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615)

230화 축제를 위한 축제 (1)

명백한 도발이었다.

산체스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자신도 모르게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딱 거기까지.

검을 뽑지는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담담한 모습이었으나, 그 너머로 날카로운 기세가 산체스의 신경을 자극했다.

크리스였다. 그 또한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댄 상태였는데, 본능적으로 자신이 공격하는 것보다 크리스가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모랄레스의 제자인 산체스는 3성의 경지에 올랐건만, 이 위협감은 그로서도 생소한 세계였다.

‘……드미트리의 섬광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소문으로 들었다.

한때는 카이로의 섬광이라고 불리던 사내.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인물 중에 금발의 미남이 있는데, 그가 검을 뽑으면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의 스피드로 목을 베어 버린다고.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 크리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연속해서 적들을 베어 버리는 압도적인 무력에, 크리스는 이제 무명의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발할라의 사람들은 그 소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전장이라는 장소는 늘 그렇듯, 말도 안 되는 업적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었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로만 드미트리가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일격에 베어 버렸다는 소문처럼, 크리스 또한 허황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는 발할라에 비해서 너무 작은 세상이었고, 그간의 역사가 카이로 따위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가 탄생할 수 없음을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겨우 크리스를 상대로도 입이 바짝 마르는 상황에, 산체스는 상대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간의 소문은 허황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정말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압도할 만큼의 실력자라는 사실은 확신할 수 없지만, 휘하의 수하가 이 정도의 경지라면 사실에 근간한 소문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구나. 아무런 정치적인 수작질 없이, 정말 실력으로 바르보사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건가.’

슥.

손을 거두었다.

상대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만 드미트리가 바르보사에 어울리는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존재라고 한들.

발할라의 축제는, 발할라의 전사들만을 위한 자리다.

산체스가 말했다.

“방금 내뱉은 말, 후회하지 마십시오.”

수도에 도착하는 대로 알게 될 것이다.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말.

그 발언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를.

* * *

발할라의 수도.

마린(Marin)에 도착했다.

국경 초입에 존재하는 파울로가 다소 낙후되어 있는 느낌이었다면, 마린은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거대한 성벽과 발할라 특유의 건축 기법이 인상적인 도시였다.

수도에 들어설 때는 파울로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

미리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덕분에 복잡한 과정은 생략하고 곧바로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로만 드미트리 님의 안내를 맡은, 조나탄 자작이라고 합니다.”

“로만 드미트리입니다.”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손님들이 머무르는 장소로 추정되는 거대한 건물의 접객실이었다.

일단 자리에 앉았다.

하인들이 내어온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조나탄 자작이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산체스를 통해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바르보사를 상대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발할라 전사들의 도전을 받아들이시겠다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단 하루 정도는 입을 함구시키겠지만, 여기에서 말을 주워 담지 않는다면 조금 많이 곤란해지실 겁니다.”

“제가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끌끌끌, 그렇다면야 저로서도 어쩔 수 없죠. 다만, 발할라의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무대에 오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발할라에서 신의 축복을 받으며 죽는다는 것. 그것은 전사들이 바라는 평생의 염원이고, 상대가 바르보사라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입니다.”

그도 차를 들이켰다.

발할라 사람들이 주로 마시는 차의 텁텁한 향에, 조나탄 자작은 웃음을 보이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각설하고. 축제는 지금으로부터 3일 뒤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시다시피 축제 전날에는 축제를 위한 전야제(前夜祭)가 진행되는데, 발할라는 성공적인 축제를 위해 전야제에서 반드시 피를 보는 전통이 있습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발할라 제국의 가문들이 가문을 대표하는 검사들을 한 명씩 선발해서 대결에 내보내는데, 거대한 무대에서 총 30명의 전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싸우게 됩니다. 항복은 없습니다. 최후의 1인이 되거나, 아니면 죽거나. 그렇게 최후의 승자로 남은 전사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발할라의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익히 들었던 내용이다.

30명의 전사.

29명의 죽음을 대가로 살아남은 최후의 전사는, 본 무대만큼이나 발할라의 명예가 걸린 자리였다.

“전야제를 빛내기 위해, 로만 드미트리 님도 휘하의 검사를 한 명 출전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참고로 30인의 대결에 참전하는 검사들은 대륙 랭킹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이어야만 합니다. 그만한 수준의 검사들은, 난전(亂戰)보다는 검술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듣기로는 드미트리의 섬광이라는 인물이 괜찮을 것 같은데…….”

말끝을 흐렸다.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그들은 크리스를 무대에 올리길 바랐다.

본무대를 시작하기 전에.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드미트리 최고의 검사라고 불리는 크리스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여 버릴 의도가 분명했다.

거절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발할라에 발을 들인 지금으로서는, 크리스와 같은 핵심 전력이 위험해질 만한 일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로만 드미트리는 웃음을 보였다.

상대와 시선을 마주하며 그 너머로 보이는 노골적인 의도에,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역시 시원시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전야제가 있는 날까지는 이곳에서 편히 쉬십…… 아차차.”

