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615)

235화 축제를 위한 축제 (6)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산체스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무대에 오를 자격이 있냐는 말을 운운했건만, 애초에 발할라 제국이 축제의 의미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축제를 대표할 전사를 바꾸는 것은 예민한 문제인데도.

발할라는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크로노스 제국의 부탁을 받아들여 상대를 마음대로 바꾸었다.

한심했다.

이 나라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스승님이 발할라 황실과 타협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겠지. 권력자들의 나팔수가 된다면 안락한 삶이 보장되겠지만, 바르보사처럼 그들이 정해 주는 상대와 싸우는 일들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스승님이 왜 그토록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들에게 반감을 드러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스승님은 변화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변화라는 명목으로 잇속을 챙기는 쓰레기들을 증오했을 뿐이다.’

모랄레스는 로만 드미트리가 무대에 서길 바랐다.

자신을 압도한 실력이라면, 바르보사의 목을 베고 전사의 긍지를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발할라를 위해서는 하나의 선택지를 제한하는 것이 실리적인 방법이겠지만, 모랄레스는 로만 드미트리가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었다.

양자택일. 극단적으로 나뉘는 선택지였다.

권력자들이 추악하다고 해서, 모랄레스는 본인 또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산체스는 진실을 들었다.

망자를 대신해 진실을 말했고, 로만 드미트리가 당연히 안전한 방법을 택하리라고 생각했다.

당연했다.

모랄레스의 죽음이 로만 드미트리를 빛냈다고는 하나.

머나먼 타국에서, 발할라의 더러운 계획에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알고 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발할라가, 크로노스와 내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충격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추악한 진실을 알고도 발할라에 발을 들였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관계는 묘한 경계선에 있다. 사람들은 발할라가 방관자의 태도를 고수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단순히 방관이라는 단어로 뭉그러트릴 수 있을 만한 태도가 아니다. 이번 카이로의 내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약 베네딕트 후작이 반란에 성공하고 정권이 바뀌었다면. 크로노스 제국은 카이로를 대륙 정벌의 교두보(橋頭堡)로 삼았을 것이다. 그때가 돼서야 발할라가 크로노스 제국을 비난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지? 없다. 방관은 그들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부여하지 않는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보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 한 번도 권력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는 나약한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다.”

제국의 관계.

작은 의심이 싹을 탔다.

사람들은 제국이 서로를 큰 걸림돌로 여긴다고 말하지만, 생각보다 두 제국은 서로를 해치지 않았다.

마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발할라와 크로노스의 관계가 완벽한 동맹을 추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각자 큰 덩어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이기에. 일정 수준을 넘어선다면 두 제국은 싸움을 피할 수 없겠지. 하지만 주변 세력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힘을 합칠 충분한 명분이 존재한다. 그런 전제를 생각한다면, 발할라의 방관이 단순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그게 무슨.”

산체스가 숨을 들이켰다.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하게 말하는 내용이었지만, 발할라의 사람으로서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발할라.

전사의 나라다.

소신이 있고, 본인들이 믿고 따르는 것을 행했다.

그것은 좋게 표현하는 말이고, 폐쇄적인 발할라를 불통(不通)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산체스는 발할라가 좋았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발할라의 방식이 무식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지언정, 순수하게 자신들만의 방식을 추구하는 발할라는 전사들의 혼을 대변했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모랄레스의 유언대로라면 사실이기에, 산체스는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역했다.

알량한 권력을 위해, 그간 비난했던 크로노스와 손을 맞잡았다니.

훗날 크로노스와의 결전을 벌인다고 한들, 발할라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크로노스가 결과를 중시한다면.

발할라는 과정을 사랑했다.

승리했다는 결과보다는, 패배할지라도 가치 있는 패배를 바랐다.

산체스가 말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째서 발할라의 초대에 응하신 겁니까? 발할라와 크로노스가 결탁한 계획입니다. 바르보사와의 대결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의 시선 밖에서 로만 드미트리 님을 죽이려는 세력들이 움직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로만 드미트리 님이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나,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드미트리로 연결되는 워프 게이트는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이고, 드미트리까지의 먼 거리를 걸어서 도망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진심을 묻는 물음에,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표정을 보였다.

“사실을 알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진심입니까?”

“표면 아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났다고 한들, 애초에 내게 닥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현실이다. 드미트리를 비롯한 대륙의 약소국들이 본인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결탁하는 상황을 외면하고 부정해서는 안 된다.”

최악의 가설을 세웠다.

발할라행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지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초대에 응할 이유는 있었다.

“나는 앞으로의 전쟁에서 내 행보가 명분을 부여하길 바란다. 발할라가 계획적으로 날 함정에 빠트리고, 크로노스 제국이 또 다른 음모로 날 죽이려고 한들. 내가 대륙 십이검을 쓰러트리고 살아 돌아간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나. 반전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훗날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사람들은 한 번의 선례로 끝까지 싸울 명분을 얻겠지.”

그 순간.

산체스는 말을 잃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인조차 미쳤다고 말할 정도로, 정말 무모한 사내였다.

* * *

대화가 끝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무대에 오르겠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산체스는 밖으로 나와 어둠에 가려진 달을 바라보았다.

“……로만 드미트리. 당신은 정말 미쳤습니다.”

심장이 뛰었다.

이번 축제.

애초에 바르보사와의 대결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

모랄레스를 쓰러트렸다고는 하나, 한 단계마다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는 랭킹에서 모랄레스보다 무려 6단계나 높은 존재가 바르보사다.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쓰러트린다고 한들.

무대를 내려왔을 때 로만 드미트리를 반기는 것은, 사람들의 환호가 아니라 검은 음모다.

