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포식자의 방식 (1)
크리스의 행동.
예의에 어긋나는 모습이었다.
이곳은 제국(帝國)의 영토다.
감히 발할라 제국의 황제가 내려다보는 상황에서,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먼저 예의를 표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크리스의 활약에 환호성을 보내던 사람들도, 발할라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손을 들었다.
크리스의 충성심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에, 크리스는 그제야 시선을 옮겨 황제를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지도.
그렇다고 검을 바치지도 않았다.
건방졌다.
황제와 같이 상석에 앉은 고위 귀족들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그들은 황제가 먼저 나서기 전에는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발할라도 크로노스와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는 이 나라에서, 황제 앞에서 함부로 언성을 높일 수 없었다.
“이름이 크리스라고 했던가.”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크로노스 황제가 과격하고 감정이 메마른 느낌이었다면, 발할라 황제는 ‘전사의 나라’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나른한 음성을 내뱉었다.
외관도 매우 볼품없었다. 특별히 육체적인 훈련을 하지 않았는지 몸은 메마른 편이었고, 푹 들어간 눈은 어둠이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예, 크리스라고 합니다.”
“대단해. 타국의 이방인이 전야제 무대에서 우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적극적으로 전사들의 목을 베고 최후의 승자로 남다니. 나는 또 서로의 눈치나 살피는 그런 지루한 승부를 예상했는데, 덕분에 흥이 나는 무대를 보았어.”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발할라 황제가 히죽, 웃었다.
묘하게 광기(狂氣)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특별한 언행을 보여 준 것이 아닌데도, 발할라 황제는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 말이야. 방금, 왜 로만 드미트리에게 먼저 예의를 표했지? 아아, 너를 질책하려는 의도는 아니야. 나는 타국의 사람에게까지 제국의 법도를 들이밀 생각은 없어. 다만, 궁금해서. 나를 앞에 두고도, 너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거든.”
다소 경박스러운 언행이었다.
무게감이 없는 들뜬 목소리에, 크리스가 말했다.
“……제 주군을 위한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발할라의 전사들이 황제 폐하를 위해 전야제 무대에 목숨을 바친 것처럼, 저 또한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호오.”
발할라 황제가 감탄했다.
크리스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작은 열기가 일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출중한 실력, 그리고 주군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까지. 참으로 좋은 인재야. 발할라는 예로부터 인재를 대우해 주는 그런 나라지. 세간에는 이 나라가 ‘외부인’을 반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건 정확히 ‘능력이 없는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문이지. 너와 같은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발할라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돈이라면 돈, 명예라면 명예, 여자라면 여자.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 발할라는 그야말로 천국과도 같은 세상이지.”
웃음이 짙어졌다.
태도에 대한 책임은 더는 묻지 않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어때? 이 자리에서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전야제의 보상으로 드미트리가 무엇을 약속했든 그것을 압도하는 보상을 주도록 하지.”
발할라 황제의 발언.
그 또한.
선을 완전히 넘어 버렸다.
* * *
사방에서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일국의 후계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의 사람을 영입하겠다는 발언은, 크리스의 행동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예의를 한참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돌발 행동.
만약 발할라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면, 크리스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조금은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발할라 황제.
무려 23명의 아들을 낳은 전대 황제의 14번째 아들로서, 형제들과의 골육상쟁(骨肉相爭)에서 아직 어린 막내의 목숨까지 끊어 버리면서까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잔혹한 인물이었다.
어둠이 드리운 날.
황실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피가 뚝뚝 흘리는 검을 들고, 발할라 황제는 자신을 제외한 황실의 핏줄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사람들은 말했다.
크로노스의 유일한 대항마는 발할라라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발할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폐쇄적인 문화를 떠나서 발할라 황제의 광기 어린 소문 때문이었다.
크로노스가 대륙 정벌의 야망을 드러냈기에 최악이라고 생각할 뿐.
차악(次惡)인 발할라가 좋은 선택지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크로노스와는 달리 타국의 국경을 침범하는 일은 많지 않기에, 발할라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전사의 나라라는 환상에 빠져서 발할라 제국을 무조건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차악의 실체.
생각보다도 과격했다.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그 꼭대기는 정상적이지 않은 인물이 차지했다.
“크리스, 선택해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발할라 황제의 제안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그의 선택은 신분 상승을 의미했다.
발할라 황제가 잔인무도한 인물임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나, 그가 지금의 권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하게 능력에 따라 분에 넘칠 정도의 보상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천국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대륙의 인재들이 랭킹 시스템에 의해 발할라로 흘러들어 오는 이유는, 일부 소수가 경험하는 발할라의 천국과 같은 일상이 매우 컸다.
보수파와 진보파.
황제는 중도를 지켰다.
때에 따라 양쪽의 손을 들었으나, 확실한 것은 두 세력 모두 제국에 어울리는 인재들로 구성되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모두가.
크리스의 대답을 확신했다.
발할라가 어떤 나라든, 황제의 선택을 받은 존재가 발할라로의 귀화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승낙하는 순간.
천국이 펼쳐질 것이다.
발할라는, 승자가 독식하는 그런 나라였다.
그런데.
크리스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죄송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왜지?”
