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화 (258/615)

258화 학살의 밤 (1)

늦은 밤.

라스칼의 지휘관인 파블로 백작은, 랜턴의 불빛에 의지한 채로 대륙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로노스 동부에는 이곳 라스칼을 포함해서 전초 기지가 둘, 그리고 적과의 국경을 바로 맞닥트리는 여덟 개의 방어 진지가 존재했다.

현재 크로노스는 전초 기지로 병력을 집결하는 상황이었다.

병력의 정비를 끝내고 공격을 시작하는 순간, 카이로와 드미트리 연합은 국경을 넘어 들이닥치는 제국의 병력에 절망을 맛보게 될 것이다.

패배할 확률은 없었다.

수차례 지도를 들여다보며 전력을 계산해 보았지만, 이번 싸움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남부 전선에서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는 절대 전쟁에 무지한 애송이가 아니야. 그렇다면 크로노스와의 전면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면서도 전쟁을 선포했다는 건데……. 내가 모르는 허점이 있는 걸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동부에 넓게 펼쳐진 평야는, 어떤 개수작을 부리든 압도적인 전략의 차이를 메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로노스는 전쟁 국가다.

항상 전쟁이 끊이질 않는 나라이니만큼,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을 미래를 위한 교본으로 삼았다.

특히 로만 드미트리.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헥토르와의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그의 전략은 분석할 가치가 있었고, 사람들은 긴급한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가 어떻게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를 공부했다.

단순히 본능에 의한 판단이 아니다.

에드윈 헥토르의 전략을 정확히 간파하고 가장 공격적인 선택을 택했고, 결국 전쟁의 양상을 뒤엎은 것은 로만 드미트리의 과감한 전략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무력이 주요했음을 알았다.

그런 인물이.

과연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전쟁을 선포했을까?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의심이 일었지만, 각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은 드미트리를 도우려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는 보고를 전달했다.

그나마 헥토르와 레드포드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황.

겉으로 드러난 드미트리의 전력이 실제로는 수배 더 강하다고 할지라도, 이건 승산이 없었다.

드미트리와 크로노스.

고블린과 드래곤의 싸움이었다.

고블린이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한 대단한 고블린일지라도, 드래곤의 브레스 한 방이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샐러맨더 대륙의 왕국들이 그동안 멍청해서 반기를 들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이론적인 계산부터 아예 상대되질 않는데, 대체 무슨 수로 크로노스와 전쟁을 벌인단 말인가.

선전포고 직후.

황실에서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국(小國)이 주제를 모르고 제국에 이빨을 드러냈다. 제국은 사소한 일일지라도, 제국에 반기를 드는 그 어떠한 선례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병력을 집결시켜라. 카이로와 드미트리, 그리고 그에 가담한 모든 세력은 대륙 지도에서 이름을 없앨 것이다.”

드미트리의 멸망.

코앞으로 다가온 미래였다.

정보에 의하면 드미트리가 나름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제국을 상대로는 의미 없는 발악에 불과했다.

며칠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전초 기지에 본대가 도착한다면, 드미트리는 멸망의 불길로 타오를 것이다.

그때였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지휘관님! 불이 났습니다! 지금 라스칼 전체에, 불이 번지고 있습니다!”

“뭐라고?!”

눈을 부릅떴다.

불이라니!

파블로 백작은, 상황 파악을 위해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기사의 말대로였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붉은색으로 뒤덮인 광경이 펼쳐졌다.

화륵.

화르르르륵.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

파블로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건물 한두 개가 타는 정도가 아니라, 이대로라면 라스칼 전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화마(火魔)였다.

“병력을 동원해 얼른 화재를 진압하라! 물자의 손실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한다! 아직 불이 번지지 않은 지점을 확보하고, 그곳에서부터 불을 진압해 더는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막아라!”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파블로 백작의 명령에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일부는 물을 날라서 불길에 뿌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크악.”

“악!”

물을 뿌리던 이들이 폭발에 휩싸였다.

불길에 수분이 닿자 엄청난 폭발이 일었고, 그 모습에 파블로 백작은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기름?’

확실했다.

단순한 화재 사고가 아니라, 비릿한 냄새는 기름을 활용한 화재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실수에 의한 화재는 진압할 수 있지만, 의도적인 방화는 불을 지른 원흉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 존재는 로만 드미트리일 것이 분명했다.

‘설마 라스칼을 공격하려는 의도인가.’

말이 되지 않았다.

라스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최전방 방어 진지의 감시를 피해야 하고, 이곳에 숨어들었다고 할지라도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라스칼을 무너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만큼 라스칼의 전력은 상당한데, 로만 드미트리는 대체 무슨 의도로 이곳에 불을 질렀단 말인가.

일단.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적의 공격이라는 확신이 생긴 순간부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물자 창고로 간다. 그곳에서 화재 진압에 필요한 마법 스크롤을 모두 확보한 뒤에, 단숨에 화재를 진압할 것이다. 병사들은 나를 따르라!”

작전을 바꾸었다.

불이 이렇게까지 번진 상황이라면,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 ‘마법’의 힘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물자 창고가, 불에 타오르는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아, 안 돼!”

불행 중 다행히도.

불은 완벽하게 번지지 않았다.

일부가 타오르는 상황이라, 아직은 안의 내용물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물자 창고에 진입해서 마법 스크롤을 확보하라! 명령이다! 건물이 전부 타올라서 무너지기 전에, 목숨을 걸고 마법 스크롤을 확보하란 말이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녀석이 있다면 내가 친히 목을 베어 버릴 것이다.”

