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국제회의 (2)
소문의 시작은 하인들로부터였다.
“요새 로만 도련님이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
“이 사람아. 로만 도련님은 드미트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부상자들을 돌보겠다고 치료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어. 그래서 대외적인 활동이 당분간 중단된 것이고. 이러다가 로만 도련님의 몸이 상할까 봐, 한스 씨가 매일 치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어?”
“헉. 직접 부상자들을 돌보고 계신다고?”
“그래.”
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쟁이 끝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장소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나 다름없다.
전쟁 도중에 신체가 잘려 나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들의 절망이 가득 차올라서 사람들을 부정적인 감정에 빠트린다.
그래서 전쟁의 지휘관들이 부상자들을 직접 챙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잠깐 얼굴을 비추면서 상태를 살필 수는 있어도, 보살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이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 하인들은 진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 도련님은 예전부터 자신의 사람들을 귀하게 대해 주셨지. 한스 씨의 일만 보더라도 알 수 있잖아. 자신을 돌봐 준 한스 씨에게 보답하겠다고, 그 자식을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던 때를 생각하면 로만 도련님이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이번 일도 다르지 않아. 우리는 귀족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의문을 보였지만, 그분은 해야만 하는 일을 행할 뿐이야.”
소문이 바람을 타고 퍼져 갔다.
처음에는 하인들끼리 떠들던 얘기가, 어느 순간부터는 들불처럼 번지며 드미트리 전체가 들썩였다.
이번 일.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온 모습에, 드미트리의 사람들로서는 뭉클한 마음이 일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에서 매우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로 인해 시작된 개혁(改革)의 바람은 많은 것을 바꾸었고, 드미트리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최근, 동북쪽 일대에는 변화가 생겼다.
로만 드미트리가 로렌스의 파혼 요청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드미트리를 향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드미트리 출신을 최고로 여겼다.
단순히 재정적인 여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드미트리가 인간적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그곳에서 살기를 바랐다.
변화의 중심.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땅을 사랑하기에, 본인들의 지휘관을 진심으로 존경하기에.
크로노스 제국이 공격을 감행한 날, 일반 평민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신호탄을 적극적으로 터트렸다.
그림자가 문을 여는 순간.
죽음이 동반했다.
보통은 평민들의 도움을 요구하는 계획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일반인에 불과한 그들이 계획을 완벽하게 따라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그림자에게 공격당하면서도 신호탄을 당겼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 땅에서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성을 보았다.
“……드미트리로 돌아오자마자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되는데.”
그것은, 드미트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내비치는 민심(民心)이었다.
* * *
치료실 앞.
한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
폐관 수련 등, 로만 드미트리가 이처럼 시간을 보내는 일이 그에게 처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에 밖으로 나온 치료사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내뱉은 말이 문제였다.
“……로만 도련님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일주일 내내 치료에 전념하면서 얼굴이 많이 창백해지셨고, 이대로라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둘의 회복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죽은 사람을 살리겠다고 산 사람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때부터였다.
한스는 치료실 앞을 배회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이와 같은 시간을 보낼 때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기에, 한스로서는 선뜻 문을 열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두 가지의 생각이 충돌했다.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서라면 이쯤에서 말리는 것이 옳지만, 그렇다고 그의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케빈은 초반에 그가 직접 관리했던 인물이니만큼, 그와 헨더슨이 무사히 몸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멀리서, 익숙한 인물이 다가왔다.
“주군을 만나야겠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치료에 전념하는 중이라, 출입을 반기지 않으실 겁니다.”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치료실을 바라보더니,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 케빈과 헨더슨의 목숨이 달렸다는 것도. 하지만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샐러맨더 대륙의 왕국들이 드미트리와 관련한 문제로 ‘국제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당장 오늘 진행되는 일인데, 더는 주군에게 보고하는 것을 미룰 수 없습니다.”
중요한 자리였다.
국제회의.
다수의 의견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왕국 연합의 힘을 빌려야만 크로노스를 처벌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스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이처럼 중요한 일이라면,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슬쩍.
길을 비켜 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왕 들어가시는 김에, 도련님에게 꼭 몸을 챙기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 * *
치료실 내부.
로만 드미트리가 있었다.
크리스의 출입에, 로만 드미트리는 치료를 잠시 중단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국제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안이니만큼, 방해되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겠다.”
시선을 돌렸다.
다시 치료를 시작하려는 모습에, 크리스는 당황해 물었다.
“설마 국제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크로노스 제국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주군이 국제회의에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면, 왕국 연합은 본인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번 문제를 덮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주군이 케빈과 헨더슨을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죽어 가는 이들을 살리겠다고 주군의 몸을 희생하는 것은, 제가 둘의 입장이었어도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진심 어린 호소였다.
