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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248/615)

248화 드미트리에 드리운 그림자 (2)

이번 발할라행.

케빈과 마찬가지로, 헨더슨과 같은 인물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따라나서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내가 발할라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발할라는 내가 거절할 상황을 대비해서, 의도적으로 이번 일과 관련한 소문을 퍼트렸지. 만약 너희가 크로노스 제국이라면. 내 행적이 명확하게 드러난 지금, 이번과 같은 기회를 지켜보기만 할 것 같나.”

“분명히 움직일 것입니다. 암살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이들이, 가만히 지켜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드미트리로 돌아오는 길.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수하들은 더더욱 따라나서야 한다고 말했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내가 발할라로 떠났다는 사실은, 드미트리에 내가 없다는 의미와 같다. 크로노스 제국은 사소한 분쟁에서조차 본인들이 승자이길 바라는 나라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함과 동시에, 다른 왕국들에 대한 본보기로 드미트리를 직접 공격할 확률이 높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크로노스가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겠지만, 그들은 이미 그림자들을 동원해서 국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보를 보여 주었다. 너희에게 묻겠다. 내가 발할라로 떠난 사이에. 드미트리가 크로노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너희를 포함한 전력이 이탈한 상태에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불가능합니다.”

“그래, 불가능하다. 지금부터 우리는 일개 영지가 아니라, ‘하나의 국가’로서 판단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가설이 새로운 가설을 낳았다.

크로노스가 암살을 시도할 작정이라면, 그들의 선택지에 드미트리가 있음을 배제할 수 없었다.

천마 백중혁.

정점에 올랐던 존재다.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제한된 시선에서 비롯되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지만, 백중혁은 무림이라는 넓은 세상을 다스렸던 존재다.

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는 세상에서. 백중혁의 통치 아래에, 천마신교를 비롯한 중원 무림은 안정을 찾았다.

분쟁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서로의 이득을 탐하는 싸움은 계속되었지만, 적어도 세상의 불합리함을 통제할 하늘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크로노스의 의도를 알았다.

만약 본인이 크로노스 제국의 입장이었다면.

대륙 정벌을 바라는 상황에서, 드미트리 공국과 같은 눈엣가시가 계속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싹이 자라서 거목을 이루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미리 짓밟아서 성장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고, 로만 드미트리의 부재는 드미트리를 공격할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발할라의 초대라는 단 하나의 전제를 기반으로.

로만 드미트리는 생각을 뻗어 나갔다.

상대의 선택지들을 하나씩 계산하면서, 만일의 변수에 대항할 방법을 미리 구상했다.

어느 누군가는.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설은 가설일 뿐이고,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은 괜히 심력(心力)을 소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리기에.

로만 드미트리는, 권력자의 의무를 알았다.

“너희는 드미트리에 남아라. 그리고 크로노스가 공격해 오거든, 그들에게 그 대가를 치러라.”

단호한 명령.

더는 반문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하늘이 명령한다면.

그때부터는, 그것이 법이고 진리였다.

* * *

10분 전.

촤르르르륵.

플로라가 지도를 펼쳤다.

드미트리의 내부를 기록한 지도였고, 플로라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보름 전부터. 의문의 존재들이 드미트리에 입성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검문(檢問)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신분을 증명했지만, 정보 길드를 통해 알아본 결과 출신이 불분명한 존재들이 많았습니다. 그 말인즉. 누군가가 드미트리에 사람들을 침투시킨다는 것이고, 크로노스가 대놓고 공격을 감행한 지금은 그 존재들이 ‘암살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한 번의 사례가 있었다.

드미트리로 스며든 암살자들은, 암살을 시도했으나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완벽하게 박살이 났다.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의 부재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적들이 공략할 포인트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자 창고. 식량을 비롯한 전쟁 물자를 저장한 창고에 불을 지른다면, 우리는 수성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동요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성문. 공성전은 결국 성문을 빨리 여느냐의 싸움이고, 내부에서 공격해 오는 적들은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내성. 이번 공성전의 승패를 떠나, 그들은 내성의 중요 인물들을 사살하는 것만으로도 확실한 전과를 얻어 갈 수 있습니다.”

정리는 빨랐다.

책사로서.

플로라는 오늘과 같은 상황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단편적으로 확보되는 정보들과 머릿속의 지식만으로도,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수성은 조나단 기사단장님과 펠릭스 마탑주님의 영역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수를 차단하는 것. 겁도 없이 드미트리에 발을 들인 녀석들을, 모조리 사살해야만 합니다.”

서늘한 눈빛을 보였다.

한때는 개미 하나 죽이지 못했지만.

지금에 이르러, 그녀는 적(敵)이라고 명시한 존재들에 한해서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세부 전략을 지시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플로라가 지도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각자 제자리로 이동합시다.”

* * *

첫 번째 포인트.

물자 창고로 향하는 길에는 일반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이 많았다.

그림자들은 어둠에 스며들었고, 골목길을 활용해서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물자 창고로 향했다.

그때였다.

몸을 숨길 작정으로 한 집의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폭발음이 들렸다.

투웅.

펑펑!

하늘 위로.

밝은 폭죽이 빛을 발했다.

순간, 그림자들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런.”

