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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화 (231/615)

231화 축제를 위한 축제 (2)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바닥에 흘러내리는 피.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이 아니다.

발할라의 전사로서 대결을 치르다 죽는 일은 너무나도 흔한 상황이었으나, 문제는 바톨로가 패배한 과정이었다.

바톨로는 발할라의 랭커다.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실력자였고,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경계심에 끝까지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련의 과정.

우위를 점했다.

사람들이 기대한 모습은, 당황한 로만 드미트리가 뒤로 밀려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단 일격에 당해 버렸다.

일반 사람들로서는 어떻게 공격했는지 제대로 확인조차 하질 못했는데, 바톨로가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구스타보 기사단장을 일격에 쓰러트렸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흔들리는 동공을 감출 수 없었다.

“다음.”

로만 드미트리의 목소리.

담담했다.

크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로만 드미트리는 바톨로의 시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파울로와 마린.

대결의 목적이 달랐다.

파울로에서는 자신의 입국을 알리는 무력시위였다면, 지금부터는 바르보사의 상대로 나설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자리였다.

압도적인 폭력으로 항복을 받아 낼 필요는 없었다.

도전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하라는 명확한 사례. 백 마디 말보다, 단 한 번의 대결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 주었다.

만약 발할라가 아닌 다른 나라였다면.

사람들은 이만 물러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정으로 발할라를 따르는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실력이 진짜라는 사실에 호승심이 일었다.

“발할라여!”

앞으로 나서는 사내.

무명의 인물이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강자의 검에 본인의 존재가 빛나길 바랐다.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 주마.”

검증의 자리.

로만 드미트리를 시험할 무대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 *

심판도.

룰도 없었다.

단순하게 무력을 겨루는 자리였고, 도전자가 나서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뿐이었다.

아무런 신호가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도전자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타탓.

도전자가 먼저 단검을 뿌렸다.

발할라 전사들의 대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결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일대 다수의 대결은 문제가 되지만, 지금처럼 단검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급소를 공격하고, 귀를 깨물고, 상대의 눈을 찌를지라도.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발할라에서 우선되는 가치였다.

휙휙.

단검이 스쳐 지나갔다.

도전자는 상대의 회피 범위를 예상해서 단검을 던졌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을 지나치는 단검.

도전자가 이를 악물었다.

오라를 일으키며, 상대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번뜩.

푸확.

머리가 날아갔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에, 몸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동작 그대로 로만을 지나쳐 바닥을 나뒹굴었다.

후두둑.

하늘에서 떨어지는 핏물.

로만 드미트리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피를 받아들이는 것은 마교의 방식이었다.

“다음.”

“나는 발할라의 가투다.”

가투라는 이름의 사내.

이번에는 발할라의 랭커였다.

바톨로와 랭킹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데도, 그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로만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경이로운 무력이었다. 진정한 강자에게 죽는 것은 발할라 전사들에게 허락되는 축복이다.

앞선 결과에, 가투는 로만 드미트리의 검증을 위해 죽는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

후웅.

시작은 가투의 선공이었다.

사슬에 매달린 철퇴를 사용하는 가투는, 거대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철퇴를 휘둘러 상대를 공격했다.

콰직!

바닥이 박살이 났다.

엄청난 힘이었다.

오라가 일어나며 사슬의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조종했고, 철퇴가 딸려 나오며 로만 드미트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차단했다.

독특한 공격 방식이었다.

일반적인 오라 검사들은 검이라는 보편적인 매개체를 사용하건만, 발할라 제국의 전사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라를 활용했다.

발할라.

그들이 강한 이유였다.

변칙적인 공격은 허점을 찔렀고, 진정으로 발할라의 전사라고 불리는 존재들은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였다.

 파울로에서 항복을 말하던 이들.

 그들도 발할라의 태생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지금 마주하는 이들이야말로 발할라의 근본을 대표하는 부류였다.

콰르르르르르릉.

“어딜!”

가투가 오라를 일으켰다.

먼발치에서 철퇴의 방향을 바꾸며, 로만 드미트리를 어떻게든 박살 내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파파팟.

바람이 불었다.

오라로 둘러싸인 사슬이 단번에 잘려 나갔고, 억제력을 잃은 철퇴가 바닥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가투로서는 죽음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이대로 항복을 외치지 않는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검에 목이 날아가겠지만, 가투는 철퇴에 달린 짧은 사슬을 맨손으로 잡더니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휘둘렀다.

“죽…… 커억.”

서걱.

번뜩이는 검.

가투는 광기에 차오른 얼굴로 머리가 날아갔다.

상대가 압도적인 강자라는 사실에, 오히려 들뜬 모습이었다.

툭.

데구르르.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다음.”

대결은 계속되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전사들은 계속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도전 의사를 드러냈지만, 유의미한 접전을 보이는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시체가 쌓여 갔다.

처음에 한두 명이 죽어 나갈 때는 그래도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기대감을 보이던 사람들이, 십수 명의 시체로 늘어났을 때는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발할라 57위의 랭커가 나섰는데, 그도 공방을 몇 번 주고받더니 가슴팍이 길게 베였다.

푸확.

부르르 떨리는 몸.

랭커가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로서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다음.”

반복되는 말.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발할라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죽음을 불사했지만, 발할라의 사람들 전부가 앞선 사람들처럼 목숨을 내던지는 부류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똑같았다. 전사의 나라라는 발할라의 명성을 유지해 주는 존재들은 일부일 뿐.

대부분, 파울로에서와 똑같이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피했다.

