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615)

229화 발할라 제국 (4)

순간.

파울로 남작은 본인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일이다.

영주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또한 전사로서 살았던 사람이기에, 단순히 기세에 압도되어 물러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발할라가 폐쇄적이고 인종 차별이 심한 나라일지라도.

결투의 승패(勝敗)를 받아들이는 태도만큼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패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약속대로 앞선 일은 묻어 두고, 직접 수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분노를 삼켰다.

상부의 명령은 논외였다.

서로가 원하는 대로 결투를 치렀고, 패배했다면,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파울로 남작이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일반 병사들이 나서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야인들을 데리고 옮겼다.

‘야인들을 이리도 무자비하게 쓰러트리다니. 로만 드미트리. 어쩌면, 생각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번 대결.

사람들은 바르보사의 승리를 확신했다.

최근에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명성을 떨친다고 한들, 십 년도 전부터 대륙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존재가 바르보사다.

그래서 로만 드미트리가 승낙한 것은 의외였다.

발할라는 노골적으로 복수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대담하게도 물러나지 않는 선택을 내렸다.

발할라와 같은 성향의 존재.

돌연변이였다.

약소국 출신에 불과한 주제에, 그에 걸맞지 않은 성향을 타고났다.

파울로 남작이 말했다.

“일단 새로운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수도로 직결하는 워프 게이트의 일정을 파악하는 동안 숙소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일정이 나오는 대로 곧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추태에 대해서는 사죄드리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의 말씀처럼 발할라는 인종 차별이 있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발할라의 역사를 알고 계신다면 저희의 인식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랜 옛날.

발할라가 ‘남부의 야만인’으로 불리던 시절.

대륙의 사람들은 밀림의 자원을 갈취하기 위해, 발할라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하고 그들을 공격하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는 발할라가 상당한 힘을 갖추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지만, 선조들의 기억 속에 켜켜이 쌓였던 아픔의 기억은 다른 인종에 대한 반감을 남겼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발할라 황실이 외부의 인재들을 받아들이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아직 모든 사람이 황실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력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나.

아직도 발할라를 위해서는, 외부의 인재들보다는 ‘발할라 태생’들을 육성하자는 것이 일반 백성들의 의견이었다.

기존의 것을 추구하는 보수 세력.

변화하길 바라는 진보 세력.

발할라의 현실이었다.

변화한 태도로 앞서 걸어가는 파울로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굳이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승패로 원한을 마무리하는 것.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익숙한 마교의 방식이기도 했다.

* * *

파울로 남작은 언행(言行)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허름한 여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숙소로 안내해 주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령했다.

커다란 방 안.

로만 드미트리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발할라 제국에 관한 생각을 찬찬히 정리했다.

‘발할라는 크로노스와는 다르게 상당히 이중적인 나라다. 크로노스는 대놓고 대륙 정벌의 야망을 드러내는 반면, 발할라는 전사들이 중심을 이루면서 현재에 만족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 발할라는 분명히, 크로노스와 비슷한 야망을 품고 있다.’

그간의 역사.

발할라의 행보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다.

항상 크로노스를 비난하는 듯하면서도,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굳이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들 또한.

발할라를 제외한 다른 국가들이 알아서 자멸하기를 바랐다.

사실 발할라의 야심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사들의 나라라는 호칭에 환상을 가지지만, 남부의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세력이 제국을 형성하기까지는 온갖 음모에 맞설 머리가 필요하다.

실제로 발할라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했다.

그렇기에 카이로 내부에 ‘덴버 백작’이라는 본인들의 하수인을 심어 넣었고, 대륙 정벌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이번 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덴버 백작의 복수를 위해, 그들은 암살이 아니라 결투에 초대하는 매우 영악한 방법을 택했다.

‘발할라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나를 자극하는 방법을 택했다. 만약 내가 바르보사를 쓰러트린다면. 그들은 과연 결과에 승복할까. 보수 세력들은 결과에 승복하겠지만, 현재 발할라를 주도하는 이들은 진보 세력이다.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발할라에서의 행보는 위험할 수밖에 없다.’

파울로에 발을 들인 순간.

위험은 피할 수 없었다.

이곳은 사지(死地)였고, 지금부터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국은.

힘이 있는 자들은.

변명이 필요하지 않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위해를 가한 일에 사람들이 비난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무마되는 존재였다.

‘마치, 전생과 같구나.’

약자의 삶.

익숙했다.

백중혁이라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한 환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을 쟁취했다.

그렇기에.

발할라가 무슨 의도이든 상관없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할수록.

마지막을 장식을 피날레는, 더욱 불타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

다음 날.

파울로 남작은 사람을 보냈다.

“산체스라고 합니다. 수도까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햇볕에 잘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건 머리를 뒤로 묶은 그는 일단 워프 게이트가 있는 주변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일행을 위한 말은 전부 마련되었다.