“황제 폐하가 가치 있게 생각해 주는 현재의 저는, 제 주군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로. 황제 폐하가 바라는 가치는 제가 아닌 주군에게 있습니다. 저는 드미트리의 검으로써 존재감을 발현할 뿐이기에, 황제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
그에게 우선되는 가치는 순수한 열망이었다.
강함에 대한 열망.
발할라가 무엇을 제안하든, 로만 드미트리보다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만 드미트리는. 휘하의 수하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존재였다.
드미트리에서 수하들이 받는 혜택과 대우는, 발할라의 이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었다.
크리스의 대답은 적절했다.
정중하게 거절하면서도, 주군의 이름을 빛나게 만드는 대답에 발할라 황제는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재밌었다.
크리스의 대답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발할라 황제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전야제 무대는 이것으로 끝내겠다. 그리고 우승자인 크리스에게는, 평생 다 사용하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부를 부여하겠다!”
황제의 외침.
승자에 대한 보상은 확실했다.
자잘한 감정은 모두 배제한 그의 외침에, 발할라의 사람들은 긴장감을 털어 내고 열화와 같은 환호성을 내뱉었다.
이런 나라가.
바로, 발할라였다.
* * *
전야제가 끝났다.
내일 있을 축제를 위해 모두가 숙소로 돌아갔을 그 시각.
짜악.
조나탄 자작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벨피르 후작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그에게 분노를 토해 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 네 녀석이 분명히 말했었지. 랭커들을 제외한 무대에서, 곤잘레스의 우승은 의심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이 결과는 대체 뭐지? 타국의 이방인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수하를 처리하겠다고 호언장담한 나는, 황제 폐하 앞에서 허언이나 내뱉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지.”
“죄, 죄송…… 컥!”
짜악.
“닥쳐.”
다시 한번 뺨을 날렸다.
지난 만남.
그때는 지금보다 정적인 분위기로 대화가 진행되었지만, 실패라는 결과 앞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발할라 황제.
그는 철저하게 성과주의였다.
이번 계획을 주도한 벨피르 후작으로서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크리스가 우승하자마자 보수파 녀석들이 얼마나 좋아하던지. 오늘과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면, 황제 폐하는 우리가 아닌 보수파 녀석들의 손을 들어 주겠지. 그건 용납할 수 없는 결과다. 발할라의 미래는, 남부 밀림에서 야만적인 역사를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현재의 발할라는 경계선에 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지.
아니면, 전통을 운운하며 제자리걸음을 할지.
최근에는 벨피르 후작을 필두로 ‘크로노스 제국’과의 협력 관계를 끌어내고 있지만, 발할라 황제는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조언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결과가 필요하다.
패배가 반복된다면, 황제의 심기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발할라는 여러 의미로 독특한 나라였다.
황제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보유했으면서도, 본인이 생각하는 나라의 구체적인 미래가 존재하지 않았다.
폭력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때리던 벨피르 후작이 숨을 고르자, 조나탄 자작은 황급히 자세를 고쳐잡았다.
무릎을 꿇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님.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어떻게든 로만 드미트리가 패배하도록 판을 만들겠습니다.”
마지막 기회였다.
눈 밖에서 벗어나는 순간.
발할라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실패가 익숙한 자에게, 발할라는 그리 친절한 세상이 아니었다.
“아니, 네가 움직일 필요는 없다.”
싸늘한 목소리.
벨피르 후작이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조금 전에 받았던 보고의 내용을 떠올렸다.
“바르보사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니, 그가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바르보사마저도 실패한다면. 책임의 영역에서, 너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장담하지.”
축제 하루 전.
아직, 판을 뒤엎을 기회는 남아 있었다.
* * *
숙소로 돌아온 직후.
로만 드미트리는 휴식을 취했다.
그가 평소에 따뜻한 차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인들은 간단하게 먹고 마실 것을 내어 왔다.
그런데.
다과를 나르던 하인 중 한 명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먹지 마십시오.”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하인을 보았다.
하인은 다른 하인들이 다른 것들을 챙기러 간 사이에,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바르보사가 움직였습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바르보사의 상대들은, 항상 드러나지 않는 암수에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암수’를 증명하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마십시오. 당장 내일이 축제 무대입니다. 이 안에 독이 들어 있을지라도, 독을 증명하려는 사이에 바르보사는 당신을 축제 무대를 기피한 겁쟁이로 만들고 상황을 마무리할것입니다.”
눈치를 살폈다.
하인들이 도착하지 않은 상황.
그가, 말을 덧붙였다.
“저는 모랄레스 님을 존경했던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당신과 같은 분이 비겁한 술수에 무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희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발할라의 모든 것을 조심한다면, 적어도 정정당당하게 바르보사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정치 세력과는 상관없었다.
발할라의 전통을 따르는 그는, 산체스를 통해서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인물인지를 들었다.
국적과는 상관없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은 인물이 이번에도 비겁한 술수에 무너진다면.
발할라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움직였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의 사람들을 통해, 바르보사가 오늘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역할은 끝났다.
적어도 로만 드미트리가 정정당당하게 대결할 판을 마련해 주는 것.
마침 안으로 들어오는 하인들의 모습에, 하인은 표정을 바꾸며 이만 물려나려고 했다.
그 순간.
하인의 표정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
로만 드미트리가.
마치, 모두에게 보란 듯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