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드미트리에 드리운 그림자 (3)
카이로가 격변하던 시기.
페르난도는 변화에 휩쓸렸다.
로만 드미트리를 찾아갔을 때, 그는 페르난도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명확하다. 페르난도라는 사내가, 나를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날.
페르난도는 한 줄기의 빛을 보았다.
사람들은 30위의 수문장이라고 불리는 페르난도를 조롱하고 모욕했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봐 주고 앞으로의 미래를 말했다.
어쩌면 그가 말만 번지르르한 사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사내라면, 삶의 전부를 바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드미트리로 향했다.
그리고.
신세계를 목격했다.
동북쪽 끝자락에 이렇게 부유하고 활기찬 도시가 존재한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가장 경악스러운 부분은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훈련하는 방식이었다.
페르난도는 그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자 노력했다.
발할라와 같은 제국에서 인정받는 대단한 기술을 들여와도, 사실 그렇게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만큼 대단한 수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말하는 무공은 달랐다.
새로운 방식으로 마나를 다루는 순간, 페르난도는 그간의 상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기술이 있다니.’
황홀했다.
그동안은 마나를 다루면서 상당히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내 전체에 퍼져 있는 마나들은 통제를 완벽하게 따라 주지 않았고, 오라를 분출하는 과정에서 흘리는 마나도 많았다.
하지만 비효율적인 방식이 모두가 따르는 정도(正道)였다.
방식에 관한 아쉬움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오라 검사들이 행해 왔던 방식을 부정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들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
페르난도는 새로운 지식을 무섭게 빨아들이며, 로만 드미트리의 가르침을 따라 약점을 보완했다.
처음에는 고된 시간이었다.
태생적으로 마나의 길목이 좁은 페르난도는 마나의 운용에 제약이 많았고, 단전에 마나를 쌓으면서도 남들보다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페르난도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동안 30위의 수문장이라고 불리면서도 발전의 가능성을 절대 놓지 않았던 그이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은 웃으면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희망적이었다.
아주 미비하지만. 분명히 성과가 발생하고 있었고, 드미트리에서 지내는 동안 페르난도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수련에매진했다.
결국.
콰앙!
마나의 길이 열렸다.
새로운 마나의 길을 개통하는 순간, 페르난도는 전혀 다른 영역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말했다.
“페르난도. 참 안타까운 인물이야. 신체적인 한계가 있는데도 4성의 오라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일반적인 수준의 재능만 타고났어도 어느 정도로 성장했을지 예상할 수 없어. 30위의 수문장이라는 별명은. 노력의 한계라는 의미와 더불어, 노력만으로도 그 자리에 오른 페르난도의 대단함을 의미하지.”
그런 그가.
자신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감사함을 표현한 그 날.
로만 드미트리는, 페르난도를 드미트리 왕실을 수호하는 검(劍)으로 삼았다.
* * *
특별한 신호도 없이.
그림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밀려드는 검은 물결에, 페르난도가 오라를 일으켰다.
“적들을 막아라!”
콰릉.
콰르르르릉.
이전과는 기세부터가 달랐다.
대기를 일그러트릴 것 같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오라가, 정면에서 달려드는 그림자들을 그대로 맞닥트렸다.
그림자들은 동시에 페르난도를 공격했다.
서로의 오라가 힘을 합치며 엄청난 존재감을 보였지만, 페르난도와 검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의 오라가 단번에 찢겨 나갔다.
파지지직.
마나가 흩어졌다.
당황하는 그림자들이 물러나려는 순간, 페르난도가 앞으로 치고 나가며 그들의 육체를 베었다.
번뜩.
그림자들이 검붉은 피를 흩뿌렸다.
페르난도는 그에 그치지 않고, 오라를 폭발시키며 그림자들로 득실거리는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위험천만한 장면이었다.
사방에서 그림자들이 공격해 오며 목숨을 노렸지만, 페르난도의 검술은 적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아니, 막음과 동시에 공격한 상대를 곧바로 베었다.
푸확.
그림자로서는 막아 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오라의 폭발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콰르르르릉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는 이미 머리가 날아갔다.
파팟.
파파팟.
그림자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들도 페르난도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일부는 그림자를 일으키며 속박을 시도하고, 또 다른 일부는 페르난도를 피해 내성 안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애초에 페르난도를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페르난도보다는, 명단 안의 인물을 죽이는 것이 그림자들에게 중요했다.
순간.
콰앙!
페르난도가 땅을 박찼다.
속박이 단번에 풀려 버렸고, 마나의 파동이 일어나며 그림자들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그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어딜.”
번뜩.
그림자들의 목이 날아갔다.
페르난도는 그림자들이 자신을 지나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불순한 의도를 보인다면 득달같이 쫓아가 목을 베어 버렸다.
페르난도의 존재감이 무섭도록 부풀었다.
한때는 무색무취(無色無臭)의 검사라고 불리던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주인을 만나서 등에 날개를 달았다.
지금, 이 순간.
페르난도는 삶의 의미를 찾았다.
검의 존재 의미를 명백하게 증명하는 상황에, 페르난도는 이보다 즐거울 수가 없었다.
‘검사는 의미 있는 일에 검을 사용했을 때, 비로써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법. 그동안의 나는 태생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수렁에 빠진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로만 드미트리 님을 위해 살아간다면,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검사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자신의 노력이.
자신의 검술이.
유의미한 의미를 품었다.
짧지 않은 세월 방황했던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단 하나의 존재에 의해 제 길을 찾았다.
