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포식자의 방식 (2)
하인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움찔거리는 입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안으로 들어선 다른 하인들 때문에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는 차를 음미했다.
평소에는 손도 잘 대지 않았던 과자도 하나씩 먹었고,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인들은 금방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고, 남은 차를 마시던 로만 드미트리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인기척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 줄 알고, 그렇게 함부로 마신단 말입니까!”
방금 나갔던 하인이었다.
정확히는 그렉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내가, 당혹스러움과 분노로 얼룩진 표정으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경고.
본인을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신뢰의 여부를 떠나서 독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마셔 버렸다.
자신은 위험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해 주었건만, 바닥을 드러내는 찻잔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증명했다.
툭.
찻잔을 내려놓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얼굴로 그렉을 바라보았다.
“바르보사가 독을 주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애초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독은 통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차를 마시는 순간.
체내에 독의 기운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산공독(散功毒)의 성향을 보였는데, 마나를 다루는 오라 검사들조차도 독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은밀하게 몸을 장악해 나갔다.
바르보사의 무기는 확실히 강력했다.
하루 전날에 이런 산공독을 마신다면, 본 무대에 올랐을 때는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독.
치명적인 힘이었다.
뒤늦게 이상함을 호소했을 때는, 바르보사의 검에 머리가 날아가 변명을 내뱉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다.
비약적인 육체의 발전으로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 화마의 불길을 받아들이면서부터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화마의 불길은 로만 드미트리가 ‘이물질’이라고 생각하는 체내의 기운을 모두 태워 버렸다.
불순물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고, 덕분에 순수한 기를 유지함과 동시에 독은 마시자마자 화마의 불길에 휩싸였다.
속에서 일어나는 열기.
식도에서부터 흘러들어 오는 뜨거움이, 바르보사의 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렉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진실이었다.
경악한 얼굴은 진실을 알면서도 왜 마셨냐고 물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정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네가 정녕 나를 돕고자 한다면. 찻잔에 남은 성분으로, 누군가가 나에게 독을 사용하려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겠나?”
“……가능은 합니다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바르보사가 괜히 전야제 밤에 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만한 사람들은 바르보사가 ‘독’을 다룬다는 사실을 알지만, 하루 전날에 사용한 독은 본무대가 끝나기 전까지는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독의 여부를 의심해서 바르보사와의 대결을 포기한다면. 바르보사는 여론을 장악해서 상대를 겁쟁이로 몰아갑니다. 발할라에서 대결을 거절하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불명예스러운 일이기에, 그때는 증거를 들이밀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대에 올라 결과를 증명하기에는, 바르보사의 검은 만만치 않습니다.”
바르보사는 영악했다.
하루 전날.
그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독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바르보사로서는 이득이었다.
독을 경계한 상대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바르보사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어떻게든 상대의 컨디션을 깎아내리는 것.
대륙 십이검이라고 불리는 바르보사의 검술은, 그 정도의 차이만으로도 상대를 완전히 압도해 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외통수였다.
보통은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독을 마셔 버리는 대담한 방법을 택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본무대가 끝날 때까지. 이 찻잔 안에 독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라. 너희가 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너희 또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답은 듣지 않았다.
걸음을 옮겼다.
대놓고 독을 사용했다면, 지금부터는 그 사실을 빌미로 상대를 들쑤실 차례였다.
* * *
다과를 날랐던 하인들.
그중 한 명이, 한 사내에게 고개를 숙이며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독을 들이켰습니다. 과자까지 먹었기에, 독에 중독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
사내의 정체.
외부의 손님들을 총괄하는 집사였다.
반듯하게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그는 회색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멍청한 녀석. 대결을 앞두고 안일한 모습을 보이다니. 드미트리의 명성도 이것으로 끝이구나.”
이번 임무.
실패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워낙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이고, 전장에서도 지략가(智略家)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대결을 앞두고 독을 먹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휘하의 수하가 전야제에서 우승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는 쉽게, 독을 마시는 안일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때였다.
집사가 금화 주머니를 챙겨 주고 걸음을 돌아서는데, 익숙한 인물이 집사가 있는 주방으로 들이닥쳤다.
“네가 이곳의 총괄 책임자인가?”
“예, 제가…….”
확.
콰직!
“크악.”
집사의 얼굴이 벽에 처박혔다.
로만 드미트리는 상대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진득하게 핏물이 딸려 오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이곳의 하인들이 내게 독이 든 차를 먹였다. 그들을 다스리는 총괄 책임자라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내게 무슨 독을 먹였지? 그리고, 바르보사가 독을 먹이라고 명령했나?”
“아, 아닙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무관한 일입니다!”
집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독의 여부를 알아내고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일단 발뺌을 했다.
자신은 일개 집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면, 로만 드미트리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관하지 않다. 무관했다면, 하인들이 네게 금화를 받아 갈 이유가 없었겠지.”
짜악.
뺨을 날렸다.
