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국제회의 (4)
선전포고 하루 전.
치료에 전념하던 로만 드미트리는, 마나를 거두며 시체처럼 누워 있는 두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끝났다.’
선천의 기운.
태생의 원천을 활용해 자생의 능력을 살렸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행한 기술이 정말 죽은 사람조차 살려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스스로가 살아남아야만 했다.
만약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대로 의식의 끈을 놓는다면, 그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죽음.
익숙한 단어였다.
정점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은 광마만이 아니었다.
많았다.
차갑고 더러운 밑바닥에서부터 동료들의 시체를 밟아 올라갔고, 한 치의 여유로 허락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에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후에 무림을 통일하고,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면서 치열했던 날의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었다.
그때는 왜.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을까.
그때도 사람들은 천마 백중혁이 자신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삶의 치열함은 언제나 후회를 남겼다.
삶의 끝자락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기회를 맞이했을 때, 신의 부름을 거절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처럼 인간으로 죽고 싶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얻은 지금은, 천마의 길을 걷되 최대한 후회스러운 일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치료를 위한 노력.
대단한 일이 아니다.
선천의 기운을 소모했다고는 하나, 천외(天外)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자연과의 동화는 소모되었던 선천의 기운을 더욱 충만한 힘으로 채워 줄 것이다.
전생과는 다른 점은 수하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크로노스 제국’이라는 적을 앞두고도, 일단 수하들의 안위를 챙기는 방향을 먼저 택했다는 것이다.
그게.
현생의 방식이었다.
이만 치료실을 나선 로만 드미트리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크리스를 선두로.
드미트리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나올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에, 로만 드미트리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보였다.
“지금부터 드미트리 공국의 영주들을 전부 소집하라.”
“명을 받듭니다.”
천마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수하들을 먼저 챙겼을 뿐, 천마의 방식에 자비가 깃들지는 않을 것이다.
* * *
딱 3시간.
드미트리의 영주들이 모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애초에 모든 일을 중단하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드미트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회의실.
귀족들이 먼저 자리했다.
앞으로 진행될 회의의 내용에, 한때는 동북쪽 연합회를 이끌던 콘라드 자작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로만 드미트리 님이 호전적이라고 할지라도,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겠지요? 요새 자꾸만 겁이 납니다. 크로노스 제국은 대륙의 왕국들이 전부 힘을 합쳐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인데, 우리가 모시는 주군은 단 한 번도 물러나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러다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그때부터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콘라드를 따르던 부류들.
그들도 같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옆에서 대화를 듣던 귀족 중, 로렌스 자작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답했다.
“크로노스 제국은 드미트리를 공격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책임을 물어야만 하는 문제고, 그것이 전쟁이라면 저는 기꺼이 전장의 선봉에서 목숨을 걸 것입니다. 다들 입조심 하십시오. 드미트리의 미래는, 언제나 주군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아니, 우리가 주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로렌스 자작님처럼, 우리 또한 주군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크로노스와의 전쟁이 무모하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주군의 말이 옳다면서 고개만 숙이고 있는 부류들은, 이 나라를 위한 충신(忠臣)이 아닙니다.”
“지금 저를 비난하는 말씀입니까?”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로렌스 자작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크로노스와의 전쟁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벌써 의견이 분분했다.
로렌스를 따르는 세력.
콘라드를 따르는 세력.
드미트리는 두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로렌스 자작을 따르는 세력은 로만 드미트리의 말이 무조건 옳다면서, 그가 볏짚을 끌어안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망설임 없이 이행할 부류였다.
반대로 콘라드 자작을 따르는 세력들은 모든 선택에 의구심을 보였다.
일단, 어떤 일이든 합리적인 방법을 택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크로노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두 세력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드미트리에 충성을 맹세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충성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의구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한 달.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는 경악의 연속이었다.
발할라와 크로노스의 위협에도 살아 돌아온 것도 대단했는데, 케빈과 헨더슨을 살리겠다고 일주일이 넘도록 치료실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했다.
크리스가 둘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처럼.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 그를 위해 살아간다면 버림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겼다.
귀족사회.
낭만을 잃은 세상이다.
쓸모가 없어진다면 토사구팽(兔死狗烹)을 당하는 이 세상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신하와의 의리를 보였다.
어떤 이들은 이게 별거 아닌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에, 로만 드미트리가 보여 주는 모습은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 모두.
로만 드미트리를 따랐다.
의견이 다를지언정, 3시간 만에 드미트리에 도착한 것은 그들의 믿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이 입장하십니다.”
하인의 음성.
의견을 대립하던 사람들은, 그 말에 곧바로 자신들이 따르는 주군을 향한 예의를 보였다.
* * *
로만 드미트리가 상석에 앉았다.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림에, 로만 드미트리는 귀족들을 앉힌 뒤에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크로노스 제국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였다. 그런데 드미트리뿐만 아니라, 국제회의에서도 이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들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만행은 일상적인 일이기에, 사람들은 분노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겠지. 나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위기가 변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싸늘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보았다.
