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축제를 위한 축제 (7)
로만 드미트리가 조나탄 자작을 만나고 돌아온 날.
크리스에게 전야제의 출전 소식을 알리며, 발할라 제국의 음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들은 전야제 무대에서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만약 나와 바르보사의 대결에서 그들의 생각처럼 바르보사가 승리하지 못한다면,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서 내 수족을 미리 처리하려는 의도겠지.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발할라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크리스는 반문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번 일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신뢰의 표현으로 들렸다.
벅차올랐다.
위험한 자리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치가 있었다.
“크리스. 이번 발할라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험의 연속이다. 발할라는 절대 우리가 드미트리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손을 쓰겠지만, 우리는 이번 싸움을 통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전야제 무대에서도, 축제의 본무대에서도. 우리가 발할라의 전사들을 쓰러트리고 승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적의 음모를 뚫고 살아서 돌아간다면. 무형의 가치는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남길 것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애초에 발할라의 초대를 거절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범접할 수 없는 신뢰의 탑을 쌓았다.
안전한 장소에서.
명령만 내려도 충분하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목적이 제국의 야망으로부터 안전하길 바랐다면, 충분히 다른 선택지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제국을 ‘동등한 상대’로 여겼고,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뒤로 물러나는 선례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공격하면.
똑같이 반격하고.
더러운 음모 따위는.
알고도 짓밟아 버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말하는 상황들은, 분명히 높은 목적을 위해 도약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나는 바르보사를 일말의 의문도 남지 않도록 확실히 쓰러트릴 것이다. 그러니, 너도 전야제 무대에 나가 네 존재를 증명하라. 겁쟁이 같은 승리는 바라지 않는다. 네 손으로 29명의 목을 전부 베어, 그 누구도 나 로만 드미트리가 신뢰하는 검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라.”
명령이 떨어졌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임무.
크리스는, 들뜬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명을 받들어, 전야제 무대에서 드미트리의 이름을 드높이겠습니다.”
* * *
29명의 목을 베어라.
무모한 명령이다.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로만 드미트리가 내린 명령이라는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믿었다.
처음 로렌스의 대전사로 나섰을 때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승부를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돌아보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헥토르로 인해 남부 전선이 무너졌을 때. 베네딕트 후작의 반란군과 전쟁을 벌였을 때.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면전 등등. 하나하나가,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결과를 현실로 만들었다.
사람의 그릇은 그간의 경험이 결정했다.
발할라의 전사들조차도 시작 단계에서는 몸을 사리려는 그때, 크리스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했다.
‘29명을 모두 베어 버리기 위해서는 조금도 망설일 수 없다. 시작부터 막아서는 적들을 모두 처리한다.
적들이 나를 경계하도록. 내게 다가와, 연약한 목을 내어 줄 수밖에 없도록.’
패배는 배제했다.
강한 열망.
크리스가 땅을 박찼다.
예상치도 못한 광경에, 황급히 대응하려던 전사의 목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번뜩.
‘섬전.’
극한의 쾌검.
상대는 검을 어떻게 휘두르는지조차 제대로 확인하질 못했다.
허공에 붕 떠오르는 머리에 다른 전사들이 당황으로 얼룩진 표정을 보이는 그때, 크리스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다른 전사들의 머리와 가슴팍을 베어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깃발이 펄럭이고 채 10초가 지나지 않았는데, 관중들의 강렬한 환호성이 귀를 찢을 것처럼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미쳤다!”
“크리스, 가라!”
찰나의 순간.
전사들의 시선이 크리스를 향했다.
그들은 특별히 연대한 것이 아닌데도, 본능적으로 제일 튀는 존재를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30명의 대결.
전야제 무대는 그런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크리스를 제외한 존재들과의 전투는 최소화했다.
콰르르르르르릉.
“와라.”
다른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크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오라를 일으키며 막아서는 자들을 상대했고, 상대의 공격은 간결한 스텝으로 피해 버렸다. 다들 각 가문을 대표하는 검사들이다.
2성에서부터 4성까지 다양한 검사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크리스의 반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번뜩.
어김없이 목이 날아갔다.
알고도 어찌하지 못하는, 크리스의 검술은 비상식의 영역에 들어섰다.
지난 몇 달.
로만 드미트리는 특별 훈련을 예고했다.
병사들은 힘든 시간일 것을 알면서도 성장에 대한 기대감을 보였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설레는 마음은 완전히 짓밟혔다.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빽빽한 훈련 스케줄과 더불어 항상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련을 진행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병사들을 상대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일대일의 대결이든.
일대 다수의 대결이든.
피를 토하고, 얼굴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크리스는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자부했는데, 눈을 감았다 뜨면 파란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처절한 시간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상대해 보니 감히 발끝도 쫓아갈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
이 정도의 수준 차이라면.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에 자신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로만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발악했다.
매일 처참하게 얻어터질지라도, 독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어떻게든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밤에는 로만 드미트리가 안배한 암살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보니 어느덧 결전의 날이 밝았다.
그리고 현재.
크리스의 검은 날카롭게 벼려졌다.
극한에 달한 감각이, 적들의 공격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콰르르르르릉.
훅.
사방에서 목숨을 노렸다.
한 전사가 목을 베려고 검을 휘두르면, 또 다른 전사가 크리스의 뒤를 공격했다.
전사들의 협공은 의도한 것이 아니지만, 가장 선두에서 날뛰는 크리스의 존재로 인해 동시에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뒤.’
번뜩.
앞의 검사를 베고.
몸을 틀었다.