혹여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을 지목할까 봐, 사람들은 이제 감히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아직 해는 길다. 더 도전할 사람은 없는 건가.”

이른 아침.

사람들은 사납게 몰려들었다.

그런데 이제 막 주변이 밝아졌을 뿐인데, 사람들의 사나운 기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그들이 최소한의 자격을 증명했다.

정말 죽기를 원하는 자가 아니라면, 웬만한 실력으로는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전야제까지는 하루가 남았다. 도전할 자가 있거든, 언제든 문을 두드려라.”

이만 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사람들은 안으로 사라지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마린이 발칵 뒤집혔다.

소문의 중심은 로만 드미트리였다.

산체스를 통해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들었는데,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벌써 끝났다고?”

“그렇다니까.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몰려가기는 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공격을 제대로 받아 내는 사람이 없었어. 도전하는 족족 머리가 날아가니까, 한 십수 명쯤 죽었을 때부터는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일단, 더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돌아온 거고.”

“로만 드미트리가 그 정도로 강했다니. 발할라의 랭커들은 어디서 뭘 한 거야?”

“이 사람아. 랭커들이 안 나섰을 것 같아? 시작부터 일격에 목이 날아간 사람이, 발할라의 랭커 중 한 명인 바톨로였다고. 그 외에도 가투와 같은 랭커들이 나섰는데,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했어. 그게, 내가 방금까지 목격한 진실이야.”

“이런 미친.”

사람들이 경악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로 패배한 사람들의 이름값.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접전 끝에 바톨로가 죽었다고 말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라도 하겠지만, 일격에 죽어 버렸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머나먼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을 부정했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버틀러, 니콜라스 백작, 마지막으로 구스타보 기사단장마저 압도적으로 쓰러트렸다는 말에 흔히 영웅을 만들려는 전장 특유의 헛소문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바톨로를 비롯한 랭커들의 이름값이,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명확한 근거가 있었음을 증명했다.

“……20대의 나이에 발할라의 랭커들을 압도하는 실력이라니. 카이로 왕국이 크로노스 제국을 어떻게 물리쳤나 했는데,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 탄생했구나.”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로만 드미트리가 이대로 축제 무대에 오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직도 부족했다.

바르보사.

발할라의 최상위 랭커다.

그간의 소문을 인정한다고 한들, 바르보사의 상대로 적합하지는 않았다.

“최상위 랭커들이 나섰으면 좋겠는데. 이대로 로만 드미트리를 축제 무대에 세울 수는 없잖아.”

“혹시 모랄레스 님이 나서지 않을까? 그분의 제자인 산체스가 로만 드미트리의 소문을 알리기도 했고, 사실 애초에 바르보사의 상대는 모랄레스 님이었잖아. 그분이라면 충분히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수 있어. 그리고, 발할라를 대표할 전사로 어울리는 분이기도 하고.”

“그렇지.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모랄레스 님을 이길 확률은 희박해.”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모랄레스.

그가 나서기를 바랐다.

대륙 십이검에 거론되지는 않지만, 모랄레스는 발할라의 모든 전사가 인정하는 괴물이었다.

필승(必勝).

그들은, 자국을 대표하는 전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화륵.

화르륵.

불빛이 일렁였다.

어두컴컴한 공간을 비추는 붉은 불빛 사이로, 거구의 사내가 경건하게 마른 천으로 검의 표면을 닦았다.

“산체스. 내가 왜 바르보사를 상대하려 하는 줄 아느냐.”

사내의 정체.

모랄레스였다.

모랄레스의 말에, 산체스는 정답을 확신하는 어투로 말했다.

“과거의 악연(惡緣) 때문입니다.”

“네 말도 맞다. 애초에 바르보사와 나의 관계는, 지긋지긋한 악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세간의 소문과는 다르게 악연의 근본적인 이유는 바르보사를 향한 열등감 때문이 아니다. 바르보사는. 발할라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륙 십이검은 생각만큼 전사의 자긍심을 타고난 존재가 아니다.”

기억 너머.

모랄레스는 바르보사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그와 싸움을 벌였을 때, 바르보사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모랄레스를 쓰러트렸다.

그때부터였다.

바르보사라는 이름에, 모랄레스는 이를 갈았다.

“나는 바르보사가 역겹다.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그가 발할라의 축복을 받은 존재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와의 대결을 바랐다. 바르보사와는 한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기에. 발할라의 전통을 짓밟는 버러지 같은 수뇌부들의 나팔수인 바르보사를 쓰러트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그동안 검술을 연마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내 자리를 빼앗았다. 그것은 나를 무시하는 선택이거나, 어쩌면 바르보사를 보호하기 위한 수뇌부들의 더러운 계책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축제의 무대는 내 자리라는 것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산체스로서는 의외였다.

바르보사와 모랄레스.

둘의 악연이, 단순히 어렸을 때부터 이루어졌던 경쟁 관계가 아닌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몰랐다.

모랄레스가 검을 들었다.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는 대검은, 압도적인 기세를 풍겼다.

“산체스. 지금부터 발할라의 사람들을 불러모아라. 나와 로만 드미트리의 대결을 모두가 지켜볼 수 있도록. 내가 바르보사의 상대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발할라 수뇌부에게 증명하겠다.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린다면. 그때는, 바르보사는 나와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겠지.”

만약 패배한다면.

자신의 그릇은 그 정도일 뿐이다.

문신으로 가득한 모랄레스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햇살이 비추는 밖으로 나섰다.

발할라의 괴물.

이제까지 상대했던 존재들과는 격(格)을 달리하는 괴물이, 마침내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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