“크로노스 제국이 드미트리를 공격하고, 대륙법을 어겼다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겨우 1만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드미트리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그로 인한 여파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계획을 감행했다. 그것이 대륙의 현실이다. 그들이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갖춘 무력을 떠나서 그간의 역사가 그래도 된다는 근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대륙의 왕국들.
그들의 역사는 항상 크로노스 제국이라는 거대한 악(惡)에 시달렸지만, 그들에게 경각심을 부여할 만큼의 확실한 보복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경에서의 전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들의 공격에 반격할 뿐이지, 먼저 제국의 영토를 공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쌓였다.
악연의 시작이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지금에 이르러, 사람들은 현실에 길들이고 말았다.
“난, 지금부터 드미트리를 공격한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정말 전쟁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콘라드 자작이었다.
그의 물음에,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크로노스의 암살자들이 나를 공격한 그 순간부터, 제국과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그날 암살 길드를 전부 처리한 뒤에 ‘암살’을 행할 생각이라면 대가를 각오하라고 경고를 보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발할라 영토에서의 암살과 드미트리를 직접 공격한 것이었다. 콘라드 자작.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일방적인 공격에 피를 흘리며 죽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고개를 숙이고 타협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만약 그들이 이번 일에 사죄한다면, 우리는 강자가 내뱉는 사과 몇 마디에 평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래, 아니다. 지금부터 이번 문제는 크로노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들과의 타협을 불허하고, 우리를 건드린 대가를 받아 낼 때까지 그들과의 전쟁을 불사할 것이다. 크로노스가 평화를 바란다고 한들. 내가, 이 로만 드미트리가 그들과의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말을 내뱉을수록.
로만 드미트리의 존재감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천마 백중혁.
삶의 밑바닥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면서도, 상대가 누구든 얕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존재다.
상황이 변했다.
지금까지는 받아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싸움은 먼저 주도할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현 시간부로 드미트리 공국은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각 영주는 병력을 집결시키고, 경계 태세를 발령해 적과의 전쟁을 대비하라. 명심해라. 이번 전쟁은, 대륙의 판도가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례를 남길 것이다.”
벼락같은 명령.
의중을 되물었던 콘라드 자작이었지만, 확고한 명령에는 조금의 의문도 보이지 않았다.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드미트리의 영주들.
그들에게, 로만 드미트리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 * *
갑작스러운 선전포고.
그것은 레드포드, 헥토르와도 상의하지 않은 일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만남을 기다리던 그들로서는, 드미트리의 행보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전쟁을 선포하다니.’
경악스러웠다.
이번 일은 명백히 크로노스의 책임이라지만, 제국의 전력을 생각한다면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기에 에드윈 헥토르로서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로만 드미트리를 많이 파악했다고 생각했건만, 이와 같은 결정을 동의도 없이 선포할 줄은 몰랐다.
‘드미트리는 국제회의 참석을 거절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의 일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와 같은 행보라면 애초에 도움을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드미트리만의 힘으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레드포드와 헥토르가 도울지라도, 1%의 승산도 없는 것이 크로노스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그날.
에드윈 헥토르는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
로만 드미트리와의 만남을 통해 상황을 조율하고 싶었고, 크로노스와의 전쟁이 현실이 된다면 헥토르 왕국으로서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크로노스 제국은 대륙 정벌을 향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유일한 대항마인 로만 드미트리마저 무너진다면, 언젠가는 크로노스 제국에 의해 차례로 대륙의 왕국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천공의 마탑주는 이런 말도 했었다.
“에드윈. 너를 비롯한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천공의 마탑이 크로노스 제국에 자리 잡은 이유는, 마법을 발전시키기 위한 환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크로노스에 충성하는 것만이 앞으로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네가 나의 제자로 남길 바라기에 해 주는 말이다. 크로노스 제국에 복수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멈춰라.”
천공의 마법사.
그는 천외의 존재였다.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조차도, 크로노스 제국에 대해 알아보는 에드윈 헥토르를 바라보며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로만 드미트리와의 연결 고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예상할 수 없는 변수를 맞닥트렸을 때, 그걸 이겨 낼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가 유일했다.
남부 전선에서의 전쟁.
로만 드미트리를 직접 경험하며, 에드윈 헥토르는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강한 확신을 얻었다.
불행히도 로만 드미트리는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레드포드 국왕도 같이하는 자리에서, 드미트리를 대표해서 파비우스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비우스 백작입니다.”
“곧바로 본론을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로만 드미트리 님의 의중이 무엇입니까?”
진실을 바라는 물음.
레드포드와 헥토르가 드미트리의 편임을 알기에, 파비우스 백작은 익살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보이는 그대로입니다.”
전쟁의 선언.
로만 드미트리는, 이미 행동에 옮겼다.
“주군은 드미트리만의 힘으로 복수하길 바라십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국제회의에 참석해 다른 나라에 상황을 전달해 주십시오. 레드포드와 헥토르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순수하게 카이로와 드미트리의 연합만으로 이루어 내는 결과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순간 당황했다.
파비우스의 발언.
이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