위치가 발각되었다.

그림자는 빠르게 도망쳐서 어둠으로 사라지려고 했는데, 일련의 무리가 나타나 그들을 공격했다.

“어딜!”

퍽-

헨더슨이었다.

헨더슨과 맥버니가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고, 폭죽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그림자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그림자들의 반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드미트리에서 벌어지는 전투기에 머릿수가 밀릴 수밖에 없었고,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그림자를 제압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했다.

그런데.

폭죽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일전에 내린 명령으로부터 비롯된 조치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암살과 같은 내부에서의 전투가 일어났을 때 일반인들이 해야 할 역할을 말했다.

“드미트리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일반 백성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도심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일반 백성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문이 열리면 폭죽이 터지는 함정을 설치해라. 그것은 일종의 신호다. 적이 아니라면 문을 열 이유가 없기에. 드미트리의 병사들은, 그 신호를 보고 적의 위치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십만대산.

정파 무림인들은 그곳을 함락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는, 십만대산의 험난함을 떠나서 밑에 사는 일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교를 따랐다.

정파 무림인들에게 비협조적이었고, 마교의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지시한 바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드미트리와 백성들이 운명 공동체라면.

적어도 그들이 최소한의 역할을 해내길 바랐다. 대단한 역할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차이를 만들었다.

드미트리의 땅.

홈그라운드의 이점이었다.

집에서 주변을 살피는 사람들이 폭죽을 터트렸고, 그림자들의 위치는 금방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름길을 따라 그림자들의 이동 경로를 차단하라.”

맥버니.

그의 존재감이 빛을 발했다.

그는 한때 남부 훈련소를 통제했던 교관이었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병력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외팔이 검사의 진정한 능력은 검술에 있지 않았다.

그는 병력을 빠르게 통제하며 그림자들을 몰아넣었고, 헨더슨을 비롯한 동북쪽 일대의 출신들은 드미트리의 지리를 파악해 지름길을 공략했다.

서로를 보완하는 능력.

일부러 둘을 배정했다.

물자 창고를 노리던 그림자들은 궁지에 몰렸고, 막다른 길에서 그림자들은 필사(必死)의 항전을 택했다.

그러나.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드미트리 병사들에 의해, 첫 번째 포인트를 노리던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 * *

두 번째 포인트.

그곳은 특별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막아 내는 것.

단 하나의 목적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병력을 이끌고 적들이 이동할 만한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로드웰 드미트리다.”

“명단에 포함된 존재다. 저 녀석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라.”

그림자들.

그들이 살의를 드러냈다.

일제히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에, 로드웰 드미트리는 눈가의 통증을 느꼈다.

‘앞으로 내가 드미트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난 일들.

격변(激變)의 시간이었다.

최전선에서 카이로를 위해 싸우던 로드웰 드미트리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드미트리 공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히 형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문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림으로써 한동안 방황했다.

더는.

드미트리를 위해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있기에, 사람들은 로드웰 드미트리에게 강압적으로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다.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밖에서 많은 생각을 했던 로드웰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와 크로노스의 마찰에 앞으로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권력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드미트리가 무너지길 바라지는 않았다.

드미트리가 나아가는 길에, 드미트리의 핏줄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문제였다.

자신은 로만 드미트리의 혈족(血族)이다.

일반적인 존재들과는 다르게, 혈족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신뢰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로만 드미트리는 말했었다.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형이 없는 자리에서, 나는 드미트리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다.’

안대를 버렸다.

눈가를 가로지르는 상처를 내비치며, 로드웰 드미트리는 현실을 직시했다.

“죽어!”

콰릉.

콰르르르르릉.

달려드는 그림자들.

그들을 향해, 로드웰 드미트리는 똑같이 땅을 박찼다.

* * *

두 포인트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플로라 로렌스의 예상대로, 내성(內城)에 진입하려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많았다.

드미트리에 침투한 절반의 병력을 물자 창고와 성벽에 보냈다면, 나머지 절반은 모두 내성으로 향했다.

그들의 목적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전쟁의 승패는 내성 밖에 달려 있는 데도, 그들이 내성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드미트리 공작’의 존재 때문이었다.

내성 앞.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굳이 몸을 숨기지 않고, 흉흉한 살기를 드러냈다.

“길을 열어라.”

콰릉.

콰르르르르릉.

사방에서 오라가 일어났다.

마치 어둠이 밀려오는 것처럼, 그림자로 물든 주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을 유발했다.

그런데.

내성을 지키는 존재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를 기점으로 도열한 병사들은, 그림자를 확인하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크로노스. 기어코 선을 넘는구나.”

슥.

검을 뽑았다.

사람들은 묻는다.

드미트리에서,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검사는 누구일까?

명백하게 크리스다.

크리스가 그간 보여 준 행보는,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을 형성했다.

그렇다고 크리스의 존재가 절대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세간의 평판은 뒤떨어지지만, 최근에 크리스에 버금가는 명성을 쌓아 가는 존재가 있었다.

케빈?

아니다.

은빛의 갑옷을 착용한 사내가, 적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지나갈 수 없다.”

드미트리 공국(公國).

그곳을 지키는 왕실 기사단의 단장.

페르난도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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