그런데도 싸우겠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나도 위험한 일인데도, 이상하게 로만 드미트리는 그것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주었다.

한때.

모랄레스는 이런 말을 했었다.

“진정한 전사는 단 한 번의 선례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나 납득할 만한 선택이라고 해서. 수련을 게을리하고, 현실에 타협한다면, 그 나약함은 결국 의지로 판가름하는 싸움에서 무릎을 꿇리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게 만들겠지. 나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바르보사가 분명히 잘못된 존재인 것을 알면서도, 그간 외면했던 시간이 나의 나약함을 증명한다. 산체스. 만약 진정한 전사를 만난다면. 그가 살아온 삶을 배워라. 설령 그처럼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 살아갈 날을 위해 배우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전사.

모랄레스가 말한 존재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역사에 나오는 그런 위대한 존재처럼 보였다.

밤길을 걸었다.

달빛이 사그라지고 어둠이 드리운 공간에 발을 들였을 때, 산체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도 당신이 무모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내게 말한 것이 당신의 진심이라면. 바르보사를 쓰러트렸을 때, 나는 당신이 제국의 음모에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랄레스.

자신의 스승은 이런 선택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알려 주고도 전사의 길을 택한다면, 그를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라고 말이다.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지금부터, 치열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 * *

전야제 날이 밝았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일이면 발할라를 대표하는 축제가 진행되기에, 하루 전날인 오늘 미리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날 저녁.

해가 저물자, 사람들이 축제의 장소로 몰려들었다.

거대한 무대 주변으로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그들은 저마다 기대감을 보였다.

“과연 누가 우승하려나.”

“무조건 조나탄 가문의 곤잘레스지. 랭커가 출전할 수 없는 전야제 무대에서, 4성의 검사가 나서면 사실상 적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잖아.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곤잘레스는 얼마 뒤에 랭킹전에 도전한다는 말도 있어.”

“에이, 이 사람아. 그래도 전야제 무대는 승부를 예측할 수 없어. 일대일의 대결이 아니라, 30명이 동시에 무대에 오르잖아.”

사람들이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어떤 한 사람이, 화제의 인물을 거론했다.

“드미트리의 섬광은 어떠려나.”

“……흐음. 기대되기는 하는데, 다른 전사들을 상대로는 조금 역부족이지 않으려나.”

“그래도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드미트리의 섬광이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다던데. 검술이 얼마나 빠른지, 그의 싸움을 지켜본 사람들은 소문을 듣지 않고도 섬광(閃光)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잖아.”

“확실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기는 하지. 그가 모시는 로만 드미트리가 모랄레스를 쓰러트린 것만 봐도, 크리스 또한 예사 인물이 아닐지도 몰라.”

불과 하루 전만 해도.

크리스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축제에 섞인 불청객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그에게도 관심이 몰렸다.

유일한 이방인.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실력을 떠나서 그가 우승할 확률이 낮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우승까지는 힘들겠지. 전야제 무대에서 타국의 사람이 우승한 전례는 없어. 발할라의 전사들은 분명히 알게 모르게 크리스를 경계할 텐데, 30명의 전사가 동시에 경쟁하는 상황에서 크리스가 우승하는 기적적인 일이 벌어지겠어? 아마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비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지.”

한 사람의 말.

그것이, 크리스를 향한 사람들의 솔직한 평가였다.

* * *

때가 되었다.

심판의 호명에, 각 가문을 대표하는 전사들이 무대에 올랐다.

“드미트리 공국의 크리스!”

“우오오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크리스의 우승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렇다고 사람들이 크리스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진정한 전사로서 인정받았다.

그를 모시는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발할라의 사람들은 크리스를 위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를 가치가 있었다.

일련의 상황.

무대에 오른 전사 중, 몇몇이 불만 어린 표정을 보였다.

“쯧쯧, 이방인을 환호하는 꼴이라니.”

“우리가 이 무대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발할라 출신이 아닌 존재가 우승하는 꼴은 볼 수 없어.”

사람들의 예상대로였다.

로만 드미트리를 바르보사로의 상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전사들은, 검증을 받지 못한 타국의 전사가 자신들과 같은 무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게다가.

그들은, 가문의 주인들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전야제 무대에서 우승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만, 패배할지라도 단 하나의 사실은 명심하거라. 크리스.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이방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여라. 만약 임무에 성공한다면, 우승과는 별개로 네 가족의 미래는 책임지도록 하마.”

눈에서 살의(殺意)가 맴돌았다.

크리스는 공동의 적이었다.

눈빛만으로도 비슷한 목적이 있음을 서로가 알았고, 한 전사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드미트리의 쥐새끼는 시작부터 수비적으로 움직일 확률이 높겠지. 발할라의 전사들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괜히 나섰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시작과 동시에 이방인의 피로 무대를 적시는 게 어때? 그 이후에 승부를 가리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찬성하지.”

“좋아. 이방인의 목을 베고, 그다음에는 너희들을 모두 씹어 먹어 주지.”

전사들이 씰룩 웃었다.

의견이 통했다.

어차피 서로의 목숨을 탐해야 할 사이지만, 공통된 목적을 이루는 것은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마침내.

황제를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상석에 자리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에, 심판이 깃발을 들었다.

펄럭.

“시작-!”

전야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때였다.

파밧.

누군가가 움직였다.

크리스였다.

수비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가장 먼저 전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번뜩.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전사의 목을 베고.

번뜩.

뒤늦게 달려드는 전사의 목도 베더니.

푸확.

바로 옆에 있던 전사의 가슴팍을 갈라 버렸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

사람들이 경악했다.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공격.

시작하자마자, 크리스의 검에 3명의 전사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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