경악으로 얼룩진 전사와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는 그의 머리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푸확.
피가 비처럼 내렸다.
크리스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처한 위험보다도, 다른 전사의 손에 죽은 적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29명을 모두 내 손으로 처리하는 것에는 실패한 건가.’
어쩌겠는가.
현실에 충실할 뿐.
크리스가 땅을 박찼다.
아직, 처리해야 할 적은 많았다.
* * *
정확히 여덟의 적을 처리했을 때.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서 막았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버러지 같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곤잘레스였다.
조나탄 자작을 따르는 그는, 크리스를 바라보며 살의를 드러냈다.
“나는 너와 같은 녀석들만 보면 속이 뒤집혀. 약소국에서 태어나, 고만고만한 녀석들끼리 경쟁해 놓고는 본인이 최고라고 믿는 녀석들. 참 같잖지.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발할라의 전사들을 상대하는 무대에서 너처럼 행동할 수는 없겠지.”
그 또한.
특명을 받았다.
조나탄 자작은 크리스를 반드시 죽이라고 말했지만, 명령이 아니라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할 무대다.
크리스가 받아가는 스포트라이트에, 진심으로 화가 났다.
“더는 날뛸 수 없게 만들어 주마.”
화악.
콰르르르릉.
폭발하는 4성의 오라.
이전의 상대들과는 압도하는 기세부터가 달랐다.
대기를 일그러트리는 오라가 크리스를 압박하려는 순간, 한 번의 번뜩임이 그의 눈을 덮쳤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으나, 따끔한 충격이 눈 부근에서 일어났다.
팟.
“……?!”
방금의 공격.
보지 못했다.
다른 전사들이 무너지는 모습에 예상은 했지만, 크리스의 공격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이를 악무는 곤잘레스.
속도를 높였다.
자신도 크리스에 비해 느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번개 같은 공격으로 상대가 도망칠 공간을 빠르게 차단해 버렸다.
오라가 번뜩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둘의 대결에 집중되었고, 사람들로서는 곤잘레스가 크리스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곤잘레스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오라에서는 본인이 명백한 우위를 점했는데, 크리스는 몰아치는 공격에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크리스의 연습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였다.
모랄레스도 단번에 베어 버린 괴물.
로만 드미트리는 크리스를 극한으로 몰아넣었고,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4성의 오라 정도로는 그리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위험한 힘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단순한 힘의 대결에서는 곤잘레스가 우위를 점하겠지만, 크리스는 오라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강해도.
승부는 연약한 몸뚱이를 누가 먼저 베느냐다.
크리스는 차분하게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더니, 순간적인 틈에 검을 번개같이 뻗었다.
“어딜!”
콰르르르릉.
곤잘레스의 반응은 빨랐다.
검을 회수하며 크리스의 공격을 차단하려는 순간, 크리스의 입가에 떠오르는 웃음을 목격했다.
콰앙-
오라의 폭발.
크리스는 자신만의 기술을 만들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섬전과 조나단 기사단장이 알려 준 비기.
둘 다 극한의 속도를 추구하는 기술이었고, 앞으로의 혼란에서 자신보다 강한 적들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처음 공간을 쇄도하는 힘은 섬전의 마나 운용을 따르고.
적이 반응하는 그 순간에는, 조나단 기사단장의 활용법을 접목해서 방향을 틀었다.
두 번의 폭발.
그 기술을 확인한 로만 드미트리는, 크리스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훌륭하다.”
크리스.
그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기괴한 궤적을 그리는 검이, 경악으로 얼룩진 곤잘레스의 머리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푸확.
거칠게 흩뿌려지는 피.
사람들이 경악했다.
곤잘레스가.
모두가 우승 후보로 단정했던 인물이.
이렇게 간단하게, 머리가 베여 나갈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이제 9명.’
아직도 목이 탔다.
곤잘레스는 9명 중 한 명일 뿐.
크리스에게 더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쓰러트리는 일이 특별한 의미로 남지 않았다.
* * *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로만 드미트리와는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동안 랭커들을 쓰러트렸다면.
드미트리의 섬광이라고 불리는 명성은, 발할라에서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하찮았다.
3성의 경지.
우승을 노릴 수 없는 실력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건만, 크리스가 보여 주는 모습은 전율을 일으켰다.
“죽어!”
콰르르르릉.
사방에서 달려드는 전사들.
전야제의 끝은 항상 이랬다.
우승자로 유력한 상대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남은 전사들이 힘을 합쳤고, 그 상대는 이방인이라고 비난했던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적들의 공격에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오라가 자신을 덮칠지라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들의 공격을 피하고 역으로 베었다.
피가 튀었다.
어느새 피로 흠뻑 물든 크리스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에 빠져들며 적들과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검이 번뜩일 때마다.
어김없이 적들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하나씩 상대를 짓밟아 가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크리스의 이름을 연호했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로만 드미트리라는 배경 때문이 아니다.
크리스 그 자체도.
전사로서 인정받을 자격이 있었다.
사람들의 감정이 절정에 달했을 때, 크리스는 마침내 하나 남은 적마저도 머리를 베어 버렸다.
번뜩.
끝났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피가 비처럼 내리는 무대 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승자는 타국의 이방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제 우승자는, 황제에 대한 예의를 표하고 승자로서의 부와 명예를 받아 갈 차례만 남았다.
그런데.
크리스가 무릎을 꿇고 검을 바쳤다.
“이런!”
“저, 저게 무슨!”
경악하는 사람들.
크리스가 향하는 시선의 끝에는, 발할라의 황제가 아닌 바로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