)하셨습니다.”
레드포드의 마지막 후계자.
샤를로 레드포드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요.”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아버지가 저를 찾아와 진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째서 그동안 방탕하게 살았는지, 레드포드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왕가는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빙빙 돌려서 말씀하셨지만, 결국 저와 아버지가 죽어야만 이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차를 마셨다.
달콤한 내음을 맡으며, 샤를로 레드포드는 충격으로 얼룩진 론돈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가 굳이 말씀하지 않아도. 저는 애초에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형과 동생의 죽음은 정상적이지 않았고, 저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술과 여자를 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레드포드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에는 분명히 음모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였습니다. 주변의 상황을 예의주시한 결과, 하인들이 제가 먹는 음식에 무언가를 첨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해독의 성분이 있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간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진실을 알면서도 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말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을 테니까요. 론돈 백작님. 악의 무리가 마수를 뻗쳐, 왕가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제 목숨을 빌미로 아버지에게 협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맹독에 중독되었으니, 아들의 목숨이 걸렸으니. 방탕한 삶을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맞습니까?”
진실을 말할지라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마법사들이 해독할 수 없는 독이라는 판결을 내린 순간, 샤를로 레드포드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국왕은 생명의 끈을 놓지 못했다.
이미 자식 둘을 잃었기에, 마지막 남은 자식마저도 잃을 수는 없었다.
론돈 백작이 말했다.
“……왕자님은 제게 반란을 주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알고도, 그리하길 바라신 겁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제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저 또한 아버지를 직접 해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레드포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희 부자가 죽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단순히 왕좌에서 내려오는 것만으로는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권력은 올바른 사람에게 완전히 이전되어야만 하고, 왕가의 핏줄이 살아남는다면 문제가 되기에 론돈 백작님이 칼을 들어 주길 바랐습니다. 론돈 백작님은 레드포드의 왕좌를 물려받을 적임자입니다. 그동안 레드포드를 위해 헌신한 세월을 알기에, 백작님이 결단을 내릴 각오만 되었다면 저는 백작님의 ‘명분’이 되어 줄 생각이었습니다.”
국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샤를로 레드포드가 맹독에 죽어 버린다면.
론돈 백작은 자연스럽게, 샤를로 레드포드의 공석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왕자의 계획이었다.
그는 진실을 알면서도, 죽음을 앞두고도, 레드포드를 위한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결단을 내렸습니다. 제게 진실을 말씀하실 때,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선고하며 최대한 담담하려고 노력하시더군요. 저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얼굴을 보였습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조금은 편히 생을 마감하실 테니까요.”
샤를로 레드포드.
사람들은 그를 왕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남을 다스릴 만큼의 능력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왕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는 왕에 어울리는 사내였는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경험과 세월을 쌓았다면, 샤를로 레드포드는 국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좋은 왕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그러하지 못했고.
난세는 젊은 재능을 기다려 줄 만큼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기에, 왕가의 후계자는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렸다.
론돈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왕자를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이 왕국의 짐을 떠안았던 것처럼, 그가 남몰래 떠안았을 짐을 생각하니 감정이 자꾸만 울컥했다.
샤를로 레드포드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론돈 백작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희 부자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레드포드를 다시 일으키고, 레드포드를 혼란에 빠트린 악의 무리에게 반드시 복수해 주십시오.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저는, 웃으며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론돈 백작이 고개를 숙인 채로 끄덕였다.
어떠한 말도, 어떠한 위로도.
섣불리 내뱉을 수 없기에, 반복해서 끄덕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그로부터 열흘 뒤.
샤를로 레드포드는 눈을 감았다.
맹독의 기운이 올라와서 마약 환자처럼 바들바들 떨어 대다가, 의젓한 모습과는 다르게 나약한 얼굴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생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왕자의 신분만 아니었다면 살아갈 기회가 있었을 텐데,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악착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혹여라도.
미련을 남긴다면, 그것이 론돈 백작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박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중충한 날이었다.
먹구름이 끼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론돈 백작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화륵.
화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높게 쌓은 나무의 중심에는 두 구의 시체가 누워 있었고, 마법으로 일어난 불길은 비를 맞으면서도 빨갛게 일어나며 주변을 불태웠다.
그러한 장면을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았다.
론돈 백작 뒤로 사람들이 도열했고, 그들은 왕가의 마지막 모습에 그간의 잘못을 잊고 예의를 보였다.
국왕과 왕자.
사인은 공개적으로 밝혔다.
국왕은 협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왕자는 악의 무리의 마수로 인해 죽었다고 말이다.
레드포드의 백성들은 레드포드 국왕을 원망했었다.
나라를 나락으로 빠트린 죄는 벌을 받아 마땅하나, 그간의 사연은 분노의 불길을 ‘악의 무리’를 향해 번지게 했다.
론돈 백작의 의도였다.
