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5화 (255/615)

255화 국제회의 (3)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레드포드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로만 드미트리를 도와야 합니다.”

“발할라와 크로노스가 힘을 합쳐, 대놓고 로만 드미트리를 암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절대 좌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레드포드를 구한 영웅입니다. 그런 존재가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대로 외면한다면 백성들은 레드포드를 비난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나라의 핵심 인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소문에 레드포드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비극적이었던 사건.

국왕의 자살과 샤를로 왕자의 죽음으로 론돈 백작은 왕좌를 차지했고, 그 과정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사람들은 모르지 않았다.

만약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레드포드 왕국은, 제국의 공격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국가의 의미를 상실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로만 드미트리를 도와야 한다면서, 군중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드포드 국왕이 말했다.

“나 또한 너희와 생각이 같다. 망국(亡國)의 길로 향하던 레드포드는,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으로 회생의 기회를 얻었다. 그가 우리에게 선물한 것은 단순히 빚을 갚기 위한 돈뿐만이 아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이 옳은 방법인지를 알려 주었고, 우리는 지금부터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할 것이다. 고로, 소집령을 선포하라. 군대를 이루고, 때가 찾아온다면 드미트리를 위해 병력을 일으킬 것이다.”

그때.

이미 전쟁을 각오했다.

실제로 병력을 움직였지만, 헥토르 왕국이 먼저 이번 일을 해결하겠다고 연락해 주면서 일단 국경을 넘는 것을 보류했다.

레드포드의 출진(出陣)은 예민한 문제였다.

헥토르와 발할라의 국경에서 헥토르가 나서는 것은 정당한 사유가 있지만, 레드포드는 발할라와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그때와 지금.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현실을 생각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레드포드 국왕은 성난 표정을 보였다.

* * *

레드포드 국왕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번 문제의 본질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명분이 없는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동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국경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워프’를 활용해서 드미트리의 중심부를 공격한 사건입니다. 한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몇 명이 죽었다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명운이 걸린 문제란 말입니다.”

왕국 연합의 의견.

이해했다.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레드포드 국왕은 타협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당함의 연속이었습니다. 발할라는, 발할라의 영토에서 이루어지는 암살 시도를 대놓고 방관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앞으로 크로노스와 발할라에 거슬리는 존재가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암살이라는 간편한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제국의 위협에서 안전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국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델리아 국왕이었다.

전쟁.

서늘한 단어였다.

그들도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있었다.

문제는 감정적으로 행동했을 때 돌아오는 대가였다.

상대와의 전력을 비교 분석하지 않더라도, 랭킹이라는 지표는 제국과 왕국의 차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50위 이상의 랭커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륙에 존재하는 마탑은 대부분 제국에 터전을 잡았다.

그냥 가볍게 확인하는 전력의 차이도 이 정도로 대단한데, 대체 어떻게 그들에게 복수를 행할 수 있단 말인가.

현실적인 문제였다.

사자가 초식 동물을 공격했다고 해서, 초식 동물은 사자에게 대가를 받아 낼 수 없다.

대가를 받아 내기 위해 얼굴을 들이밀었다간, 목을 물어뜯는 이빨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레드포드 국왕은 물러섬이 없었다.

“전면전을 벌이면 뭐가 어떻습니까? 눈앞의 현실을 외면했을 때, 그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 밖에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커질 뿐입니다. 앞으로 1년 뒤, 2년 뒤, 아니 10년 뒤에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동안 크로노스 제국은 왕국 연합과의 간격을 더욱 벌릴 테고,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누군가는 대세에 따라 왕국 연합을 탈퇴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당신들이 하는 말이야말로 망발입니다!”

콰앙!

레드포드 국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타협을 주장하던 사람들을 훑어보며, 분노를 토해 냈다.

“만약 여러분들이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면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겠습니까? 왕국 연합의 소속이 아니기에, 그리고 일을 당한 본인이 아니기에. 여러분들은 복수는 위험한 선택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겁니다. 레드포드는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을 방관할 생각이 없습니다. 만약 드미트리 공국이 전쟁을 통한 복수를 원한다면. 그게, 멸망(滅亡)으로 향하는 길일지라도 레드포드는 기꺼이 그들을 따를 것입니다.”

탁.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레드포드 국왕의 발언은 타협이 아닌 통보였고, 그렇다면 왕국 연합은 존재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현 시간부로 레드포드 왕국은 ‘왕국 연합’에서 탈퇴하겠습니다. 어디, 먼발치에서 언제나처럼 상황을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제국의 칼날이 당신들을 향할 때.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레드포드 국왕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 * *

회의실이 충격에 빠졌다.

아직 감정을 추스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한편에서 침묵을 지키던 존재가 입을 열었다.