눈이 풀린 집사가 순간 무너질 것처럼 휘청거렸지만, 우악스러운 손길은 집사의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만약 금화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인들이 음식을 내오기 전에 집사의 확인을 받는다는 것과 하인들을 이곳에 받아들인 존재가 집사라는 사실은 무관하지 않다.
억울할 이유가 없다.
책임자로서 받는 보상과 의무는, 본인이 무관하다는 말로 변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네가 정녕 억울하다면. 이 상황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불러라.”
“……그, 그건.”
망설이는 눈빛.
폭력에 확신을 부여했다.
찰나의 망설임이 의미하는 바는, 이 사건의 중대함보다는 일을 그르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터.
그때부터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짜악.
뺨을 날렸다.
이 소란을 듣고, 누군가가 찾아오도록.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는 꼬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로만 드미트리는 빙빙 돌아서 가지 않았다.
상대가 대놓고 독을 사용했듯, 대놓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상대의 실수를 잔인할 정도로 들쑤셨다.
예상대로였다.
상황을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결국, 꼬리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 * *
“당장 멈추십시오! 이게 대체 무슨 행패란 말입니까!”
조나탄 자작이었다.
폭력의 흔적이 역력한 그의 얼굴은, 눈앞의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순간.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조나탄 자작이 꼬리라면, 그 너머에 벨피르 후작과 바르보사가 있음을 의미했다.
탁.
손을 놓았다.
간신히 숨만 헐떡이는 집사는 내버려 둔 채로, 로만 드미트리는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방금 이곳의 하인들이 제게 독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집사는 그 하인들을 칭찬하듯 금화 주머니를 주더군요. 조나탄 자작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들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축제 무대를 방해하기 위해서 독을 먹였다고 확신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발할라를 욕보이지 마십시오!”
조나탄 자작이 소리를 내질렀다.
로만 드미트리의 말에.
그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바르보사의 독.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발견해 낼 수 없다.
무색무취(無色無臭)에, 서서히 마나를 흩트리는 능력이라 효과가 즉각적으로 발현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심장이 미칠 듯이 뛰는 것과는 다르게, 조나탄 자작은 당당한 기색을 보였다.
“발할라의 축제는 신성한 무대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저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상을 규명하고 강력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 님. 집사가 독을 사용했다는 것은 너무 과한 억측입니다. 저희는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전에, 독을 판별하는 마법 도구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차에 독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까?”
상황을 몰았다.
책임을 회피하고.
역으로 상대를 비난했다.
“만약 이 차에 독이 없다면. 로만 드미트리 님은 그 책임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번 일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발할라를 욕보인 일이고,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의심이 된다면 축제 무대는 없던 일로 하십시오. 제가 직접 황제 폐하께 보고하고, 로만 드미트리 님을 대신해서 다른 전사를 무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차선책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결을 회피한다면.
애초에 생각한 계획 중 하나를 진행해서, 로만 드미트리에게 ‘겁쟁이’라는 프레임을 씌울 것이다.
진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조사하는 사람과 증거물을 모두 발할라가 관리하는데, 대체 어떻게 독의 존재 여부를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발할라 시민들에게 진실을 규명할 자리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동안 바르보사가 항상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권력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예상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무대는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조나탄 자작님. 독의 존재 여부를 증명한다면, 그때는 제게 내뱉은 말을 책임지셔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독이라는 문제가 표면 위로 올라왔다.
한발 물러나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조나탄 자작은 여유로운 얼굴과는 다르게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 * *
일련의 사건.
벨피르 후작에게 보고되어, 바르보사에게 알려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독의 존재를 알아 버렸다. 그래도 괜찮겠나.”
벨피르 후작의 물음.
불빛에 바르보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뱀처럼 생긴 그의 얼굴에는, 얼굴 한가득 웃음이 피어올랐다.
“벨피르 후작님. 제가 왜 그 독을 선호하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일반적인 독(毒)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처음 독에 중독된 사람들은 미비한 효과에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날뛰지만, 마나를 흩트리는 효과에 곧 창백한 얼굴로 발등에 불이 떨어집니다. 로만 드미트리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어떻게 무색무취의 독을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지금 독이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산공독.
무림에서는 익히 알려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샐러맨더 대륙에서, 산공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 존재는 바로 바르보사였다.
휘리릭.
탁.
단검을 탁자에 찍었다.
서늘한 살기를 드러내며, 바르보사는 확신에 찬 말을 내뱉었다.
“설령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무엇이 걱정입니까? 모랄레스를 압도적으로 쓰러트렸다고 해도, 그것이 저와 대등한 승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증명하겠습니다. 발할라의 12위와 6위의 차이는. 단순하게 6개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압도적인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늘 그렇듯. 저를 믿으십시오.”
“역시, 믿음직스럽군.”
벨피르 후작이 웃었다.
바르보사.
진보파의 충실한 개.
그라면, 이번 계획의 피날레(finale)를 완벽하게 장식할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이었다.
전야제부터 시작해서 떠들썩했던 밤.
그렇게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다음 날.
모두가 바라던 축제는, 아침 일찍부터 하나의 소문으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