슥.

검을 뽑았다.

파블로 백작의 서슬 퍼런 기세에,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일제히 건물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말처럼.

불길을 뚫고 들어갈 틈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화악.

화르르르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화염을 뚫고 나타난 한 존재가, 불에 타오르는 모습으로 그대로 크로노스 제국 병사의 목을 날렸다.

순간.

파블로 백작은 넋을 잃었다.

눈앞의 존재.

그는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 * *

이번 작전.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적들이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

로만 드미트리는 병사들을 시켜 라스칼에 불을 질렀고, 의도적인 방화는 순식간에 빠르게 번졌다.

그리고.

화륵.

화르르르르륵.

로만 드미트리는 직접 물자 창고에 불을 질렀다.

타오르는 화염이 몸을 휘감았지만, 화마의 불길을 받아들인 이후로 ‘불’에 한해서는 압도적인 친화력을 보였다.

지금의 장면이 그러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에 타오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로만 드미트리와 동화한 화염의 기운들이 요동치는 것일 뿐 실제로 불타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파블로 백작이 경악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에 경직되어 있는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뛰쳐나오며 병사들을 공격했다.

“크악!”

“로만 드미트리를 막아라!”

난리가 났다.

병사들이 순식간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파블로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눈에 보이는 적은 로만 드미트리 단 하나였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단 한 명의 적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콰릉.

콰르르르릉.

크로노스의 기사들.

그들이 일제히 오라를 일으켰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불길에, 그들은 오라로 불길을 밀어내며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번뜩.

목이 날아갔다.

선두에서 달려들던 크로노스의 기사가 쓰러지자, 로만 드미트리는 오라를 폭발시키며 뒤따라오는 적들도 차례로 베어 버렸다.

예상하고도 반격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눈앞에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반응했는데도, 어느새 목을 가르는 검에 시야가 뒤틀렸다.

빨랐다.

화염에 휩싸인 채로, 로만 드미트리는 적들을 도륙했다.

게다가.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자꾸만 폭발이 일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불길에,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로서는 수적인 우위를 제대로 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라 검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황급히 오라를 일으켜서 몸을 보호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불길로 일렁이는 공간에서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악.

화르르르르륵.

로만 드미트리는 불길을 뚫고 달려들었다.

불길 속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존재들로서는,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학살이었다.

파블로 백작이 대동한 수백의 병력이, 로만 드미트리 단 하나를 쓰러트리지 못해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라스칼을 직접 공격한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불길 사이를 넘나들며 제국군을 상대하는 모습은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콰르르르르릉.

건물이 무너졌다.

불길이 건물을 완전히 집어삼킨 상황에, 파블로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적의 의도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상대는 로만 드미트리다.

제국에 이빨을 드러낸 괴물.

지금부터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릴 차례였다.

* * *

대륙 지도를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의 의중을 읽으려 노력했다.

드미트리가 택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계산했건만, 그중에 먼저 공격하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괴물 같은 새끼. 정말, 크로노스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믿는 건가?’

라스칼의 수뇌부들은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의 행보.

그동안 당한 일이 있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지만, 분명히 협상을 통해서 이 상황을 마무리하려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로노스 동부를 도맡은 지휘관들은, 서로의 연락을 통해서 이번 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국경을 넘었다.

타협의 여지를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이, 로만 드미트리는 라스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동안 상대했던 녀석들은 네 녀석의 과감함에 휘둘렸을지 몰라도, 크로노스 제국의 안방에 들어온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다.’

물자 창고를 과감하게 버렸다.

현장에서 도망친 파블로 백작은, 상부에 현 상황을 보고한 뒤에 곧바로 마법 확성기를 연결했다.

[라스칼의 병사들에게 알린다. 로만 드미트리와 그 일당이 라스칼에 침투했다. 병사들은 무장하고, 그들을 발견하는 즉시 척살(刺殺)하라. 다시 한번 알린다. 로만 드미트리와 그 병력이 라스칼에 침투했다. 적색 경보령을 선포하고, 그에 따라 대응하라.]

웨에에에엥-

경고음이 울렸다.

라스칼은 전쟁이 일상인 곳이다.

오늘과 같은 상황에 대한 대응 체계가 완벽하게 준비되었고, 파블로 백작은 신호를 보내자마자 본인도 무장을 갖추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착각한 게 하나 있었다.

불을 질러서 혼란을 가중한다면, 소수 정예만으로도 라스칼의 체계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이곳은 크로노스다.

파블로 백작이 밖으로 나서자, 경고음을 들은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크로노스 제7 기사단 집결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크로노스의 일곱 번째 검.

기사단장은 5성의 오라 검사였고, 그를 따르는 백 명의 검사들 모두 3성 이상의 오라 검사들로 이루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크로노스 내에 존재하는 마탑 중 하나인 블루 아일랜드(Blue Island)의 마법사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것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대외비였고, 블루 아일랜드의 마법사들이 ‘물’을 다룬다는 것을 생각하면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과는 상성이었다.

마지막으로.

라스칼에는 약 1만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

로만 드미트리의 계획은 단단히 잘못되었다.

그는 기습적인 공격으로 라스칼을 위기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와 달랐다.

“로만 드미트리가 제 발로 사지에 들어왔다. 이번 기회를 살려, 반드시 그를 죽여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력.

주변으로 제국군이 득실거렸다.

라스칼에 번지는 불길보다, 그들의 기세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파블로 백작이 사나운 표정을 보였다.

장담컨대, 로만 드미트리는 라스칼에 발을 들인 이상 살아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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