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4/615)

234화 축제를 위한 축제 (5)

산체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모랄레스의 패배.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하늘 같은 스승님이, 자신보다 어린 로만 드미트리에게 패배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시종일관 우위를 점했고, 모랄레스는 끝까지 발악하다가 전사로서 패배의 대가를 받아들였다.

땅에 번지는 붉은 피. 모랄레스가 정말 죽었다는 사실에, 산체스는 문득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내뱉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 자리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누구라도 그 무대에 설 수만 있다면, 목숨을 던지겠다는 전사들이 발할라에는 많습니다.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본인이 모랄레스 님을 대신해서, 바르보사를 상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는.

본인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아직 상위 랭커들에 대적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같잖았을까.

모랄레스를 이토록 압도할 실력이라면, 산체스가 내뱉은 말들은 주제넘은 오지랖에 불과했다.

‘……스승님.’

모랄레스를 바라보았다.

울컥했다.

그의 죽음에 분노를 토해 내고 싶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모랄레스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모랄레스가 매번 하는 말이 있었다.

발할라 제국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전사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수한 대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권력에 달라붙어 나팔수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승승장구하는 것에 비해, 진정으로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성과의 대가를 모두 토한 채 쓸쓸하게 죽어 갔다.

낭만을 잃은 나라였다.

발할라가 추구하는 가치는 변질되었고, 모랄레스는 그렇기에 바르보사와의 대결을 바랐다.

“산체스. 나는 바르보사와의 대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승리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겠지. 그런데도 그와 싸워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발할라의 백성들이, 발할라의 전사들이. 내가 투쟁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이라도 과거의 낭만을 깨닫길 바란다. 발할라가 어떤 나라였는지, 적어도 권력을 내세우며 약자를 핍박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음을 말이다.”

목숨을 걸었다.

유의미한 가치를 위해서 죽겠다던 그는, 그때와 똑같은 눈빛을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에서 보였다.

그래서 대결 도중에 모랄레스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진정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성을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모랄레스는.

그 순간 죽음을 각오했다.

애초에 거친 삶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몸을, 로만 드미트리를 위한 강렬한 불씨로 활용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참았다.

모랄레스의 의도를 알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진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실력자기에.

‘스승님의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무책임하십니다. 대의를 위해 그렇게 가 버리신다면, 스승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저희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전사로서 우선되는 가치를 알면서도. 스승님이 밉습니다. 전사로서의 명예로운 죽음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스승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대결 전.

모랄레스는 한 가지 말을 남겼다.

정말 만약에 본인이 죽는다면, 처소에 남겨 둔 자신의 ‘유서’를 확인하라고.

그때였다.

“로…… 만, 로…… 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사람들이.

발할라의 백성들이.

열병(熱病)이 번지듯,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 * *

모랄레스의 패배.

충격을 받은 것은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랄레스가 사람들을 향해 내뱉은 말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모랄레스의 말이 정말 사실일까?”

“만약 발할라 황실이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서 로만 드미트리를 불러들인 것이라면. 이건 정말 잘못되었어. 전사들을 위한 축제는 그간 죽어 나간 전사들의 혼을 위한 자리인데, 그따위 이유로 더럽혀서는 안 돼.”

“명예롭게 죽는다고 한들. 하늘에서 이런 현실을 본다면, 망자(亡者)들은 편히 눈감을 수 없겠지.”

참담했다.

발할라의 진실.

로만 드미트리는, 오히려 발할라의 사람들보다도 더 발할라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였다.

함정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발할라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이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는 부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사들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이 얼마나 전사다운 모습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죽어 갔지만, 사람들은 일련의 과정이 발할라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모랄레스는 죽었다.

그는 낭만을 잃어 가는 세상에서, 진짜 전사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기쁜 일이다.

전사가 전사로서 죽는 것.

가치 있는 상대의 검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모두가 바라는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전사의 죽음을 눈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로…… 만, 로…… 만!”

어느 한 사람.

자신도 모르게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을 외쳤다.

승자로서 우뚝 선 그의 모습은, 발할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했다.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로만!”

열병처럼 번지는 목소리.

사람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인정했다.

모랄레스를 쓰러트린 로만 드미트리는, 타국의 사람이지만 축제 무대에 어울리는 그런 존재였다.

편견을 버렸다.

강하다면.

전사로서의 가치를 안다면.

출신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재의 발할라는 인종 차별이 문제로 지적되는 나라지만, 한때 그들은 전사들과의 순수한 대결을 추구하며 ‘랭킹 시스템’을 대륙에 도입했던 나라였다.

모랄레스와 로만 드미트리의 싸움은 잊어버린 가치에 불을 지폈다.

활활 타오르는 열망에, 로만 드미트리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모랄레스의 말처럼.

눈을 부릅뜰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전사들의 혼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도록, 바르보사와 로만 드미트리의 대결을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열광하는 사람들.

그 중심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망자에 대한 예우를 보였다.

* * *

세상이 들썩였다.

모랄레스의 죽음이 마린을 강타한 그 시각, 권력의 중심부에서 이와 관련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소문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모랄레스가,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습니다.”

