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발할라 제국 (1)
그 무렵.
대륙 곳곳에서,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소문이 퍼졌다.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발할라 제국에서 올해도 전사들의 혼을 기리는 축제를 진행하는데, 대륙 십이검(十二劍) 바르보사의 상대로 로만 드미트리를 선택했대. 발할라 제국이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의미지. 만약에 바르보사마저 쓰러트린다면, 대륙 최초로 제국을 제외한 상위권 랭커가 탄생하는 거야.”
처음에는 사실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바르보사를 상대한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소문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다.
발할라 제국에서 초대장을 보냈는데도 로만 드미트리가 응답하지 않는다더라.
약간의 지체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의문에 불을 붙였다.
“겁먹었네.”
“그럴 만도 하지. 로만 드미트리가 이제껏 상대했던 검사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잖아. 대륙 랭커인 버틀러, 니콜라스 백작,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쓰러트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엄연히 하위권 랭커야. 사실 그들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바르보사는 쓰러트릴 수 없다고. 로만 드미트리의 재능이 뛰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벌써 바르보사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야.”
“역시는 역시네.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가 대륙 제일의 재능인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대륙에는 그보다 더한 괴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어. 로만 드미트리 또한,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거지.”
사람들이 실망감을 표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단번에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이유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싸움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메로스를 시작으로 계속되었던 싸움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매번 언더도그(Underdog)의 입장이었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대를 쓰러트리며 자신을 증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꼬리를 말았다.
상대가 상대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간의 행보와는 다른 모습에 실망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부풀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조롱하는 말들.
아직 축제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는데도, 사람들은 이미 로만 드미트리가 도망쳤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소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만 드미트리에게도 전달되었다.
‘발할라가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군.’
소문의 의도는 명백했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발할라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의 가능성에서 둘 다 본인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가 대결을 승낙한다면.
그들은 바르보사의 검에 쓰러진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려, 복수와 더불어 제국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다.
반대로 대결을 거절한다면.
소문을 활용해 명성을 깎아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소문처럼 대결을 피한 로만 드미트리의 선택을 조롱할 것이고, 대결을 치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겁쟁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발할라의 방식은 참으로 영악했다.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와 바르보사의 대결은 매우 불합리한 것인데도, 일부러 판을 키워서 로만 드미트리가 거절하면 안 되는 것처럼 상황을 유도했다.
일련의 상황.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황을 주도해서?
소문을 퍼트려서?
아니다.
처음부터 발할라의 초대는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다만, 애초에 바르보사의 승리를 전제로 까는 그들의 확신이 거슬릴 뿐이었다.
* * *
그날 저녁.
케빈이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주군, 제가 발할라행에서 제외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번 발할라행.
크리스를 비롯한 병사들이 명단에 포함되었다.
나머지는 드미트리에 남기로 했는데, 문제는 케빈이 후자에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케빈은 로만 드미트리의 판단에 토를 달지 않았다.
볏짚을 끌어안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겠지만, 이번과 같은 문제는 느낌이 달랐다.
신뢰의 대상에서 배제되는 것만 같았다.
발할라로 향하는 일은 분명히 위험을 동반할 텐데, 로만 드미트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자신의 검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도를 보였다.
발할라행을 대비한 특별 훈련.
케빈은 이를 악물고 견뎠다.
오로지 로만 드미트리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는데, 명단에서 제외된 선택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받아들일 것이다.
크리스가 더 강한 것은 사실이었고, 화가 나고 서운함이 생겨난다고 해도 주군에 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이유는 알고 싶었다.
케빈의 물음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번 발할라행은 매우 위험한 여정이 될 것이다. 크로노스와 발할라. 내게 복수를 바라는 세력들로서는, 공개적으로 드미트리를 떠나는 이번 일정은 내 목숨을 노릴 절호의 기회다. 그들은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로서는 발할라가 만들어 준 판에 응할 수밖에 없다.”
강제적인 이유가 아니다.
평판 따위는 상관없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필요한 일이라는 판단에 처음부터 발할라행을 결정했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싸움을 이겨 내야만 한다. 지금까지는 잘해 냈지만, 크로노스 제국과 같은 대륙의 포식자를 상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만약에. 전장에서 대륙 십이검을 만난다면 병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나. 그 이름값만으로도 위축될 것이고, 공포는 전체적으로 번져 나가 전쟁에 영향을 미치겠지. 그렇기에 단 한 번의 선례가 필요하다. 대륙 십이검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선례. 드미트리를 비롯한 왕국 연합에도, 대륙 십이검을 쓰러트릴 존재가 있다는 믿음.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바르보사.
그는 선례의 먹잇감이었다.
단순히 대륙 십이검을 쓰러트리며 상위 랭커로 도약하는 의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전쟁에서 병사들의 사기(士氣)를 돋울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다.
전쟁은 혼자만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다.
로만 드미트리가 일당백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는 병사들의 선전이 동반되어야 했다.
그리고.