“국제회의를 진행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이전과는 다른 상황을 기대했습니다.”

에드윈 헥토르였다.

각 나라의 국왕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는 헥토르를 대표해서 초대에 응했다.

“국왕님들께서는 이전에 있었던 회의의 내용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처음으로 참석했던 국제회의는 참으로 초라한 자리였습니다. 그때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었습니다. 분명히 크로노스 제국이 만행을 저질렀건만, 국제회의의 안건은 그들에게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잘 해결할지를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헥토르도 발할라 제국의 존재에 피 말리는 세월을 보냈기에, 제국에 반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이번은 다릅니다.”

레드포드.

그들과는 포인트가 달랐다.

레드포드는 은인에 대한 감정이 포함되었다면, 에드윈 헥토르는 실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그때의 왕국 연합은 제국에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특별히 다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처음으로 제국의 계획을 번번이 무너트리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크로노스가 개입한 베네딕트 후작의 반란은 로만 드미트리에 의해 단숨에 정리되었습니다. 대놓고 암살 의도를 드러냈던 발할라의 초대도, 로만 드미트리는 대륙 십이검이라고 불리는 바르보사의 목을 날리면서 스스로를 증명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크로노스 제국의 기습적인 공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서클의 마법사와 6성의 검사를 동원하면서까지 확실한 성과를 거두길 바랐지만, 그들은 드미트리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판도가 변했다.

희망이 허락되지 않았던 세상에, 새로운 대항마(對抗馬)가 나타났다.

“로만 드미트리는 제국의 예상을 벗어나는 존재입니다. 제국은 그를 처리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도, 단 한 번도 계획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그게, 이 자리가 실망스러운 이유입니다. 과거와 미래. 그 어느 때도 제국에 복수할 완벽한 기회가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는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로만 드미트리라는 완벽한 대항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국왕님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과거보다 좋은 상황인데도, 마치 그때와 다르지 않다는 듯이 똑같은 태도를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헥토르.

그들은, 드미트리의 원조를 받으면서부터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하지만 서로의 관계를 떠나서, 로만 드미트리는 대륙의 약소국들을 이끌 존재라는 확신이 있었다.

에드윈 헥토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드포드 국왕이 나간 순간.

그도, 더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헥토르는 애초에 왕국 연합의 소속도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왕국 연합과는 별개로 이번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이 흘러 오늘을 되돌아볼 날이 찾아온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았던 선택에 후회할 것입니다. 대륙의 역사가, 늘 제국을 승자로 기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국제회의.

그 끝은 파국(破局)이었다.

* * *

회의실이 휑해졌다.

단 두 사람이 나갔을 뿐인데, 찬 바람이 부는 상황에 오델리아 국왕은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다들 정신이 나갔습니다. 완벽한 대항마라니. 로만 드미트리가 아무리 발악할지라도, 그는 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머나먼 과거.

왕국 연합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루어진 참혹한 학살은, 왕국 연합과 제국 간의 확실한 서열을 정립했다.

움베르토 국왕이 말했다.

“레드포드 국왕과 헥토르 왕자의 발언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샐러맨더 대륙에서 크로노스와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나라는 저희 움베르토일 것입니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륙 최고의 검사가 된다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가 홀로 수만의 적을 도륙한다고 할지라도, 제국은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해 우리를 찍어 누를 것입니다. 그게, 역사적으로 되풀이되어 왔던 대륙의 현실입니다.”

대대로.

역사는 그간의 일을 말했다.

패배로 얼룩진 역사에서, 왕국 연합의 선조들은 절대 제국을 적대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겼다.

겁쟁이인 것이 아니다.

초식 동물이 사자를 상대로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현실을 모르는 객기(客氣)일 뿐이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움베르토를 비롯한 왕국 연합의 사람들은, 크로노스 제국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레드포드 국왕의 말처럼.

언제고 칼날이 본인들에게 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로부터 약자는, 어차피 포식자에 의해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게.

약자의 삶이었다.

오델리아 국왕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설마 이번 일이 정말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겠지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과격하나, 영리한 인물입니다. 크로노스와의 전면전(全面戰)은 드미트리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일인데, 설마 그런 선택을 하겠습니까? 레드포드 국왕과 헥토르 왕자가 드미트리를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극단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한계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크로노스가 분노한다면, 그때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들 왜 현실을 외면하나 모르겠습니다. 분하고 억울해도, 이것이 약소국들의 현실인 것을.”

그들은 확신했다.

왕국 연합의 도움이 없다면.

드미트리의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전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겨우 레드포드와 헥토르의 도움 가지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제2차 국제회의가 다급하게 소집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드미트리 공국이, 크로노스 제국을 상대로 먼저 전쟁을 선포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