케빈과 헨더슨.
크리스는 그들이 무사하길 바라지만, 그가 판단하는 선후(先後)에는 드미트리가 먼저였다.
드미트리.
나아가, 로만 드미트리의 안위가 최우선이였다.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이 그로서도 어려운 일이었으나, 크리스는 기꺼이 필요한 악역을 맡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이번 국제회의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드미트리가 참석해서 그들을 설득한다고 한들, 왕국 연합의 진심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진정한 복수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국제회의는 그들의 양심에 맡길 문제고, 나는 지금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부터 처리할 생각이다.”
“하지만…….”
“크리스.”
단호한 음성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크리스를 바라보며, 타협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와 관련해서는, 이미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모두 결정한 상태다. 그러니 나를 믿고 기다려라. 이들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듯, 지금은 나도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말에.
크리스는 더는 말릴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치료를 재개했고, 마나를 일으키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제야 보였다.
로만 드미트리의 안색이 전과는 다르게 많이 상했다.
메마른 입술과 푸석푸석한 피부, 그리고 얼굴 전반적으로 보이는 피로감은 로만 드미트리가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속상한 마음이 일었다.
크리스를 비롯한 수하들은 드미트리에 도착하고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는데,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고생길을 받아들였다.
울컥하는 감정을 삼켰다.
어쩌면, 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크리스는 그만 걸음을 돌렸다.
* * *
크리스의 예상대로였다.
드미트리가 불참한 국제회의 자리에서, 오델리아 왕국의 국왕이 의견을 밝혔다.
“이번 사안은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드미트리를 공격한 크로노스 제국의 만행은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나, 문제는 전면전으로 번질 경우입니다. 왕국 연합의 힘만으로는 크로노스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크로노스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발할라 제국을 끌어들여야만 하는데, 이번 사건은 발할라 또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현재 발할라는 로만 드미트리의 일로 난리가 난 상태입니다. 크로노스 제국이 그림자들을 동원해 로만 드미트리를 공격했을 때, 발할라 제국이 보여 준 대응은 모종의 협약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말 만약에. 발할라와 크로노스가 은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크로노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오히려 전쟁의 빌미를 내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프랑크 국왕이 힘을 보탰다.
참으로 난감한 문제였다.
상식적으로는 크로노스를 처벌하는 것이 옳으나, 이번 일에 관해서 그들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다.
마치 전면전을 바라듯이.
그들은 본인들의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크로노스 제국은 드미트리와의 전쟁으로 워프 게이트를 무시한 이동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것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본인들이 보유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왕국 연합의 후방에 존재하는 국가들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경고성의 메시지겠지. 크로노스와의 전쟁은, 대륙을 파멸로 이끌 뿐이다.’
드미트리를 공격한 제국군.
그들이 크로노스 전력 중 얼마를 차지할까.
10%?
5%?
아니다.
단 1%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크로노스 제국이 각 왕국에 첩자를 심은 것처럼, 왕국 연합의 사람들도 제국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을 심었다.
크로노스는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일개 왕국을 무너트릴 수 있을 만큼의 전력을 영주 하나가 갖춘 경우도 있었고,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존재가 바로 황제였다.
생각해 보라.
그들이 하나가 되어 왕국 연합을 공격한다면, 그때는 국경에서 벌어지는 전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재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왕국 연합이 파악한 경악스러운 전력도 크로노스의 일부에 불과했다.
미스틱이 대동한 제국군은 정보망에 아예 파악되지 않았고, 미스틱과 스벤처럼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던 존재들도 그간 밝혀지지 않았던 미지의 존재였다.
심연(深淵)의 구렁텅이처럼.
끝이 없었다.
그들과의 전쟁을 떠올릴 때면, 복수심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오델리아 국왕이 말했다.
“이번 문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태도를 조금 유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달려들었다가는, 크로노스 제국의 대륙 정벌을 향한 야망을 앞당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우리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왕국 연합의 이름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확답을 받되, 타협의 여지는 열어 두도록 합시다.”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움베르토, 레드포드, 프랑크, 오델리아.
그리고 헥토르, 카이로, 드미트리.
무려 7개의 국가가 힘을 합친다고 할지라도, 크로노스 제국 단 하나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도 이번 문제에 얼굴을 붉힐지도 모르는 카이로와 로만 드미트리는 참석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참석했다면 문제가 복잡해졌을 테니, 왕국 연합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패자의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왕국 연합은 스스로가 상황을 뒤엎기보다는, 크로노스와 발할라의 분쟁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여러분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레드포드의 대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론돈 백작이라고 불리던 사내가, 국왕의 자격으로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