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6화 (246/615)

246화 필살(必殺) (6)

국경에서부터 날아온 패전 소식.

수하의 보고에, 벨피르 후작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녹야가 괴멸(壞滅)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로드리게스는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죽었고, 일부 병력만이 살아남아서 후발대와 합류한 상태입니다.”

“쯧쯧,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일렀건만.”

상황은 뻔했다.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로드리게스는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했을 테고, 로만 드미트리는 그런 기회를 놓칠 존재가 아니었다.

바르보사를 7번의 공격 만에 쓰러트린 괴물이다.

로드리게스가 아무리 최전선에서 활약한 베테랑 전사라지만, 이번만큼은 상대에 대한 경각심을 잃지 말았어야 했다.

결과를 떠나.

확실히,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아무리 로드리게스가 무리했다고 한들, 녹야의 부대는 그렇게 만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녹야를 괴멸시키다니. 로만 드미트리는 무서운 인물이다. 과감한 판단력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무력까지. 이런 괴물이 발할라의 적으로 돌아선다면, 분명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반드시. 드미트리로 돌아가기 전까지, 로만 드미트리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임무에 투입하는 병력에게 명하라. 이번 작전은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이다. 로드리게스의 선례처럼 무리하게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크로노스의 전력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적의 살을 갉아먹어라. 로만 드미트리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다. 그에게도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렸다.

이만 물러나는 수하의 모습에, 벨피르 후작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실패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쌓여 가는 보고에, 어느 순간부터는 여유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벨피르 후작님!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던 게릴라 부대가, 꼬리를 잡히는 바람에 병력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산으로 진입하자 오히려 로만 드미트리의 추격을 떨쳐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크로노스의 병력이 격퇴를 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드미트리의 피해는 미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할라의 랭커들을 동원했으나, 이번에도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 내지 못했습니다. 게릴라 작전은 사실상 실패입니다. 로만 드미트리와 맞닥트리는 순간 선두의 병력이 대부분 괴멸을 당해 버리니, 저희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상황을 주도할 수가 없습니다.”

계속되는 보고.

현기증이 일었다.

상대를 인정했는데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결과였다.

‘로만 드미트리. 정말 무력으로 국경을 돌파하겠다는 건가.’

사실.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에 숨은 의도가 있다고 믿었다.

발할라와 크로노스가 대놓고 살의를 드러내는 상황에서, 사방이 트여 있는 국경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라 외부의 세력을 경계하면 계획에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애초에 로만 드미트리를 맞닥트리는 족족 모조리 괴멸을 당하고 말았다.

이번 작전.

피해가 상당했다.

바르보사와 로드리게스를 포함해, 벌써 발할라의 상위 랭커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여섯이나 죽었다.

곤란했다.

이따위 결과라면, 승리해도 피해를 수습하기 힘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정녕 두려운 인물이구나. 바르보사와의 대결에서 보여 주었던 그의 무력은 전력이 아니었고,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크로노스 제국의 군대도 그만한 강군(強軍)은 아니다. 드미트리를 이대로 살려 보낸다면, 우리는 강력한 군대를 갖춘 드미트리의 등에 날개를 달아 주는 꼴이 되겠지.”

상대를 인정했다.

시간은 발할라의 편이나, 지금은 승부수가 필요했다.

결국.

“지금 당장 황제 폐하를 만나야겠다.”

어떻게든 본인의 선에서 정리하겠다고 말했던 벨피르 후작은, 참담한 심정에 이를 악물었다.

* * *

보고가 전달되었다.

발할라 황제.

그가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에서, 벨피르 후작과 고메스 백작은 죄인처럼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일련의 상황.

벨피르 후작과 고메스 백작이 동시에 힘을 합친 일이고, 국경을 떠난 지 벌써 보름에 달하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지 못했다.

지금부터는 어떤 형벌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가 강하다는 변명을 하기에는, 이 나라는 대륙의 양대산맥이라고 불렸다.

발할라 황제가 웃었다.

“로만 드미트리, 정말 재밌는 녀석이야. 발할라의 의도를 알고도 초대에 응하더니, 단 한 번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고 무력으로 살아 돌아가려고 하다니. 게릴라 작전은 더는 의미가 없다. 로드리게스와 같은 실전에 강한 전사들조차 일격에 당해 버릴 정도라면, 사실상 발할라의 최상위 랭커들이 나서지 않는 이상 발목을 붙잡을 방법이 없다는 의미겠지.”

그렇다고.

발할라의 병력을 추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사람들도 눈과 귀가 있기에,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면 분명히 국경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크로노스와 발할라는 다르다.

크로노스는 대놓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지만, 발할라는 아직 민심(民心)을 완전히 통제 안에 들이지 못했다.

민심에 불이 붙는 순간.

발할라는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발할라의 전사들을 더는 잃을 수 없다. 만약 이번 일을 주도한 주체가 발할라 제국이었다면,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배제하고 로만 드미트리를 어떻게든 죽이라고 명령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의 주체는 크로노스 제국이다. 패배의 책임은, 결국 그들에게 있다는 의미지.”

문득.

궁금해졌다.

발할라 황제는 크로노스의 의도를 알았다.

그들은 카이로에서의 전면전을 시작으로 번번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당하고 있기에, 이번만큼은 확실한 성과를 얻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발할라로서는 딱 이 정도까지. 지금부터는 로만 드미트리가, 크로노스가 준비한 음모를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들떴다.

발할라 황제는.

때로 제국의 이득보다, 본인의 흥미가 더욱 중요했다.