기반마저 흔들리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모두가 공통의 적으로 생각할 존재가 필요했다.
나라를 파탄 내고.
왕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재클린을 통해 폭동까지 선동한 존재.
그게 크로노스 제국이라는 말이 돌면서,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국왕 폐하. 샤를로 왕자님.’
론돈 백작은 복잡한 눈빛으로 불길을 바라보았다.
결국.
레드포드는 각자의 사연이 있었다.
국왕은 국왕만의, 왕자는 왕자만의, 자신은 자신만의, 재클린 또한 재클린만의 사연이 존재했다.
만약에 서로 조금만 솔직했더라면.
고여서 썩어 버린 문제들을 해결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잘못된 선택들이 반복되어 현재의 레드포드를 만들었다.
한때는.
론돈 백작은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살았다.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왕국의 짐을 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재클린이 눈에 보이는 진실에 따라 자신을 공격했던 것처럼, 자신 또한 국왕의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왕궁을 공격했다.
국왕의 만행이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왕이 죽음을 택하고서야 진실을 알았다는 것이, 못내 그의 가슴에 남았다.
‘레드포드는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눈앞의 진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크로노스 제국과 같은 악의 무리의 음모에도 무너지지 않을 그런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복수를 해내겠습니다.’
이를 악물었다.
모두 타 버려서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불길에.
론돈 백작은 걸음을 돌리며, 이제는 자신을 따르는 왕실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며칠 안으로 즉위식(卽位式)을 거행할 것이다. 장소를 선별하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도록.”
“알겠습니다.”
죽음을 뒤로하고.
지금부터는, 산 자들의 삶을 살아갈 차례였다.
* * *
보통 반란으로 확보한 정권은 백성들의 환호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론돈 백작은 달랐다.
국왕과 왕자의 죽음으로 대(代)가 끊겼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론돈 백작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다.
반란으로 얻은 왕좌가 아니었다.
론돈 백작은 분명히 병력을 이끌고 국왕을 찾아갔었지만, 왕궁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기에 일반 백성들은 론돈 백작의 즉위에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광했다.
론돈 백작이 누구인가.
사람들의 시선 밖에서 레드포드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다.
매국노라고 불렀던 세월이 죄책감으로 남았기에, 론돈 백작을 향한 마음은 더욱 열광적으로 변했다.
“국왕 폐하!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우와아아아아아!”
“레드포드! 레드포드!”
“레드포드! 레드포드!”
왕궁 앞.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새로운 국왕의 즉위를 알리는 자리에, 그들은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론돈 백작.
아니, 이제는 레드포드 국왕이라고 불리는 그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저들이 지금부터 내가 다스릴 백성들이다.’
열흘 전.
상황을 모두 마무리하고, 로만 드미트리는 레드포드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론돈 백작님. 진실이 드러난 지금, 사람들은 백작님을 향해 열렬한 환호성을 보낼 것입니다. 마치 매국노라고 비난하던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겠지요. 그러한 변화에 큰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매국노라고 부르던 사람들도, 존경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그리고 백작님을 공격했던 폭동에 가담한 존재들도. 모두 레드포드의 백성일 뿐입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앞으로 론돈 백작님의 통치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진실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은, 애초에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지도자의 잘못임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로만 드미트리의 말.
가슴에 새겼다.
레드포드 국왕은, 지난 기억들은 잊은 채 손을 번쩍 들었다.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환호성.
레드포드는, 결단코 지난 과오(過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 * *
레드포드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 그때.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로 복귀했다.
‘레드포드 왕국이 론돈 백작을 중심으로 안정을 되찾는다면, 드미트리는 든든한 우방국을 얻는다.’
론돈 백작.
그는 반드시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훗날 크로노스 제국과 전쟁을 벌인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크로노스와의 싸움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무너질 뻔했던 왕국 연합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레드포드는 단순한 우방국이 아니라 드미트리를 평생의 은인으로 대했다.
레드포드에 관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부터는 그들의 몫이다.
앞으로의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드미트리가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전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며칠, 여독을 풀고.
로만 드미트리는 크리스를 불렀다.
“크리스. 우리는 머지않은 시기에 발할라 제국으로 떠나야 한다. 그때, 모든 병력을 대동할 수는 없다. 발할라에서도, 그리고 드미트리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병사들은 ‘내가 없는 전장’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대외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사들의 특별 훈련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따로 전달할 사항이 있으십니까?”
“없다. 다만, 고된 시간이 될 테니 훈련을 준비하는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전하라.”
“알겠습니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드미트리의 훈련은 항상 고되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고되다는 단어를 언급하는 상황에, 밖으로 나온 그가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
카이로가 아닌.
이제는 드미트리의 섬광이라고 불리는 사내조차도.
이번만큼은, 훈련에 대한 긴장감이 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덧, 발할라가 말한 기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