조나탄 자작이 히죽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

호전적인 인물이다.

제법 마음에 들었지만, 발할라에서 자존심을 부리는 대가는 목숨이었다.

“산체스에게 내뱉은 말이 있으니, 편히 쉬시는 건 힘드시겠군요. 부디 별일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발할라 황실의 체면이 있지, 로만 드미트리 님을 바르보사의 상대로 어렵게 모셨는데 막상 본무대에서 상대가 바뀌는 불상사가 있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틀 뒤. 전야제 날에, 서로 웃는 얼굴로 다시 보길 기원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조나탄 자작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만 드미트리는 접객실에 남았다.

자신을 위협하는 경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남은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머무는 숙소 앞에,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에 로만 드미트리가 있다고?”

“주제도 모르는 새끼. 대륙에서 명성을 조금 떨쳤다고, 발할라 신이 내려다보는 무대에 오르겠다는 욕심을 부리다니. 로만 드미트리는 바르보사의 상대로 나설 자격이 없어. 겨우 몇 합 겨루지도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면, 발할라 신은 허접한 무대에 분노할 것이 분명하다고.”

어제저녁.

산체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만 드미트리가 무대에 오르는 일에 불만이 많았는데, 로만 드미트리가 발할라의 전사들을 도발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발언이란 말인가.

대륙에서 명성을 떨친 지 겨우 2년 안팎인 녀석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전사들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니.

사실.

이번 문제로 발할라에서는 말이 정말 많았다.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황실에 선택을 재고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불가하다는 답변에 그들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

두 제국 모두 황실이 압도적인 권력을 주도하는 나라였고, 발할라 황실이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말하니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억눌렀던 분노를.

로만 드미트리가 건드렸다.

지금부터는, 발할라 황실이 만류한다고 한들 끝을 볼 작정이었다.

쾅쾅쾅!

“로만 드미트리, 나와라!”

“네가 원하는 대로 도전하기 위해 왔다. 당장 밖으로 나와서, 내 칼을 받아라!”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수백이 넘는 사람들.

행렬(行列)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아직 해도 뜨지 않을 시각에 몰려들었을 뿐이지, 시간이 갈수록 몰려드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아지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할 만큼의 강자는 아니었다.

다만, 발할라의 전사로서 로만 드미트리가 날뛰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헉.”

“바톨로다.”

“바톨로도 왔구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무리를 뚫고, 바톨로라고 불린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발할라 랭킹 89위.

바톨로는 발할라 랭킹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쓰러트린 것이 사실이라면, 4성에 불과한 바톨로로서는 로만 드미트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바톨로는 본인을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발할라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소문을 믿지 않았다.

헥토르와의 전쟁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버틀러를 상대로 접전을 벌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뒤에 니콜라스 백작을 쓰러트리고,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일격에 쓰러트렸다는 소문은 말이 되질 않았다.

바톨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로만 드미트리! 이 바톨로가 상대해 주마!”

그 순간.

끼익.

문이 열렸다.

흉흉한 눈빛을 보이는 사람들.

마침내, 로만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 * *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은 덤덤했다.

시야 가득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에도, 놀라기는커녕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전야제까지는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너희들 모두의 도전을 받아 주겠다.”

패배의 가능성은 배제된 발언이었다.

사람들이 분노했다.

그들은 바닥에 침을 뱉고, 욕설을 말하며, 아직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반감을 보였다.

어째서 저렇게 당당하단 말인가.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먼저 상대하겠다고 발언한 바톨로를 향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바톨로는 상대의 기세를 읽었다.

딱히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는 시선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무형(無形)의 힘을 보였다.

그건 오히려 일반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는 기세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나름대로 발할라 랭킹에 발을 들인 바톨로로서는 로만 드미트리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바톨로는, 사나운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내가 상대해 주마.”

탁.

무기를 들었다.

거대한 크기의 도끼를 상대에게 겨누며, 로만 드미트리 주변을 천천히 맴돌았다.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상대를 압도하는 덩치와는 달리, 바톨로는 신중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산체스가 한 말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는 마린에 도착하기 전에 파울로에서 이미 한바탕했다고 들었다. 야인들을 상대로 굴복할 때까지 뺨을 날렸다고 했었지. 로만 드미트리. 이 마린에서는 파울로와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네게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어떠한 폭력 앞에서도, 이 바톨로의 입에서 패배를 시인하는 말을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사람들이 보고 있다.

로만 드미트리의 소식에 분노한 사람들처럼, 그 또한 이번 문제를 그냥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순간.

땅을 박찼다.

상대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먼저 공격하는 것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콰르르르르릉.

폭발하는 오라.

바톨로의 돌진은 빨랐다.

거대한 덩치와는 다르게, 전장에서 갈고닦은 예리한 움직임은 상대와의 거리를 단번에 좁혔다.

발할라의 랭커.

진정한 전사.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전사의 핏줄은 그렇게.

푸확.

비틀거렸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피에, 바톨로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흐릿해지는 의식 너머로.

“다음.”

로만 드미트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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