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필살(必殺) (5)
며칠 뒤.
예상과는 다르게, 무역 도시로 향하는 동안 크로노스 제국의 추가적인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단 숙소를 잡았다.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로만 드미트리는 워프 게이트의 사용 여부를 확인했는데, 마치 데자뷔처럼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죄송합니다만, 아델리안으로의 워프는 불가능합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크로노스 제국의 그림자들이 국경을 침범하면서 발할라는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워프 게이트를 통해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타국으로의 워프가 전면 금지되었고, 만약 드미트리로 가실 것이라면 파울로 인근으로 이동하셔서 도보로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불가(不可).
돌아온 대답에, 로만 드미트리는 발할라의 의중을 읽었다.
‘이런 의미였던 건가.’
로드리게스와의 대화가 끝나고, 그는 말의 고삐를 잡아채며 의문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로만 드미트리 님. 당신이 발할라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발할라에 전적으로 협력해서 우리가 당신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발할라 황실이 보호하는 존재라면 우리로서도 당신의 죽음이 달갑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저희와의 동행을 거부하신다니 유감스럽군요. 어디 끝까지 발악해 보십시오.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최근.
발할라 황실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이 거셌다.
무역 도시를 앞두고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녹야를 맞닥트린 것은, 발할라가 로만 드미트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본인들이 보호하는 동안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무역 도시에 도착한다고 한들 드미트리로의 이동은 불가하고, 크로노스로서는 국경 밖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다.
고로.
로드리게스가 언급한 유일한 방법은 농락의 의미였다.
발할라 황실에 잘 보이는 것은, 단순히 동행의 수락이 아니라 발할라에 굴복하라는 말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워프 게이트의 책임자는 마린에서처럼 친절한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시겠습니까?”
* * *
산체스가 말했다.
“이건 함정이 분명합니다.”
내일.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워프 게이트로의 이동이 결정되었다.
발할라의 국경을 도보로 넘어간다는 말에, 산체스는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발할라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전시(戰時) 상황이 아니라면 타국으로의 워프를 금지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로만 드미트리 님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낸 것이고, 국경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 님의 죽음은 발할라의 책임이 아닙니다. 국경 밖에서는 어떤 일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설령 발할라가 직접 로만 드미트리 님을 해한다고 할지라도, 목격자가 없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은 크로노스 제국이든, 헥토르 왕국이든 책임을 떠넘길 대상이 많습니다.”
의도가 명백했다.
국경 밖.
그곳은 사지(死地)였다.
발할라가 천문학적인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타국으로의 워프를 중단시킨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를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지금부터 여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국경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발할라가 공개하는 정보의 크기가 진실을 결정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알고 있다. 국경을 벗어나는 순간,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협력해서 내 목숨을 노리겠지. 그들의 관계가 완벽한 협력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한들, 지금 당장은 공통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래도 국경을 넘어가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단호한 대답.
산체스는 이를 악물었다.
답답한 마음에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자신으로서는 로만 드미트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발할라의 전사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그가, 지금은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산체스. 발할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처럼 부패하기 전에 분명히 발할라 스스로가 미래를 결정하는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발할라는 현실과의 타협을 택했다. 그때의 결정권자들은 ‘단 한 번의 예외’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타협이 선물하는 안락함과 막대한 보상은 절대 그 달콤함을 잊을 수 없게 만들지. 발할라는 그렇게 몰락했다. 부패했고, 적어도 내가 경험한 이 나라는 전사의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한 번의 타협을 강조했다.
정점에 오르길 바란다면.
선례는 중요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시련에 굴복한다면, 정상으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고비를 모두 이겨 낼 수 없다.
그때마다, 타협의 안락함이 떠오를 테니까.
“나는 이번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적의는 부당한 명분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들과의 타협은 힘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제국의 힘으로도 굴복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단 한 번의 타협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기에, 나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다.”
순간.
산체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보았다.
이 사내가 말하는 명분은, 발할라가 역사적으로 강조하던 전사의 의지와 부합했다.
확실했다.
자신을 비롯한 발할라의 전사들이 모두 죽는다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살려 보내야만 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이 한목숨 바치겠습니다.”
“아니. 너는 발할라에 남아라.”
“하지만……!”
“산체스. 네가 나와 같이 발할라의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너는 발할라의 치부(恥部)를 목격한 증인이 된다. 나의 생존 여부와는 별개로. 너와 관련한 모든 사람은 증거인멸을 위해 제거당할 수밖에 없겠지. 발할라에서 동행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발할라의 늦장 대응은 비난을 받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국경 밖에서의 일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발할라의 비밀이다.”
앞으로의 미래.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갔다.
산체스라는 존재는, 보다 의미 있는 일에 사용될 필요가 있었다.
“발할라에 남아, 전사의 자긍심을 기억하는 자들을 규합하라. 발할라 남부 끝에. 한때는 발할라의 권력자였던 비에토 공작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를 설득해 발할라 황실에 대항할 힘을 갖추어라. 훗날. 발할라가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때는, 힘을 갖춘 목소리만이 발할라를 바로잡을 유일한 방법이다.”