발할라로 떠나는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케빈을 남긴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 일정의 위험성은 내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드미트리를 떠난 내가 적들의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내가 없는 드미트리가 위험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드미트리에 남을 필요가 있다. 케빈. 나는 네가, 그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혹시라도 적들이 모종의 계획을 꾸민다면. 내가 없는 전장에서 가장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낼 사람은, 케빈 바로 너다.”
너를 믿는다는 말.
그것이면 충분했다.
크리스가 아니라, 자신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낼 존재라는 믿음.
불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조금은 슬픈 표정을 보였던 케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의지에 차오른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드미트리를 지키겠습니다.”
환한 얼굴.
케빈은, 정말 단순한 인간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로만 드미트리는 병력을 대동하고 발할라로 향했다.
워프 게이트로도 수도로는 바로 이동하지 못하기에, 처음 도착한 곳은 국경과 인접한 파울로라는 이름의 도시였다.
초대장이 있기에 출입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파울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로만 드미트리와 그 일행들은 발할라가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잠깐 몸수색을 진행하겠습니다.”
파울로의 경비병들.
그들은 초대장을 대충 읽더니,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몸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앞에서 출입한 사람들은 보통 3분 내외로 출입한 것에 반해, 짐까지 확인하는 그들의 행동에 30분이 넘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당연히 수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무장은 허용 범위였기에, 경비병들은 다소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파울로는, 외부인을 반기는 도시가 아닙니다.”
그들은 끝까지 시비조로 말을 내뱉었다.
파울로.
경비병들의 말대로였다.
안에는 발할라 특유의 구릿빛 피부의 사람들이 즐비했는데, 그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일행을 발견하고는 다들 불쾌하다는 눈빛을 보였다.
호객 행위를 하던 사람들도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고,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사람들도 상대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걸음을 틀어 돌아갔다.
만약.
무장하지 않은 병력이었다면 그들의 반응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어깨를 부딪치며 시비를 거는 것이 세간에 알려진 발할라의 모습이었다.
“소문대로군요.”
크리스였다.
발할라로 떠나기 전.
앞으로 경험할 나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발할라 제국은 상당히 폐쇄적인 나라였다.
다양한 인종을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성장한 크로노스 제국과는 다르게, 발할라는 남부 밀림이라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나라의 근간을 형성했다.
한때는 근친혼(近親婚)을 통해 발할라의 혈통을 유지했었던 것처럼. 그들은, 발할라를 제외한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배척했다.
제국으로 거듭나며.
일부분은 완화되었으나, 그렇다고 그들의 본질마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륙에서 가장 어려운 상대로 언급되는 인종이 바로 발할라의 사람들이지. 발할라 태생이 아니라면 적대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세상이기에, 외부인들로서는 이곳의 출입을 반기지 않는다.’
세간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발할라의 폐쇄적인 문화가 없었다면.
크로노스 제국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고.
폐쇄적인 문화를 일부분 유지하면서도, 발할라는 크로노스에 버금가는 강대국을 이룩했다.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발할라 제국에서는 손님을 안내할 사람을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 *
파울로의 한 여관.
허름한 외관에 다 낡아 빠진 그곳에, 로만 드미트리와 일행이 짐을 풀었다.
다른 숙소들은 외부인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헛걸음을 하다, 웃돈을 얹어 주겠다고 말하고서야 드디어 휴식을 취할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여관의 식당.
로만 드미트리는 내려와, 식당의 외관만큼이나 향이 그리 좋지 않은 차를 마셨다.
‘나를 초대한 것과는 별개로, 발할라 제국은 내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의미겠지.’
발할라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면,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
발할라는 의도적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알아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축제가 벌어질 수도로 찾아오기를 바랐다.
재밌었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홀대하는 반응은, 발할라 제국에 출입하는 모든 외부인이 겪는 시련이었다.
그때였다.
“에이, 술맛 떨어지게.”
쾅.
조금 떨어진 테이블.
그곳에서 술을 마시던 취객이, 다소 달아오른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그의 일행들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여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들은 계속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살폈다.
“어디에서 온 녀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부인이라면 조용히 올라가서 잠이나 자라고. 건방지게 발할라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공간에서 같이 있으려고 하지 말고. 난 너희 같은 녀석들만 보면 화가 나. 고생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은 것처럼, 피부가 새하얘서 빛이 나잖아.”
취객이 낄낄 웃었다.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앞에서 얼쩡거렸다.
뒤에 크리스를 비롯한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흉흉한 기세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얼굴을 들이밀었다.
덤덤히 차를 마시는 모습에, 취객은 분노가 일었다.
“이 새끼가 자꾸 사람을 무시하네. 썩 꺼지라고.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 내가 네 머리채를 잡아끌어 위로 보내 주지. 어때? 괜찮겠어?”
발할라.
그들이 바라는 상황이었다.
타국의 사람들이 흔하게 경험하는 인종 차별.
자신의 반응을 살피려는 발할라의 의도에, 로만 드미트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크리스.”
“예.”
“지금부터 계획한 대로, 우리가 발할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취객이 끼어들었다.
그 순간.
확.
크리스가 취객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빠악!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그대로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