콰직!
그림자들을 짓밟았다.
더욱 잔인하게.
감히 로만 드미트리를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페르난도의 이러한 면모를 알아봤는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에게 드미트리 왕실을 수호하는 검의 칭호를 내렸고, 그때부터 페르난도는 무색무취가 아닌 명확한 색을 나타냈다.
강렬한 불길.
페르난도의 존재감이 그림자들을 뒤덮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기습적이고 완벽했던 계획은, 그렇게 드미트리의 구성원들에게 하나씩 막혔다.
결국.
서걱.
마지막 그림자마저.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페르난도는, 내뱉은 말처럼 단 한 명의 그림자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 개의 포인트.
결과는, 그림자의 전멸(全滅)이었다.
* * *
성 밖.
미스틱이 놀랍다는 표정을 보였다.
링크(link)를 통해, 성에 진입한 그림자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림자들마저 실패했단 말인가.”
경악을 넘어.
이제는 황당할 정도였다.
일반적인 암살자들이 아니라 그림자들이었다.
만약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막는 것은 힘들었을 텐데, 그림자들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빠르게 처리해 버렸다.
드미트리에는 영리한 머리가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림자를 처리할 수 있는 존재들이, 서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내부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건재한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수하가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틱 님. 동북쪽 일대에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습니다. 드미트리 공국에 소속되어 있는 영지들에서 지원군이 출발했고, 카이로 왕국도 빠르게 국경으로 병력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적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빠르면 12시간입니다. 그 안에, 적들의 지원군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드미트리 소속 영주들의 대응은 일사불란했다.
그들은 드미트리가 공격당했다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원군을 편성해서 곧바로 보냈다.
서로의 신뢰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드미트리 공국에 소속되어 있다지만, 그들이 드미트리를 진심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이렇게 빨리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동북쪽 일대 귀족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병력을 보냈다. 게다가 카이로 왕국까지 반응하다니.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드미트리는 일개 남작 가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모두의 신뢰를 받는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
“드미트리. 알면 알수록, 위험한 존재들이구나.”
역시.
크로노스의 판단은 옳았다.
겨우 드미트리 따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따위라고 불릴 때 싹을 잘라야만 했다.
크로노스와 발할라도.
발전하기 이전의 시작점은 존재했다.
드미트리를 이대로 둔다면 분명히 위험해질 것을 알기에, 크로노스 제국은 결단을 내렸다.
미스틱에게 명령을 내렸던 존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실패가 허락되지 않는 싸움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전력을 다해 드미트리를 무너트릴 필요가 있다. 드미트리와의 승부에 1의 전력이면 충분하다면. 우리는 이번 작전을 위해 10의 전력을 투입해, 만일의 변수도 완전히 차단할 것이다.”
그는 맹수였다.
토끼 하나를 잡아먹기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진정한 맹수.
명령이 떨어졌다.
미스틱이 이끄는 크로노스의 군대는 10에서 3의 전력에 불과했고, 그림자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3에 해당했다.
미스틱은 여유를 잃지 않은 표정으로 드미트리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양방 작전은.
애초에,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한 전초전(前哨戰)에 불과했다.
* * *
드미트리 왕궁.
그곳은 안전했다.
내성이 뚫리지 않았기에, 드미트리 공작이 머무는 공간만큼은 모두가 안전하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
예상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퍽.
콰직!
드미트리의 병사가 벽에 처박혔다.
적을 발견하고 신호를 보내려던 그는,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압도적인 힘에 쓸려 나가고 말았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어둠으로 물든 존재.
그림자와 비슷한 형태의 사내가 이죽거렸다.
크로노스는 이번 전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과가 명확했다.
크로노스 제국에 반하는 녀석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를 보여 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드미트리를 무너트리고 처참하게 짓밟거나, 아니면 이들이 모시는 ‘왕’인 드미트리 공작을 죽이는 것이 방법이었다.
목적을 위해.
스벤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나섰다.
간혹 오라 검사들이 길을 막아선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스벤의 공격을 단 한 번도 막아 내질 못했다.
콰르르르릉.
폭발하는 오라.
6성의 힘이었다.
그림자 중에서도, 스벤은 압도적인 힘을 갖춘 존재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세 개의 그림자.
물리적인 힘을 흘려보내는 존재가 일반적인 그림자라면,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존재들을 크로노스에서는 심연의 악마라고 불렸다.
그리고 스벤 또한 똑같이 심연의 악마라고 불리는 존재 중 하나지만, 대륙의 사람들은 세 개의 그림자 중 다른 한 갈래로 표현했다.
고로.
그림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었다.
특별하거나, 특별하지 않거나.
스벤이 넓은 복도를 걸었다.
밖은 전투로 시끄러운 상태.
이 끝에 드미트리 공작이 존재한다면, 단언컨대 그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스벤은 거대한 문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앳되지만 살쾡이같이 사나운 얼굴. 독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에 광기(狂氣)를 풀풀 풍기고 다니는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의 밑에 한 명이 존재한다고 들었지. 이름이 아마, 케빈이라고 했던가.”
슥.
사내.
케빈이 일어섰다.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케빈은 이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스벤이 활짝 웃었다.
“좋구나. 척살 대상과 드미트리 공작을 동시에 처리할 기회라니.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콰릉.
콰르르르르릉.
스벤이 오라를 일으켰다.
6성에 달하는 오라.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드미트리의 그 어떠한 검사도 막아 낼 수 없는 막강한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