산체스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무력감을 기억하고,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로만 드미트리는 걸음을 돌렸다.
“너는 너의 일을 하거라.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드미트리가 감당할 몫이다.”
* * *
다음 날.
로만 드미트리와 병사들이 국경을 떠났다.
발할라의 사람들은 멀리까지 나와 환호성을 보냈지만, 국경과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모습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에.
시간이 열흘쯤 흘렀을 때,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황야(荒野)에는 로만 드미트리와 그의 병사들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확.
히이이이잉!
가장 선두에서.
한 사내가 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완벽한 무장을 갖추고 나타난 그는, 얼마 전에 로만 드미트리와 맞닥트렸던 녹야의 수장 로드리게스였다.
“로만 드미트리 님. 오랜만입니다.”
그 뒤로.
병사들이 도착했다.
언뜻 보아도 수천에 달하는 병사들이었고, 녹야의 전사들은 짐승의 털로 장식한 갑옷을 두른 채로 흉흉한 기색을 보였다. 발할라의 무력 단체.
녹야는 최전선(最前線)에서 활약하는 존재들이었다.
발할라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맞닥트리는 이들이 녹야라는 말도 있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대치가 이루어지는 상황에, 로드리게스는 적의를 숨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라고. 로만 드미트리 님이 발할라의 초대를 승낙한 순간부터. 아니, 덴버 백작의 목숨을 취한 그 순간부터. 지금과 같은 일은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발할라 제국은 은원(恩怨)을 잊지 않습니다. 당신이 발할라를 위해 충성을 맹세했다면 부귀영화를 누렸겠지만, 적의를 드러냈기에 당신을 살려 보낼 수가 없습니다.”
적의가 팽배하게 차올랐다.
드넓은 황야에.
목격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발할라의 사람들은 진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크로노스, 발할라. 사람들이 강자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은, 오랜 시간 정상의 자리에 머물면서 착각에 빠져들고는 하지. 언제나 본인들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는 착각. 손바닥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항상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맹목적인 믿음.”
슥.
로만 드미트리가 검을 뽑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눈앞에 닥친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양측의 병력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축제 무대.
바르보사와 로만 드미트리의 승부를 바라보며, 로드리게스는 피가 끓었다.
‘로만 드미트리. 겨우 20대의 나이에, 바르보사를 압도하는 실력을 보여 주다니!’
감탄했다.
전혀 경계하지 않았던 약소국 출신의 검사가,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는 승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자리.
로드리게스를 비롯한 상위 랭커들이 자리했다.
그들은 저마다 바르보사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다.
만약 바르보사가 아니라 자신이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했다면, 저 파괴적인 검술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을까.
로드리게스는 비록 바르보사보다 1단계 낮은 7위에 랭크되어 있는 존재였지만, 본인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르보사는 권력의 앞잡이로서 최전선보다는 실익을 추구하는 대결을 담당해 왔다.
그만큼 실전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대륙 십이검이라는 명성과는 별개로 로드리게스는 본인이 일정 부분은 우위라고 생각했다.
전장 한복판.
로드리게스의 세상이었다.
격렬하게 부닥치는 상황에서, 로드리게스의 시선은 로만 드미트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콰르릉.
콰르르르르릉.
그야말로 전장의 악마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선두에 나섰고, 녹야의 전사들이 오라를 일으키며 달려드는데도 단번에 그들을 도륙해 버렸다.
머릿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분명히 발할라 제국이 유리한 상황인데도, 로만 드미트리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참.
재밌는 광경이었다.
만약 부연 설명이 없다면, 전사의 나라라는 칭호는 드미트리에 어울렸다.
‘발할라가 위대한 전사라고 부르는 존재. 그 존재의 명을 내가 끊는다면 그건 정말 황홀한 일이겠지.’
발할라의 수뇌부.
그들은 절대 무리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발할라 국경에서 드미트리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가 차근차근 로만 드미트리의 병력을 갉아먹다가, 완전히 약해졌을 때 숨통을 끊어 버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 시작을 녹야의 전사들이 맡았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적당히 싸우다 빠져야 하건만, 로드리게스의 호승심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
수많은 가능성이 뒤얽혔다.
로만 드미트리를 어떻게 쓰러트릴지 수도 없이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전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릉.
콰르르르르릉.
단 하나의 가능성.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릴 방법을 떠올렸다.
상대는 자신의 전력을 모르지만,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기에 가능한 일.
녹야의 전사들이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다.
정신없이 주고받는 공방에, 로만 드미트리로서는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다.’
번뜩.
폭발하는 오라.
로드리게스의 비기가 발현되며, 눈으로 감히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상대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그 순간.
비틀.
“……?!”
로드리게스의 몸이 흔들렸다.
분명히 로만 드미트리를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목 부근에서부터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시선이 비틀렸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의 머리가 베어졌다는 사실을.
바르보사도 해내지 못한 일에 도전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자의 오만에 불과했다.
푸확.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국경에서의 전투.
그것은, 처음부터 로드리게스의 죽음으로 격렬한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