산체스를 따라서 파울로를 나섰고, 지루한 이동 길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에 대륙 랭커인 버틀러를 쓰러트리고,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렸을 때는 100위부터 차례대로 올라가면서 카이로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고 말입니다. 소문을 들으면서 얼마나 감탄이 나오던지. 비록 발할라 태생은 아니지만, 발할라 역사에 나오는 전사가 현세에 나타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말이 많은 사내였다.

처음에는 존경심을 보이던 그가, 이동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은 예민한 주제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홀로 쓰러트린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이게 소문이라는 것이 항상 과장되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믿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구스타보 기사단장입니다.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그 인파를 뚫고 기사단장을 베어 버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왜, 역사책에 나오는 허황한 이야기에서는 한 명의 검사가 땅도 가르고 하늘도 베어 버린다지만, 로만 드미트리님은 살아 있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툭툭 건드리는 듯한.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는 발언에, 크리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말조심하십시오.”

“괜찮다. 산체스라고 했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본론을 말해라.”

로만 드미트리의 말에.

크리스는 분노를 억눌렀다.

발할라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손님에 대한 예의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산체스가 히죽 웃었다.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의 안내는 다른 사람이 맡았으나, 그는 부득불 본인이 하겠다고 나섰다.

“말이 나온 김에 솔직히 말씀드리죠. 로만 드미트리. 당신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바르보사 님의 상대로 낙점을 받은 것입니까?”

그의 발언.

공격적인 태도는, 로만 드미트리가 알지 못하는 발할라만의 이야기를 의미했다.

* * *

산체스

그는 발할라 랭킹 12위인 모랄레스의 제자였다.

모랄레스와 바르보사.

발할라에서 매우 유명한 악연(惡緣)이었다.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경쟁하던 사이였는데, 바르보사의 눈부신 재능에 모랄레스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모랄레스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그 또한 발할라에서도 천재라고 불릴 만한 재능을 타고났건만, 바르보사의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모랄레스는 축제에 오를 전사로 낙점받았다.

전사에 혼을 기리는 축제.

그곳에서 죽은 자는 승패와는 관계없이 발할라로 간다는 말이 있기에, 모랄레스는 기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상대가 바르보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진심으로, 전사들의 신이 자신을 위한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바르보사를 쓰러트린다면.

그간의 악연을 청산할 기회였다.

반대로 죽는다고 할지라도, 발할라를 위해 죽는 일이니 이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의 등장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발할라 수뇌부의 결정에 모랄레스는 격하게 반발했으나, 이미 내린 결정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산체스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님. 당신이 빼앗아 간 기회는 발할라의 모든 전사가 바라는 염원(念願)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무대에 오른단 말입니까. 발할라의 수뇌부들은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는 당신이 그에 적합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저는 세간에 들리는 소문을 믿지 않습니다.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지 않습니까? 제가 모시는 모랄레스 님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대륙 제일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제대로 검증받지도 못했는데, 우리 모두가 바라는 자리를 강탈한 것입니다.”

자격을 강탈당한 이후로.

모랄레스는 고통 속에 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산체스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악감정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당신은 그 자리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누구라도 그 무대에 설 수만 있다면, 목숨을 던지겠다는 전사들이 발할라에는 많습니다.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본인이 모랄레스 님을 대신해서, 바르보사를 상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바르보사의 일검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면, 그날을 기다리던 발할라 전사들의 상심한 마음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의 말은.

발할라 제국과 똑같았다.

바르보사가 패배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믿음.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소문을 퍼트렸던 것처럼,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로만 드미트리를 평가절하했다.

그 순간.

히이이잉.

로만 드미트리가 말의 고삐를 잡아채며, 걸음을 멈추었다.

* * *

처음부터 끝까지.

발할라 사람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복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

발할라가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들.

멍청했다.

그게 정말 옳은 일일까.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겨우 양에 불과한 이가 맹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용기라고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그런데 발할라의 사람들은, 멍청할 정도로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발할라.

그곳이 실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의구심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산체스. 네 판단의 근거는 무엇이지?”

전생.

천마의 아들로 살아가며, 힘을 드러낼지언정 사람들의 무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한번 얕보이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끝을 의미했다.

발할라의 태도가.

산체스의 발언이.

로만 드미트리가 무대에 오르는 것에 실망한다는 발할라 사람들의 반응이.

로만 드미트리의 심기를 건드렸다.

산체스가 말했다.

“……근거는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쌓은 평판은, 아직 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

때마침.

원하는 그림과 부합되는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가 사나운 웃음을 보였다.

“나에 대한 의문이 팽배하다면, 카이로와 발할라에서의 결과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아직 대결이 치러지기 전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남아 있다. 모랄레스를 비롯한 발할라의 전사들에게 전하라. 전야제(前夜祭)가 끝나기 전까지 나를 찾아오는 전사가 있다면, 내 자리를 걸고 기꺼이 상대해 주겠다고. 어떤가. 네가 직접 내게 도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네가 검을 뽑는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너를 상대해 주지.”

그 말에.

산체스는, 순간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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