조나탄 자작이었다.

그의 보고에, 발할라의 권력을 주도하는 벨피르 후작이 웃음을 보였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어. 로만 드미트리가 초대를 받아들일 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의 목적이 바르보사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모랄레스를 쓰러트릴 정도의 실력자였다니. 그를 과소평가하지 않으려고 했건만, 이건 예상치도 못한 일이야.”

로만 드미트리.

황당할 정도로 호전적인 사내였다.

발할라와의 분쟁을, 발할라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할 줄은 몰랐다.

조나탄 자작이 말했다.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로만 드미트리가 ‘정상적이지 않은 몸’으로 무대에 올라가도록 손을 쓰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모랄레스.

그는 늘 귀찮은 존재였다.

항상 권력자들의 반대편에서, 권력자들이 싫어할 만한 목소리를 높였다.

“모랄레스가 왜 죽었다고 생각하나. 그에게도 현실에 타협하는 선택지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랄레스는 희생을 감수하고 로만 드미트리에게 대결을 신청했고,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와 바르보사의 대결에 조금의 방해 공작도 개입하지 못하도록 수작을 부린 것이다.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힘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데 그때와 비교해서 눈에 띄게 약해진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의구심을 가지겠지.”

대다수의 여론.

평소라면 찍어 누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문제가 생길 것을 알았다.

발할라.

전사의 나라는 예전과 달랐다.

어떠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 정치적인 문제를 충분히 고려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벨피르 후작이,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조나탄 자작. 너는 바르보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그야, 발할라를 대표하는 대륙 십이검의 일원이지 않습니까.”

“그래,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있지. 그런데, 바르보사의 진정한 무기는 그가 다루는 검이 아니야.”

“……그게 무슨.”

바르보사와 모랄레스.

둘의 악연.

처음으로 이루어졌던 대결에서 수작질을 부린 사람은, 바르보사의 배경이 아니라 바르보사 본인이었다.

“바르보사는 영악한 인물이야. 본인의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단 1퍼센트의 패배 확률도 없애 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그러니까,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결은 전적으로 바르보사에게 맡겨라. 그가 알아서,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본인의 승산을 높일 테니까.”

바르보사와의 대결에서.

모랄레스는 패배했다.

그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몸 상태가 정상적이었다면 대결의 승패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때도, 지금도.

바르보사는 모랄레스를 압도할 것이다.

본인이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으면서도, 상대를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것이 바로 바르보사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발할라에서.

바르보사는, 현재의 발할라를 대표하는 강자였다.

벨피르 후작이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살아 있는 몸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 * *

긴 하루였다.

이른 아침부터 이루어졌던 대결은, 모랄레스의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아무도 도전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원래 축제 무대에 오를 모랄레스를 쓰러트렸다면, 로만 드미트리는 더는 검증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날 저녁.

산체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찾았다.

이전보다 얼굴이 많이 상한 그는, 만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 님을 모욕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면서도, 전사들의 무대에 타국의 사람이 오르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대결의 승패를 떠나서. 발할라의 의도를 알고도 무대에 오르려던 로만 드미트리 님의 선택에 존경을 표합니다.”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모랄레스의 죽음과 로만 드미트리는 별개였다.

발할라의 사람들은, 대결에서의 죽음을 상대에게 떠안기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과거의 일은 생략하지. 모랄레스와의 대결을 끝으로, 나는 너희에게 그 어떠한 감정도 없다.”

“감사합니다.”

대결이 끝나면.

그간의 감정을 시체와 함께 묻어 버렸다.

발할라를 존중하는 방식에, 산체스는 결심에 찬 눈빛을 보였다.

“이렇게 로만 드미트리 님을 찾은 이유는 스승님의 유언 때문입니다. 스승님은 로만 드미트리 님을 진정한 전사로 인정했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고, 무대에 오를 때 발할라 사람들의 환호를 받아 내기 위해서 발할라의 추악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밝혔습니다.”

대결이 끝나고.

처소로 돌아왔다.

모랄레스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남긴 유서를 읽으며, 산체스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유서 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모랄레스는, 본인의 죽음이 무의미해질지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진실을 알길 바랐다.

“스승님은 로만 드미트리 님이 이번 대결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고 유서에 남겼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 발할라의 음모는 단순히 바르보사와의 대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한 접전 끝에 그를 쓰러트린다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 님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유서를 모두 읽고.

산체스는 탄식을 내뱉었다.

발할라는 추락했다.

일개 개인이 목소리를 높인다고 한들, 나라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일부가 썩어들어 간 것이 아니다.

나라의 근간이.

뿌리째 썩어 버렸다.

모랄레스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양자택일 중 하나의 선택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축제에 불러들인 것. 그것은 크로노스 제국의 입김이 닿은 부분입니다. 스승님은 유서를 통해 발할라 일부 권력자들이 크로노스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살아남길 바라신다면 지금 당장 발할라를 떠나십시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만약 바르보사와의 대결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면. 상처를 입은 로만 드미트리 님은, 절대 살아서 드미트리로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

그건 정말, 추악한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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