“병력을 한발 물려라. 지금부터는, 드미트리와 크로노스의 싸움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지켜볼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필살(必殺).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만약에 로만 드미트리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순간, 그때는 다시 살의를 드러낼 것이다.

* * *

보름.

피가 말리는 시간이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이동했는데도,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표정에서부터 피곤함을 감추지 못했다.

“죽어!”

퍽.

상대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림자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끝까지 단검을 휘둘러 댔고, 병사는 그대로 몸을 들이받더니 상대를 넘어트렸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검을 박아 넣었다.

얼굴에는 이전에 묻은 피인지 방금 묻은 피인지 알 수 없는 자국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한참을 공격한 끝에 그림자의 숨통을 끊었다.

“허억, 허억.”

숨이 차올랐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아직도 상대해야 할 적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벅찼다.

고된 훈련을 감당했던 드미트리의 병사들로서도 보름이 넘어가는 강행군에 한계에 달했지만, 육체적으로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이를 악물었다.

애초에 각오한 일이다.

힘든 일임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시야에 가장 선두에서 적들을 상대하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보였다.

콰르릉.

콰르르르르릉.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매 전투마다.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선두에서 적들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닥트렸고, 덕분에 대부분의 공격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집중되었다.

그간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전전했으면서도. 보름이 넘도록 흔들리지 않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래서 버텼다.

아직 로만 드미트리가 쓰러지지 않았기에.

그를 믿고 따른다면,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살아서 드미트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확.

콰직.

로만 드미트리가 상대의 몸을 베었다.

순식간에 그림자들 사이로 파고들었고, 사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들은 간결한 스텝으로 모두 피해 버렸다.

존재감이 무섭게 부풀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땅을 밟으면 마나의 파동이 일어나며 그림자들의 균형을 무너트렸고, 검을 휘두르는 순간 건재했던 적들의 몸이 단번에 찢겨 나갔다.

일대 다수.

익숙한 구도였다.

천마 백중혁으로서 살아가며, 유리한 싸움은 그리 많지 않았다.

피로가 밀려오고, 굶주리고, 정신이 예민하게 변하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가치는 빛을 발했다.

전투는 단발적이었다.

그림자들은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해가 저물었다.

밤새 치러진 전투는, 어느새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다.

그때였다.

펄럭.

타그닥, 타그닥.

저 멀리.

일단의 병력이 밀려 들어왔다.

적들의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생각에,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의 넓은 등판을 바라보며, 드미트리는 언제나처럼 사지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그것은 분명히, 헥토르 왕국의 상징이었다.

* * *

“드미트리를 도와서, 적들을 공격하라!”

에드윈 헥토르.

그가 선두에 있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공격을 명령한 그는, 마나를 일으키며 마법을 발현했다.

“파이어 필드(Fire Field).”

화륵.

화르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주변을 불태우는 강력한 화염에, 그림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연기로 흩어지는 그들의 능력은 물리적인 공격에만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마법을 상대로는, 몸이 버텨 내질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 하나로 인해 팽팽한 균형이 유지되던 싸움이었다.

그런데 헥토르의 병사들과 에드윈 헥토르의 등장에, 전장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공격하라!”

“죽어!”

반격.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힘을 쥐어 짜냈다.

크리스를 비롯한 오라 검사들이 선두에서 길을 열었고, 득달같이 달려들며 그림자들을 도륙해 버렸다. 몸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휴식을 간절히 바라는 몸은 완벽한 상태의 움직임을 재현해 내지 못했지만, 수많은 고비를 넘겼던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경이로운 정신력을 보였다.

적을 베고.

또 베었다.

상대의 반격에는, 서로에게 등을 맡긴 채로 악착같이 받아쳤다.

승기를 잡았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에, 그림자들은 결국 후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물러나는 적들.

이번 승리는 의미가 남달랐다.

단순히 헥토르 왕국의 지원을 떠나서, 크로노스 제국의 그림자들이 작정하고 승부수를 띄운 전투였다.

이전과는 다르게 밤새 이루어진 전투.

이번만큼은 로만 드미트리의 숨통을 끊어 버리겠다고 수많은 그림자를 동원한 크로노스 제국은,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승리했다.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피로가 단번에 사라졌고, 무기를 치켜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었다.

에드윈 헥토르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지금 당장 드미트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드미트리가, 크로노스 암살자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 * *

음침한 공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존재가 물었다.

“만약 이번에도 로만 드미트리를 처리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로만 드미트리는 항상 예상을 벗어난 행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발할라의 도움과 크로노스의 그림자들. 승리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그들을 무찌르고 살아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간의 일.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상식을 벗어났다.

만일의 상황을 지적하는 물음에, 반대편에 있는 존재가 말했다.

“크로노스가 강한 이유는 거대한 무리를 형성한 ‘제국’이기 때문이다. 로만 드미트리는, 결국 약소국 출신에 불과하다. 발할라를 동원해 로만 드미트리를 제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되. 변수를 배제한 한 가지의 전략을 동반할 것이다. 변수의 주체는 로만 드미트리다. 그가 없는 드미트리는, 결국 제국의 공격에 안전할 수 없겠지.”

목표는 하나가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드미트리 그 자체였다.

어둠 속의 존재가, 히죽 웃음을 보였다.

“크로노스에게 이빨을 드러낸 녀석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며칠 전.

로만 드미트리가 국경을 헤쳐 나가는 그때.

드미트리는, 로만 드미트리가 없는 위험을 맞닥트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